①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의 정부(政府)가 여주(驪州)와 양근옥(楊根獄)에 갇혀있던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을, 금부(禁府)에서 재판(裁判)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서울로 이감(移監)시켰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 있다(本稿 113쪽 참조).
여주(驪州) 교우(敎友)들은 王의 승하(昇遐) 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체포(逮捕)되어 오랜 고문(拷問)을 당하고 났는데, 바로 그 후에 이 명령(命令)이 내려진 것이다. 이 증거자(證據者)들 중 주요(主要)한 이들에 대하여, 조선(朝鮮)에 전하여 내려오는 몇 가지 사실(事實)을 여기에 소개(紹介)하겠다.
②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는 소론(少論)에 속하는 전주(全州) 이씨(李氏) 집안의 자손(子孫)으로 여주(驪州) 고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곧기는 하지만, 난폭(亂暴)하고 성을 잘 내는 성격(性格)과, 의술(醫術)에서 비상한 힘과 용기(勇氣), 분에 넘치는 야심(野心)으로 유명했다. 그는 여행(旅行)할 때에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낮에는 쉬고 밤에만 걷는 기벽(奇癖)이 있었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난폭(亂暴)하고 불의(不義)한 행동(行動)을 자주 하였다 한다.
그는 절친(切親)한 친구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권고로 신앙(信仰)에 인도(引導)되었는데, 김건순(金健淳)은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와 협력(協力)하여, 천주교교리(天主敎敎理)에 대한 책(冊)을 쓰다가 완성(完成)하지 못한 바로 그 사람이다. 두 친구는 함께 천주교인(天主敎人)이 되고 성세(聖洗)를 받았다. 그때부터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는 새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기의 성격(性格)을 억제(抑制)하는데 성공(成功)하였으며, 다만 그의 정직(正直)과 굳셈만은 보존(保存)하였다. 그는 신앙(信仰)에 대한 용감성(勇敢性)이 넘쳐, 자기의 신앙(信仰)을 드러내 놓고 고백(告白)하며, 그가 입교(입교)시킨 자기의 아버지와 아내와 더불어, 아무에게도 숨기지 않고 자기의 종교본분(宗敎本分)을 지켜 나갔다.
여주(驪州) 읍내(邑內)에 사는 그의 사촌(四寸) 원(元)「사신」경도(景道) 요한도 매우 친하게 지내던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에 의하여 입교(入敎)하였으며, 그의 온 가족(家族)도 그의 본을 따라 천주교(天主敎)를 신봉(信奉)하였다.
③ 경신(庚申)(1800)년 3월에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와 원경도(元景道) 요한은 그들의 친구 정종호(鄭宗浩)의 집으로 부활축일(復活祝日)을 지내러 갔다. 본명(本名)을 알 수 없는 이 정종호(鄭宗浩)는 모두 천주교인(天主敎人)인 자기 집안에 그들을 기꺼이 맞아들였다.
개를 잡고 술을 많이 장만하여, 부활(復活)날에는 가족과 손님들이, 이웃에 사는 몇몇 교우(敎友)들과 함께 길가에 모여, 모두 큰소리로「알렐루야」와「부활삼종경(復活三鐘經)」을 외우고 나서, 바가지를 두드려 가며 기도문(祈禱文)을 노래하였다. 그런 다음에 고기와 술로 음식을 먹고, 식사(食事)가 끝난 다음에 다시 노래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신심행사(信心行事)와 우애적(友愛的)인 잔치로 하룻날이 흐르고 있었는데, 외교인(外敎人)들에서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들은 수령(守令)이 그들을 잡으러 포졸(捕卒)들을 보냈다. 그들은 모두 잡혀서 (獄)으로 끌려갔다. 끌려가는 중에 원경도(元景道) 요한의 집 앞을 지나가는데, 그의 늙은 어머니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포졸(捕卒)들 앞에 내달아 와서, 자기 아들을 데려가기 전에 잠깐만 보게 해 달라고 청하였으니 허락(許諾)되지 않았고, 붙잡힌 교우(敎友)들은 가던 길을 계속하였다.
