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5) 원주(原州) 고을의 박중환(朴重煥)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5) 원주(原州) 고을의 박중환(朴重煥)

  

   같은 시기에 원주(原州) 고을의 교우(敎友) 네 명이 배교자(背敎者)들에게 밀고(密告)되

   어 붙잡혔으니, 박중환(朴重煥)과 그의 형 박윤환(朴允煥), 동정녀 순교자(童貞女殉敎

   者) 심(沈) 발바라의 오빠 심(심)「요산」(락훈(樂薰)), 조(趙)「채조」였다. 그들 고을

   의 관장(官長)에게서 여러 차례 신문(訊問)을 받고 고문(拷問)을 당한 후, 다른 교우들

   과 같이 서울로 압송(押送)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고문 중에 똑같이 꿋꿋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박중환(朴重煥)만이 참수

   (斬首)를 당하였다. 나머지 세 사람은 무슨 이유(理由)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이 나라

   의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따로 따로 귀양을 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때 심한 가뭄이 들었으므로 백성(百姓)들은 대왕대비 김씨(大

   王大妃 金氏)의 잔인(殘忍)함을 원망(怨望)하며,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림으로써 하늘의

   노여움을 산다고 비난(非難)하였었다. 대왕대비 김씨(大王大妃 金氏)는 겁이 나서 사형

   선고(死刑宣告)가 집행되기 바로 몇 시간 전에 형을 감형(減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니, 이 네 교우의 재판(裁判)이 있은 후에

   도 그전과 마찬가지로 박해(迫害)가 계속 기승(氣勝)을 부렸었다. 어쨌든 박중환(朴重

   煥)은 그의 세 동료보다 더 행복하여, 4월 18일에 33세의 나이로 참수(斬首)를 당하였

   다.

      그 다음날인 19일은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의 차례였으니, 이제 필자(筆者)는 그

   이야기를 좀더 거슬러 올라가 다시 시작해야 하겠다.



4.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의 순교(殉敎)


① 신부(神父)가 조선(朝鮮)에 들어온 뒤로, 포졸(捕卒)들이 그가 살고 있는 곳을 찾아내

    려고 탐색(探索)을 그치지 않았었다. 그러나 대왕대비 김씨(大王大妃金氏)에 의하여 박

    해령(迫害令)이 내려진 후로는 그 탐색이 얼마나 더 심해졌었는지를 쉽게 상상(想像)할

    수 있다. 지옥(地獄)은 천주교의 적들에게

    ꡒ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은 흩어지리라!ꡓ

    고 한 성경(聖經)의 말씀을 가르쳐 준 것 같았다.

      그만큼 그들은 필사적(必死的)으로 조선 신입교우(新入敎友)들의 유일한 목자(牧者)

    를 잡으려고 혈안(血眼)이 되었었다. 그리하여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는 자기의 처

    지가 더 이상 견딜 수 없고, 또 교우(敎友)들로 하여금 그를 밀고(密告)하게 하기 위하

    여, 날마다 고문(拷問)을 더욱 심하게 하는 것을 보고는, 폭풍우(暴風雨)가 지나가도록,

    잠시 중국(中國)으로 돌아가 있을 결심을 하였었다.

       그는 자기가 떠난 것이 알려지면 박해(迫害)가 멎거나, 적어도 그 잔인성(殘忍性)이

    덜해지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② 그가 언제 길을 떠났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가 중국(中國)과 조선(朝鮮)을 갈

    라놓는 강안에 있는 변문(邊門)의 대안(對岸)인 의주(義州)읍까지 갔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거기에 이르러 그는 하느님의 은총(恩寵)의 비밀(秘密)한 계시(啓示)로 자기의

    계획(計劃)을 버리고 서울을 향하여 되돌아왔다.

       그의 처지와 그에게 피신처(避身處)를 제공하던 사람들의 처지가 점점 더 위급(危急)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용감(勇敢)한 교우가 지방(地方)에 가서 안전한 은신처(隱身

    處) 두 군데를 장만해 놓고 돌아와,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에게 간청하며, 신부께 여쭈

    라고 하며, 자기 자신이 박해자(迫害者)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신부를 모시고

    갈 책임(責任)을 지겠다고 하였다. 강완숙(姜完淑)  골룸바는 신부님이 하도 잘 숨어 계

    시기 때문에 아무런 염려(念慮)를 할 것이 없으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

    하였다. 그 교우(敎友)는 여러 차례에 걸쳐 간청(懇請)을 계속하였으나 늘 실패하였고,

   그 자신도 며칠 후에는 자기의 집을 버리고 가족(家族)과 함께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③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가 여러 번 신문(訊問)을 당하는 중에 신부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와 그 남편의 아들 홍필주(洪弼周) 필

    립보가 문초(問招)를 받고 혹독한 형벌(刑罰)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도 죽기로

    단단히 결심하여, 어떤 밀고도 하지를 않았다.

