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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2) 최필제(崔必悌) 베드로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2) 최필제(崔必悌) 베드로


① 최필제(崔必悌) 베드로는 순교자(순교자) 최필공(崔必恭) 토마스의 사촌으로서 그역시

    조선천주교(朝鮮天主敎)의 일에 많이 관계한 듯 하다. 그는 1791년에 체포(逮捕)되어

    배교(背敎)로 석방되었다가, 이내 천주교의 모든 법규를 다시 실천(實踐)하기 시작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를 천주교에서 떼어내기 위한 그의 아버지의 계속적인 노력(努力)은 아무런 성과

    (成果)를 거두지 못하였었으니, 관청(官廳)에서 하는 신문(訊問)과 형벌(刑罰)보다도

    더 위험한 경우가 많은 가정박해(家庭迫害)의 시련(試鍊)은, 그의 덕을 단련시키는 역

    할 밖에는 다른 소용이 없었다.


② 최필제(崔必悌) 베드로는 그의 사촌 최필공(崔必恭) 토마스와 같이 붙잡혀 옥에 갇혔었

    다. 최필공(崔必恭) 토마스가 참수(斬首)를 당하자, 최필제(崔必悌) 베드로는 그를 장

    사지내러 가기 위하여 옥에서 나가는 것을 허락(許諾)해 달라고 청하였다. 부모들에게

    대한 이 마지막 의무(義務)와도 같은, 집안 식구들 사이의 이러한 의무는 조선 사람들

    의 눈으로 볼 때는, 하도 중요(重要)하고 신성(神聖)한 것이어서, 민사범(民事犯)으로

    갇힌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그런 경우에 임시로 석방(釋放)된다. 그리고 큰 형사범(刑

    事犯)과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은 사람들까지도 며칠 동안 옥에서 나가는 경우를 보

    게 되는 일이 드물지 않을 정도이다. 우리 순교자(殉敎者)들의 이야기에도 그와 비슷한

    예가 여럿 있다.


③ 그러므로 최필제(崔必悌) 베드로도 이 허락(許諾)을 받았는데, 그 허락을 내려준 관리

    (官吏)는 그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그 기회(機會)를 이용하여 도망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모면하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

       그러나 용감한 증거자(證據者)는 그 암시(暗示)를 따를 생각은 도무지 없었다.

     그는 몇몇 친구들에게

     ꡒ나는 마귀에게 원수를 갚고 전에 내가 배교했던 것을 기워 갚기를 원하네.

     그리고 내 가장 큰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하여 내 머리를 바

     치는 것일세.ꡓ

   하고 말하였다.

        장례식이 끝나자, 그는 정한 날짜에 자진하여 돌아와 다시 옥에 갇혔고, 며칠 후에

     참수(斬首)를 당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3) 심(沈) 발바라


① 광주(廣州)고을에 살았던 심(沈) 발바라라는 젊은 동정녀(童貞女)가 사형(死刑)을 당한

    것도 4월 초였다. 성인(聖人)들의 생애에서 보았던 위대한 모범(模範)에 감동하여, 그

    녀는 결혼(結婚)을 단념하고 하느님께 자기의 동정(童貞)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는 자기 집에 숨어 살며 모범적(模範的)으로 열심히 천주교의 법규를 지켜나갔

    다. 그녀의 오빠 심(沈)「요산」(락훈(樂薰))이 천주교인이라고 체포(逮捕)되자, 그녀

    는 어떤 날 주위의 사람들에게

    ꡒ오빠가 둘이 함께 순교하자고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ꡓ

    하고 말하였다.


② 이 말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별로 주의(注意)를 끌지 않았었는데, 바로 그날 포졸(捕卒)

    들이 와서, 집안에 있는 젊은 천주교인 여자를 잡으러 왔다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그들

    이 분명 잘못 안 것이며, 아무도 없다는 등의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포졸들은 너무나

    자세한 정보(情報)를 가지고 있어서 단념(斷念)하지 않고 끈질기게 굴었으며, 나중에는

    위협(威脅)까지 하였다.