관아(官衙)에 이르니 관장(官長)이 그들에게
ꡒ너희 공범자와 너희들을 꾄 자들을 대고 천주를 배반 하여라!ꡓ
고 말하였다.
원경도(元景道) 요한이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말하였다.
ꡒ어떤 사람을 밀고(密告)하는 것은 엄금(嚴禁)되어 있으니, 죽을지라도 저희들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천주(天主)를 배반(背反)하는 일은 더구나 불가능(不可能)한 일입니다.ꡓ
관장(官長)은 성이 나서
ꡒ주리를 틀고 주장질을 하라!ꡓ
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 마르띠노의 용기(勇氣)와 격려(激勵)의 힘으로, 그들은 모두가 그 혹독(酷毒)한 형벌(刑罰)에도 굳건하였으며, 여러 번 혹형(酷刑)을 되풀이하였으나, 소용(所用)이 없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옥에 갇혔다.
④ 그 무렵 같은 여주(驪州) 고을 점돌에 풍천(豊川) 임씨(任氏) 가문의 임희영(任喜 永)이라는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의 부모(父母)와 형제자매(兄弟姉妹)들은 열심한 천주교인(天主敎人)이었으나, 그만은 고집하여 외교인(外敎人)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자기의 힘에 부치는 일이라는 핑계를 대며,
ꡒ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려면 눈도 귀도 또 다른 관능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ꡓ
하고 말하였다. 그의 아버지기 아무리 권고하고 나루라도 그는 결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ꡒ내가 죽기 전에 네가 천주교인이 되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을 떠나면서 한이 없겠다.ꡓ
아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므로 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ꡒ나는 내일 죽게 되어 있다. 네 태도를 보니 내가 죽은 뒤에 조상들에게 드리는 관례적인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 같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네가 내 말을 잘 듣지 않았으니, 이제는 잘 들어라! 네가 나 죽은 다음에 제사를 지내면 너를 자식으로 알지 않겠으니 상복도 입지를 말라!ꡓ
이런 말은 모든 동양(東洋)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그렇지만, 특히 조선(朝鮮)에서는 가장 무서운 저주(咀呪)의 말이다. 여기서도 임희영(任喜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틀 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분명한 애통(哀慟)의 표시를 하고 상복(喪服)을 입었으나, 관례적(慣例的)인 제사(祭祀)는 하나도 드리지 않았다. 그의 모든 일가친척(親戚)들과 친지(親知)들은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며, 불만(不滿)과 불평(不評)을 숨기지 않았다.
경신(庚申)(1800)년 봄에 소상(小祥)이 돌아왔는데, 그때에도 그는 아무 제사(祭祀)도 드리지 않았다. 조금 후에 그를 감시(監視)하던 여주목사(驪州牧使)가 포졸(捕卒)들을 보내어 그를 관아(官衙)에 출두시킨 후 이렇게 말하였다.
ꡒ나는 네가 천주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네가 돌아가신 부모에게 제사를 올리지 않는다고 비난하니,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를 죽일 수밖에 없겠다.ꡓ
임희영(任喜永)은 자기 아버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침묵(沈黙)을 지켰고, 이로 인하여 이미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와 원경도(元景道) 요한과 그의 동료들이 갇혀있는 옥(獄)으로 끌려가 그들과 같이 재판(裁判)을 받고 선고(宣告)를 받게 되었다.
⑤ 다른 천주교인(天主敎人) 두 사람이 임희영(任喜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잡혔었다. 그들은 조(趙)「제동」과 그의 아들 조(趙)「용삼」베드로였는데, 조(趙)「제동」은 양근(楊根) 고을에 사는 한양(漢陽) 조씨(趙氏) 가문의 양반이었다. 상처(喪妻)를 하고 빈궁(貧窮)에 빠져 그 이상 살 수가 없는 고향(故鄕)을 떠나, 두 아들을 데리고 임희영(任喜永)의 집으로 피해 왔었고, 임희영(任喜永)은 얼마 전부터 그들을 너그럽게 대접(待接)하고 있었다.