       그러자 관원(官員)은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의 종들 중의 하나를 신문(訊問)하였다.

    이 여인은 고통을 못 이겨 모든 사실(事實)을 고백(告白)하고, 동시에 신부의 나이와 얼

    굴과 풍채를 알려 주었다. 그러자 관원은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에게 말하였다.

    ꡒ네 여종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으니, 이제는 네가 사실을 감추지 못할 것이

     다. 그런즉 그 사람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ꡓ

    강완숙(姜完淑) 골룸바는

    ꡒ저희 집에 신부님이 계셨던 것은 사실입니다마는, 얼마 전에 집을 나가셨고

     지금은 어디에 계신지 모릅니다.ꡓ

    하고 대답하였다. 결국 신부(神父)를 잡아 바치는 사람에게 상금(賞金)을 언약한다는

    방(榜)을 사방에 붙이게 하고, 그의 용모파기(容貌疤記)를 적은 종이를 멀리 떨어진 지

    방에까지 돌렸다.


④ 이러한 극단(極端)의 위험(危險) 중에 신부에게는 빠져 나갈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었는

    데, 그의 적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특히 교우(敎友)들 가운데서도 배반자(背反

    者)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어떤 관리(官吏)가 거짓으로 입교(入敎)하는 체하여 그가 숨은 곳을 알아내게 되었다

    는 말이 있다. 어떻든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는 그 관리가 자기 있는 곳으로 찾아

    올 여유를 주지 않았다.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는 그때 이미 말한 바 있는 양제궁

    (良娣宮)이나, 그 궁(宮)과 붙어 있는 집에 있었다.


⑤ 4월 28일(양력) 즉 3월 16일, 시내에 통행(通行)을 허가(許可)하는 종이 울린 조금 뒤

    에,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는 그 집 교우의 옷으로 바꿔 입었다.

    ꡐ어디로 가려 하느냐ꡑ고 물었으나, 그는 ꡐ자기를 따라올 필요가 없다ꡑ고 한 후 혼자

    서 나갔다.

      어떤 교우가 신부(神父)가 무엇을 하는지를 알려고 멀리 뒤쫓아 갔으나, 신부는 그것

    을 눈치 채고서 가지고 있던 부채로ꡐ돌아가라ꡑ는 손짓을 하였다. 그러나 그 교우는 좀

    더 멀리 떨어지기는 했으나 계속 따라갔다. 그러다가 오래지 않아 오가는 군중(群衆)으

    로 인하여 그를 놓쳤고, 결국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⑥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는 곧장 금부(禁府)의 옥으로 갔다. ꡐ누구이며, 무엇하러 왔

    느냐ꡑ고 금부의 이졸(吏卒)들이 묻자, 그는 대답하였다.

    ꡒ나도 천주교를 믿소. 내가 듣자니 천주교를 정부에서 엄금하고 매일 같이

    무죄한 사람들을 많이 죽인다고 하니, 이제부터 내 목숨은 쓸 데가 없음으로

    죽여달라고 청하러 왔소. 내가 바로 당신들이 사방에서 헛되이 찾고 있는 그

    신부요. 지금까지 나를 찾아내지 못한 것을 보면, 당신네 나라에는 재간 있

    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소.ꡓ

    그는 곧 붙잡혀 옥에 갇히었다. 관장(官長)이 그에게

    ꡒ왜 조선에 왔느냐?ꡓ

    고 물으니, 그는

    ꡒ내가 조선에온 목적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소. 즉 참된 종교를 전하고 그렇

     게함으로써 이 불쌍한 백성들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었소.ꡓ

       그의 재판(裁判)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자기의 훌륭한 생애(生涯)에 걸 맞는 태도를

    보였으니, 모든 질문(質問)에 진중하고 슬기롭게 대답하였고, 남을 위태(危殆)롭게 할

    수 있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주교에 대한 길고도 웅변적(雄辯的)인 호

    교(護敎)의 글을 쓰기까지 하였는데, 관원(官員)들이 흥분(興奮)과 편견(偏見)으로 눈

    이 어둡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들에게 큰 감명(感銘)을 주었을 것이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5) 원주(原州) 고을의 박중환(朴重煥)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