       심(沈) 발바라는 그들의 말을 듣고 어머니에게

    ꡒ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제가 천주의 성의(聖意)에 순종하도록 놓아두십시

    오.ꡓ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곧 안방에서 나와 포졸(捕卒)들 앞에 나타나, 그들에게 분명

    하게 신앙(信仰)을 고백하였다.


③ 포졸(捕卒)들의 명에 따라 그들을 따라갈 준비를 하는 동안, 조금도 동요(動搖)하지 않

    고 옷을 갈아입은 후, 붙잡혀 서울로 압송(押送) 되었다. 거기에서 그녀의 꾸준한 신앙

    (信仰)은 20일 동안만 시련(侍輦)을 당한 뒤에 순교(殉敎)와 동정(童貞)의 두 가지 영관

    (榮冠)을 받으러 갈 수 있게 하였다. 그녀는 19세의 나이로 참수(斬首)를 당하였다. 그

    녀의 시신(屍身)은 집안 식구들이 거두었는데, 그녀의 얼굴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사지는 살아 있는 것처럼 부드럽고 싱싱하였었다고 한다.



4) 황일광(黃日光) 알렉시스


①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순교자(殉敎者)는 필시 거의 같은 날에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에

    게 특별한 관심(關心)을 불러일으킨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백성(百姓)들은 모든 이가

    하느님 앞에서 누구나가, 크거나 작거나, 양반이거나 상놈이거나, 부자거나 가난하거

    나, 한결같이 평등(平等)하다는 것을 인정(認定)하는데 너무나  익숙해져서, 이 개념(槪

    念)을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소명(召命)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

    르쳐 줌으로써, 이 평등(平等)을 제시(提示)하여 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

    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잊고 있다.


② 그렇지만 옛날의 로마와 그리시아와 오늘의 조선에서처럼, 모든 비신자(非信者)의 나

    라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멸시(蔑視)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반대로 그리스도교

    적 평등(平等)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외교인(外敎人)들의 교만(驕慢)에게는 가

    장 반발(反撥)을 일으키는 복음(福音)의 교리(敎理)이다.

       따라서 조선의 신입교우(新入敎友)들을 가르치고 감화(感化)시키기 위하여, 하느님

    은 가장 영광스러운 순교자(殉敎者) 중의 하나를, 이 나라의 가장 낮고 가장 천한 계급

    (階級)에서 선택(選擇)하심으로써, 당신의 은혜(恩惠)를 나누어 주시는데서 당신의 절

    대적(絶對的)인 독립성(獨立性)을 보여 주셨다.


③ 내포(內浦) 지방의 홍주(洪州)에서 난 황일광(黃日光) 알렉시스는 백정(白丁)의 집안에

    서 태어났다. 이 계층(階層)이 조선에서는 어찌나 멸시(蔑視)를 당하는지, 거기에 속하

    는 사람들은 종들보다도 더 낮게 다루어지는 지경이다. 그들은 인간세계(人間世界) 밖

    에 있는 품위(品位)를 잃은 존재(存在)로 다루어진다. 그들은 읍내(邑內)나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 따로 살아야 하며, 아무와도 일상생활의 교제(交際)를 할 수가 없다.

④ 황일광(黃日光) 알렉시스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은, 자기 집안에서 모든 사람들로부

    터 멸시(蔑視)와 쓰레기 취급을 받아가며 지냈다. 그것은 그와 같은 신분(身分)의 사람

    들에게는 대대로 물려받는 슬픈 유산(遺産)이다.

       하느님의 섭리는 그것을 보상(報償)하기 위하여 그리하신 것처럼, 그에게 놀랄만한

    지능(知能)과, 예민(銳敏)한 정신과, 열렬한 마음과, 매우 명랑(明朗)하고 솔직(率直)한

    성격을 주셨다. 

       천주교를 배우자마자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고, 천주교를 더욱 자유롭게 신봉(信奉)

    하기 위하여, 동생과 함께 고향을 떠나, 멀리 경상도(慶尙道)로 가서 살았다. 거기에서

    는 외교인(外敎人)들에게 자신들의 신분(身分)을 숨기고, 교우(교우)들과 연락(連絡)하

    기도 더 쉬웠다.