조씨의 맏아들「용삼」베드로는 기질이 잔약(孱弱)하고 병약(病弱)하며, 외양도 못생기고, 세상 물정에는 아주 캄캄한데다가 집안도 가난하여, 배우자(配偶者)를 얻을 수가 없었다. 30세가 되었는데도 그는 아직 관례(冠禮)도 이루지 못하고, 결혼(結婚)도 못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놀렸는데, 다만 정약종(丁若鍾) 아우스띠노만은 허약한 몸 안에 있는 위대(偉大)한 영혼(靈魂)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는 조(趙)「용삼을 많은 존경(尊敬)을 가지고 대하며, 그의 신앙(信仰)과 덕(德)을 찬양(讚揚)하여 마지않았다.
⑥ 포졸(捕卒)들이 임희영(任喜永)을 잡으러 왔을 때, 趙(용삼) 베드로와 그의 아버지는
주인과 같이 잡혔으나, 베드로의 아우「호삼」은 피할 수가 있었다. 길을가는 동안 조
씨(趙氏)는 자기아들에게,
ꡒ이번에 나는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으니, 나는 틀림없이 순교자 가 될 것
이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ꡓ
하고 물으니, 趙(용삼) 베드로는
ꡒ누구도 자기의 결심과 자기의 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약하고 불쌍한 제가 어떻게 감
히 순교하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ꡓ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관장(官長) 앞에 끌려갔는데, 첫 번 신문(訊問)에서부터 아버지는 그의 어리석은
자만(自慢)과, 자신의 힘을 너무 믿은데 대한 벌을 받아, 슬프게도 굴복(屈伏)하였다.
관장(官長)은 趙(용삼) 베드로에게
ꡒ너도 배교하라!ꡓ
고 말하니, 趙((용삼) 베드로는
ꡒ저는 배교할 수 없습니다.ꡓ
하고 대답하였다.
ꡒ아니, 네 아비가 목숨을 보전하려고 하는데 너는 죽기를 원한단 말이냐? 그것은 효도를
어기는 것이 아니냐?ꡓ
ꡒ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부모가 그른 길로 가고 있을 때라도, 자식들은 그들의
모든 본분을 다하기를 계속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자식들이 효도를 어긴다고 하겠습니
까? 각자가 자기의 본성을 따라 부모를 공경하고 섬겨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분들보다 먼저 그분들의 위에 계시는 천지만물의 대왕이시며, 공통된 아버지인신 분
이 계시니, 그분이 제 부모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분이 제게도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
니 어떻게 배반할 수가 있겠습니까?ꡓ
관장(官長)은 성이 나서 여느 때보다도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을 곁들인 신문(訊問)을
두세 번 더하였고, 趙(용삼) 베드로는 형벌(刑罰)을 당하는 중에 무릎이부러져 다리에서
떨어져나가고,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더욱 무서운 시련(試鍊)을 겪어야만 했다. 어떠한 권고(勸告)도, 아무리 무
서운 형벌(刑罰)도 쓸데없음을 보고, 관장(官長)은 그의 아버지를 불러오게 하여 증거자
(證據者) 앞에서 그에게 말하였다.
ꡒ나는 네 아들 때문에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들에게 말 하여라! 네 말 한마디
로 너희 둘을 다 살릴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네게 달렸으니, 마음을 돌리도록 그
에게 권고하라!ꡓ
그와 동시에 아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혹독(酷毒)하게 치게 하였다. 趙(용삼) 베드로는
굴복(屈伏)하여 소리를 질렀다.
ꡒ저는 인륜을 끊을 수는 없습니다. 저 때문에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하는 것을 원치 않으
니, 저희 둘을 다 살려 주십시오.ꡓ
그런 다음 그는 분명히 굴복(屈伏)을 하였고, 관장(官長)은 성공(成功)한 것을 기뻐하며, 즉시 그들을 석방(釋放)하여 돌려보냈다.
