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2. 양근(楊根) 읍내의 순교자(殉敎者)들
같은 4월 25일(양력), 양근(楊根) 읍내에서도 순교자(殉敎者)들이 났는데, 그들의 결안
(結案)은 필시 여주(驪州)의 증거자(證據者)의 결안(結案)과 동시에 의금부(義禁府)에
서 확정(確定)되었을 것이다. 그들 중 주요 인물(人物)은 유한숙(兪汗淑)과 윤유오(尹
有五) 야고보였다.
유한숙(兪汗淑)은「사겸」이라고도 하는데, 양근(楊根) 고을 동막골이라는 동네의
향반(鄕班)이었다. 그의 생애(生涯)와 순교(殉敎)이야기는 전하여진 것이 없다. 윤유일
(尹有一) 바오로의 동생 윤유오(尹有五) 야고보에 대하여도 알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
다.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신부(神父)를 조선에 인도하여 들였다는 죄목(罪目)으로
1795년에 참수(斬首)되어 순교(殉敎)한 그 사람이다. 그런데 윤유오(尹有五) 야고보의
문초기록(問招記錄)을 수집할 수가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길 것이 못되니, 그의 집안이
박해(迫害)로 인하여 거의 전멸(全滅)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三寸)들 중 한 사람은 섬으로 귀양을 갔고, 윤(尹)「관수」안드
레아라고 하는 또 한 분의 삼촌은 고문(拷問)을 당하는 중에 죽었으며, 또 조금 뒤에는
그의 사촌누이 윤점혜(尹占惠) 아가타의 영광(榮光)스러운 최후를 보게 될 것이다.
가장 믿을 만한 전설(傳說)에 의하면, 그달에 양근(陽根)에서 순교(殉敎)한 천주교인
(天主敎人)의 수는 모두 13명 이었다고 한다. 비록 그들의 이름은 지금은 모두 잊혀졌
지만, 교우(敎友)들은 그들을 매우 존경(尊敬)하고 있다.
3. 늘어나는 순교자(殉敎者)들
이러한 모든 사형집행(死刑執行)이 천주교인들의 피를 목말라하는 박해자(迫害者)들의
갈증(渴症)을 풀어주기는 고사하고, 점점 더 자극(刺戟)할 뿐이었다. 금부(禁府)는 활발
하게 움직였다. 매일같이 새로운 재판(裁判)이 벌어지고, 새로운 형벌(刑罰)이 가해졌
다.
4월 2일(5월 14일) 증거자(證據者) 6명이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 형이 집행(執
行)되었으니, 정철상(丁哲祥) 가롤로, 최필제(崔必悌)베드로, 정인혁(鄭仁赫), 이합규
(李鴿逵)와 운혜(雲惠)와 복혜(福惠)라는 두 여인이었다.
이중 마지막 네 사람은 공문서(公文書)에 보존(保存)되어 있는 결안(結案)을 통해서
만 알게 되었는데, 그들의 본명(本名)은 알 수가 없다. 나머지 두 사람에 대한 몇 가지
사항(事項)은 다음과 같다.
1) 정철상(丁哲祥) 가롤로
① 정철상(丁哲祥) 가롤로는 영광스러운 순교자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아들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말씀과 모범(模範)으로 천주교 신앙을 배우고, 교회의 본분
(本分)을 지키는 단련을 받았다. 그러한 학교에서 배웠으므로 그는 빠른 진보(進步)를
이룩하였고, 그의 출신(出身)으로 보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어 보이는 명예(名譽)를
업신여기고, 다만 한 가지 목적(目的)만을 세웠으니, 곧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
고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영혼(靈魂)의 구원(救援)
을 확실하게 하는 일이었다.
② 그가 20세쯤 되었을 때인 1801년의 박해(迫害)가 일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이 금부
(禁府)의 옥에 갇혔으므로, 정철상(丁哲祥) 가롤로는 관습(慣習)에 따라 그들을 따라가
옥 근처 밖에 머물면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 심부름도 하고, 감금생활(監禁生活)을 위
로하기에 힘썼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는 거기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거기에 있는 동안 관리(官吏)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사람을 보내어 신부(神父)
의 사정(事情)을 아는 대로 모두 알릴 것과, 신부(神父)가 어디에 피신(避身)하여 있는
지를 말하라고 독촉하며, 그것이 아버지의 생명(生命)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덧
붙였다.
정철상(丁哲祥) 가롤로같은 착한 마음의 소유자에게는 그러한 유혹(誘惑)이 몹시 심
하게 작용했을 것이 틀림없으나, 그래도 그는 거기에 끌려가지 않았다. 그에게 아무리
혹독(酷毒)한 형벌(刑罰)을 가하여도, 그의 앞에서 아버지와 삼촌에게 새로운 형벌을
가하여도 그의 마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신부(神父)나 천주교회(天主敎會)를 위태
롭게 할 수 있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를 않았다.
③ 이러한 시련(試鍊)을 이기고 나서 그는 옥 근처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고, 그의 버지가
순교(순교)의 영관(榮冠)을 받자, 그도 역시 붙잡혀 형조(刑曹)에 끌려나갔다. 그는 잠
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소원(所願), 즉 자기 아버지의 뒤를 따라 천주를
하여 죽는 소원만을 나타냈다.
한 달 남짓하게 옥에 갇혀 있었는데, 그동안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자라온 이 젊은
가 음식을 장만하기 위하여 짚신을 삼아야만 했다.
④ 사형집행일(死刑執行日)이 되자 그는 결연히 형장(刑場)으로 걸어 나가, 기쁘게 망나니
에게 머리를 내밀었다. 그의 시신(屍身)은 집안 식구들이 거두어, 그의 아버지의 시신
과 함께 마재에 장사지냈다.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유족(遺族)으로는 미망인(未亡人)과 세 자녀가 있었
고, 정철상 (哲祥) 가롤로도 젊은 미망인과 아들 하나를 남겼다. 그들의 집과 재산(財
산)은 모두 몰수(沒收)되었으므로, 온 가족이 생활수단(生活手段)이 없어졌는데, 그들
의 친척들은 죽기가 무서워 그들을 도와주는 것을 두려워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정약
종(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옛 친구 한 사람이 그 불쌍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마재
에 도로 데려왔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쫓아버릴 용기를 가지지 못하였고, 그때부터
이 가족들은 옹색(壅塞)하고 시련(試鍊) 많은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나주에 보게 되지
만, 하느님의 섭리(攝理)는 그 생활을 구원(救援)의 결실(結實)로 풍성하게 해주셨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