       교우(敎友)들은 그들의 신분(身分)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을 나

    무라기는 고사하고, 애덕(愛德)으로 형제로서의 대우(待遇)를 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

    다. 어디를 가나 양반(兩班)들의 집에서까지도, 그는 다른 교우들과 똑같이 집안에 받

    아들여졌는데, 그에 대하여 농담(弄談)조로, 자기에게는 자기 신분(身分)으로 볼 때 사

    람들이 그를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 또 후세에 하나, 이렇게

    천당(天堂)이 두개가 있다고 말하곤 하였다.


⑤ 그 후 경상도(慶尙道)에서 서울로 올라와,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하인

    (下人)들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집주인의 일상적인 심부름을 하면서 살았다. 그의 열

    심은 줄기는 고사하고 날로 더하여져서 모든 이의 감탄(感歎)을 자아냈다.

       그해 봄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가 잡히기 며칠 전에 그의 직책(職責)에 따라,

    땔나무를 사러 나갔다가 포졸(捕卒)들을 만나 붙잡혀 옥으로 끌려갔다. 그는 조금도 겁

    을 내지 않으며, 그를 데리고 가던 포졸들에게 명랑(明朗)한 어조로 말하였다.

    ꡒ나리들은 나를 남원(南原)고을에서 살기 좋은 옥천(沃川)고을로 옮겨 가니,

    이 큰 은혜에 대단히 감사합니다.ꡓ

    조선의 말에는「나문」운 나무를 가리키고「옥」은 옥(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두

   고을의 이름을 말함으로써, 황일광(黃日光) 알렉시스는 자기 주인이 자신에게 시켰던

   대로 나무를 사는 대신에, 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을 빗대어 한말이었다.


⑥ 여러 가지 신문(訊問)을 당해야 했지만, 그는 관리(官吏)들이 그에게 물어보는 모든 것

    에 대하여 고상(高尙)하게 그리고 거룩하게 자유로이 대답하였다. 관리(官吏)들은 그렇

    게도 낮은 신분(身分)을 지닌 사람이, 자기들을 무서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교(背

    敎)를 하는 값으로 그에게 주겠다고 하는 목숨을 거부하는 데에 성이 나서, 그에게 무

    서운 고문(拷問)을 가하게 하였다.

       황일광(黃日光) 알렉시스는 그것을 굳건하게 참아 받을 뿐만 아니라, 아주 하늘에서

    느끼는 것 같은 기쁨으로 참아 받으며 외쳤다.

    ꡒ만 번 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겠으니, 저를

     마음대로 하십시오.ꡓ

       다리 하나가 부러져 으스러지도록 잔인(殘忍)하게 매질을 시킨 후 사형(死刑)을  

    선고(宣告)하고, 그의 출생지(出生地)인 홍주(洪州)로 보내어 사형을 집행(執行)하도록

    하였다.


⑦ 그는 걸을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들것에 실려 가면서도, 또한 몹시 통증(痛症)이 심한

    데도 불구하고, 그의 타고난 명랑성(明朗性)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그의 아내와 아들이

    최후(最後)의 순간까지 그를 도우려고 따라왔었으나, 그들이 있음으로 인하여 어떤 유

    혹(誘惑)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절대로 그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홍주(洪

    州)에 도착하는 날로 그는 참수(斬首)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그 비천(卑賤)한 출생에 비하여 그렇게도 감격적(感激的)인 대조(對照)를 이루던 황

    일광(黃日光) 알렉시스의 희한한 덕행(德行)은, 교우들 중에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하

    였고, 교우들은 지금까지도 그를 가장 훌륭한 증거자(證據者)들 중의 하나로 경의(敬

    意)와 감탄(感歎)을 갖고 입에 올린다.

       그러나 이 나라의 외교인(外敎人)들 중 특히 양반(兩班)들은, 이러한 신분의 사람이

    천주교의 영광(榮光)이라는 말을 듣고는 경멸(輕蔑)하는 태도로 웃곤 한다.

    ꡒ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ꡓ

  하느님의 지혜는 언제나 이방인(異邦人)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되었고, 또 언제나 그러할

   것이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2) 최필제(崔必悌) 베드로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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