⑦ 그러나 趙(용삼)베드로가 관아(官衙)에서 나오다가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를 만났는
데, 마르띠노는 그의 나약(懦弱)함을 몹시 책망(責望)하며 빨리 통회(痛悔)하라고 권고
하였다. 그는 맹목적인 효성(孝誠)에 진 것일 뿐, 신앙(信仰)은 그의 마음에서 여전히 살
아있었다. 자기 죄가 두렵고 진실(眞實)로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그는 밤을 뜬 눈으로 새
우고, 이튿날 아침 관장(官長) 앞에 나아가 말하였다.
ꡒ제가 어제 한 일은 지금 제게 극도의 후회를 일으킵니다. 사또께서는 아들인 저는 저의
죄 때문에 죽이시고, 아버지는 그의 원대로 다루어 주시길 바랍니다.왜냐하면 아들의
죄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각자가 자
기의 행실에 따라 책임도 다루어져야 할 것입니다.ꡓ
관장(官長)은 趙(용삼) 베드로의 허약(虛弱)한 모습을 보고 그의 고집을 쉽사리 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만큼, 마음이 더욱 상하여 그를 매우 엄중(嚴重)하게 가두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문(訊問)할 때마다 다른 교우(敎友)들보다 더 오래, 더 심하게 때리라고 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소용(所用)이 없었으니, 趙(용삼) 베드로는 그의 겸손(謙遜)한 통회(痛悔)와 하느님의 은총(恩寵)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⑧ 수령(守令)은 또 원경도(元景道) 요한의 장인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도 체포(逮捕)
하게 하였는데, 이 사람은 보통「여종」이라고 불렀다. 그는 여주 고을에 사는 양반(兩班)으로 온 가족(家族)과 함께 천주교(天主敎)를 믿고 있었다. 1791년에 그는 배교(背敎)하여 박해(迫害)를 모면 하였었다(本稿 50쪽 참조). 그러나 그때부터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자기의 피를 흘려 죄를 씻을 은 총(恩寵)을 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박해(迫害)의 처음 소문(所聞)이 났을 때에 그에게 도망하기를 권하는 아내에게 그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ꡒ안심하시오. 내가 없더라도 당신은 살아갈 수 있을 거요.ꡓ
그의 어머니도 간청(懇請)을 하므로, 그는 어머니의 명을 존중(尊重)하여 집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 그러나 길을 떠나자마자 마음이 변하여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그날 밤 여주관장(驪州官長)이 보낸 포졸(捕卒)들에 붙잡혔고, 포졸들은 그를 관아(官衙)로 끌고 갔다. 관장(官長)이 그에게 물었다.
ꡒ누구에게 천주교를 배웠느냐? 또, 네 공범자들은 누구냐? 모두 바른대로 말하여라!ꡓ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는 대답하였다.
ꡒ천주께서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뢸 말씀
이 없습니다.
관장(官長)은 그를 신문(訊問)하고 몽둥이로 때리게 하였다. 마침내 그가 신앙(信仰)을 굳게 지키는 것을 보고, 방금 말한 그의 사위 원경도(元景道) 요한과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와 그 밖의 몇몇 증거자(證據者) 및 많은 다른 교우(敎友)들이 갇혀 있는 옥에 함께 가두었다.
⑨ 6개월 이상이나, 갇혀있는 교우(敎友)들은 보름에 한 번씩 관장(官長) 앞에 출두(出頭)하여 신문(訊問)을 받고, 점점 더 심한 고문(拷問)을 당해야 했다. 이 거듭되는 형벌(刑罰)로 사방이 헤어진 원경도(元景道) 요한의 몸이, 여러 번 기적적(奇蹟的)으로 나았었다고 한다. 원경도(元景道) 요한의 가족(家族)은 여러 차례 그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하였는데, 하루는 늙은 여종(女從) 하나가 그를 찾아와서 그의 어머니와 아내의 정상(情狀)을 몹시 슬프게 전하여 주었다.
그가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다른 때보다 더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이 보였는데,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가 그를 도우러 와서, 그 늙은이를 어떻게나 무서운 눈으로 흘겨보았는지, 그 여자는 겁에 질려 달아나서 다시는 감히 오지 못하였다.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도 역시 무서운 유혹(誘惑)을 당해야 했었다. 그의 늙은 아버지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옥으로 찾아와서, 그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ꡒ그래, 너는 백발이 성성한 네 아비를 버리고 죽고자 하느냐?ꡓ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는 대답하였다.
ꡒ아버님, 저는 효성의 본분을 결코 잊지는 않습니다. 아마 제 처신이 별로 용감해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아버님도 저와 마찬가지로 교우이시니, 우리의 사물을 더 높은 시야에서 보아야 합니다. 인정에 끌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를 배반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버님 자신이 판단하십시오.ꡓ
⑨ 하느님은 이 영웅적(英雄的)인 신앙(信仰)을 병(病) 고치는 은혜(恩惠)로 상(賞) 주신 듯 하다. 과연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가 비록 의술(醫術)이 어느 정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목격자(目擊者)들이 증언(證言)한 이 사실(事實), 즉 그가 갇혀있는 옥에 와서 진찰(診察)을 받은 병자(病者)들은 모두가 나아서 돌아갔다는 사실(事實)을, 단순히 자연적(自然的)인 것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의 명성(名聲)이 널리 퍼져 병자(病者)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서, 옥문(獄門)앞이 장터마당과 같이 될 지경이었다. 관장(官長)도 감히 그것을 막을 수가 없었으니, 그의 관속(官屬) 중에도 병이 나은 사람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가 행한 치료(治療)에 대하여 질문(質問)을 받고, 그 당장에는 선풍적(旋風的)인 인기를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십중팔구(十中八九) 정도가 나았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는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나아서 완치(完治)가 되지 않고 돌아간 병자(病者)는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였다. 옥졸(獄卒)들이 그의 의학서적(醫學書籍)을 보자고 청하면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는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ꡒ나는 독특한 처방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천주를 섬기기만 할 뿐이오. 당신들이 의술을
배우고 싶으면, 나처럼 천주를 믿어야 하오.ꡓ
ꡒ당신이 책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고 주장하니, 우리가 어떻게 배울 수 있겠소.ꡓ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ꡒ나는 마음속에 타지 않는 책들이 있으니, 당신들을 가르쳐서 천주교를 신봉하게 하는
데 충분하고도 남소.
⑩ 오랫동안 갇혀있고 또 끊임없이 형벌(刑罰)을 받아야 하는 데에 지쳐서, 갇힌 교우 여럿이 차차 냉담(冷淡)하여지고 용기(勇氣)를 잃어갔다. 항상 불길처럼 타오르는 열성(熱性)을 가진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는, 그들을 권고(勸告)하고 격려(激勵)하기를 그치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ꡒ우리는 동시에 잡혔으니 모두가 같은 날 천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
겠소?ꡓ
그러나 그의 노력(努力)과 열심한 친구들의 기구(祈求)도 완전한 성공(成功)을 거두지는 못하였으니, 함께 갇혀있던 동료(同僚)들 중 몇몇 사람은 배교(背敎)하는 말을 하여 석방(釋放)되었다.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로(慰勞)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옥졸(獄卒)들 중의 한 사람이 은총(恩寵)에 감화(感化)되어, 당장에 입교(入敎)하여 열심한 교우(敎友)가 되기를 허락하셨다.
⑪ 1800년 10월에 증거자(證據者)들은 감사(監司) 앞에 출두(出頭)하였는데, 감사(監司)는 처음에는 배교(背敎)의 말 한마디만 하면 그들을 자유(自由)의 몸이 되게 하겠다고 말하며, 부드러운 말로 그들을 이겨보려고 했다.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대답하였다.
ꡒ모든 사람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신 참 천주를 알고 섬기는 행복을 받았으니, 저희들
은 그분을 배신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죽기를 원합니다.ꡓ
자기의 시도(試圖)가 모두 쓸데없음을 보고, 감사(監司)는 그들의 다리를 치도록 하고, 그들에 대한 결안(結案)을 하여 서명(署名)을 시키고 나서 옥으로 돌려보냈다. 그들은 이 선고(宣告)를 거룩한 기쁨으로 받아들였고, 자기들의 제헌(祭獻)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꿋꿋하게 견디어 나갈 은총(恩寵)을 얻기 위하여, 기도(祈禱)와 모든 본분(本分)을 실천(實踐)하는데 열심을 배가(倍加)하였다.
⑫ 그런데 외교인(外敎人) 임희영(任喜永)은 천주교인(天主敎人)들과 같이 한 달에 두 번씩 정기적(定期的)으로 신문(訊問)을 당하면서도, 결코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천주교인(天主敎人)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혹독(酷毒)한 형벌(刑罰)을 당하였는데, 언제나 비명(悲鳴) 한마디 지르지 않고, 입조차 열지 않았다. 감사(監司)는 어이가 없어 그에게 여러 차례 이렇게 말하였다.
ꡒ너는 천주교인도 아니니, 관례적인 제사를 드리겠다고만 약속하면 즉시 내보내주마! 그러나 네가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면 너를 죽이겠다.ꡓ
임희영(任喜永)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마침내 10월의 신문(訊問)이 있은 다음, 그와 함께 갇혀있던 교우(敎友)들이 그에게
ꡒ우리 천주를 숭배하지 않는 그대에게는 그대가 당하는 형벌이 아무 소용이 없소. 굴복
을 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더 나을 거요.ꡓ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야 그는 비로소 대답하였다.
ꡒ우리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에 유언을 하시면서, 나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면 내아들이
아니니, 상복도 입지 말라고 말씀하셨소. 이제 내가 상복을 입고 있으니, 어떻게 내 생
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할 수가 있겠소? 나를 죽이면 죽을 뿐이
지, 결코 제사는 드리지 않겠소.ꡓ
죽어가는 아버지의 명(命)에 대한 이런 존경(尊敬)과, 그것을 절대로 어기지 않겠다는 흔들리지 않는 결심(決心)은, 특히 외교인(外敎人)에게는 매우 이상한 것으로 보일 수가 있다. 그러나 다만 자식(子息)들이, 살아있는 부모(父母)에게나 죽은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 공경(恭敬)과 순종(順從)으로 요약(要約)되는 종교(宗敎)를 가진 이 민족(民族)의 정신(精神)을 알면, 놀라움은 줄어든다. 모든 선교사(宣敎師)들이 이와 비슷한 사실(事實)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이 나라에서는 드물지 않다는 것을 단언(斷言)할 수가 있다.
⑬ 교우(敎友)들은 임희영(任喜永)이 그렇게 결심(決心)이 굳은 것을 보고, 그를 권고(勸告)하여 그에게 교리(敎理)를 가르치기에 힘썼다. 그들은 임희영(任喜永)에게, 그의 아버지가 천주교인(天主敎人)으로 죽었고 참 종교(宗敎)에 대한 경의(敬意)로 그에게 제사(祭祀)를 금하였으니, 아버지와 같이 천주교인(天主敎人)이 되는 것이 그에게 훨씬 더 복종(복종)하는 것이 되며, 언젠가 천국(천국)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날 유일한 기회(機會)를 장만하는 것임을 이해(理解)시켰다.
하느님의 은총(恩寵)이 그들의 말을 도와주심으로써, 임희영(任喜永)은 진심(眞心)으로 마음을 돌려, 이제는 그들과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 그는 옥중(獄中)에서 성세(聖洗)를 받은 것으로 믿어진다.
⑭ 그러나 감사(監司)는 사건(事件)을 오래 끌어갈 뿐, 그가 내린 결안(結案)을 즉시 집행(執行)시킬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하였다. 그는 王의 개인적인 감정(感情)을 알고 있었으므로, 위험(危險)한 처사(處事)를 하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대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