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⑦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은 그의 수기(手記)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의 투옥(投
獄) 이야기를 이렇게 썼다.
『그에게는 발에만 고랑을 채우고, 신문(訊問)할 때에도 아무런 고문(拷問)도 하지를 않
았다. 그와 관원(官員)들 사이에는 필담(筆談)으로 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고 한다. 나
는 그것을 보지는 못하였고, 다만 외교인(外敎人)들이 금부(禁府)에 자수한 사람이 서
양인(西洋人)이라고 지칭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처음 교우 여섯을 죽일 때(2월
26일에 처형된 사람들) 그들을 반역죄(反逆罪)로 기소하였었다. 그러나 신부(神父)는
옥에 있을 때, 천주교 신자들이 역적(逆賊)들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준 것 같다.
또 서양인이 이내 죽기를 원치 않고, 그전에 자기가 한 말을 전부 다 하게 허락(許諾)하
여 준 다음에만 죽여주기를 청했다고 한다.』
이러한 풍문(風聞)은 대부분 사실인 것 같다.
⑧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의 여종(女從)의 실토(사실은 폐궁나인(廢宮內人) 서경의(徐景儀)의 밀
고)로 신부(神父)와 양제궁(良娣宮)의관계가 알려졌다. 그래서 주문모(周文謨) 신부(神
父)가 자수한 다음 날이나 그 다음 날(4월 19일 이나 30일), 재판이나 신문 등의 어떠한
법적 절차(節次)도 거치지 않은 채, 대왕대비 김씨(大王大妃 金氏)는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에게 피난처(避難處)를 제공하였던 왕족부인(王族婦人)들에게 사형선고(死
刑宣告)를 내렸는데, 그 명문(明文)은 다음과 같다.
『강화읍(江華邑)에 갇힌 죄인 인(인)의 처 송씨(宋氏)와 상기 죄인 인의 아들, 심(심)의
처 신씨(申氏)에 대하여,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둘 다 사학(邪學)에 물들었음은 명백하고, 이들이 고약한 외국종
자(外國種子)와 상통하고, 외국인 신부를 보았으며, 또 엄금(嚴禁)도 두려워하지 않고,
염치없이 그를 자기들 집에 숨겨 두었음이 명백(明白)하다. 이런 중대한 죄를 생각하
면, 그들을 하루라도 천지간에 용납(容納)할 수 없음이 만인에게 명백하다. 그런즉 그
들에게 독약(毒藥)을 내려 둘이 함께 죽게 하라.』
이 명령은 곧 집행되어 몇 시간 후 이 두 왕족부인(王族婦人) 교우에게 사약(賜藥)이
내려졌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자살죄(自殺罪)를 피하기 위하여 그 독약을 스
스로 먹기를 거부하여, 그것을 억지로 먹여야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송(宋) 마리
아와 그의 며느리 신(申)마리아는 그들의 신앙(信仰)과 박해받는 신부에게 용감하게
거처(居處)를 제공(提供)하였다는 죄목(罪目)으로 희생(犧牲)이 되어 죽었다.
그들의 감화적(感化的)인 최후(最後)에 대한 다른 사항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왜
냐하면 이곳 궁은 너무나 엄중히 닫혀있고, 외부와는 모든 것이 엄격하게 격리(隔離)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못된다.
이 불쌍한 왕족부인(王族婦人)들의 오랜 불행은 천주섭리(天主攝理)의 비밀한 계획
(計劃)속에서, 그들의 입교(入敎)와 영복(永福)의 원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은
총(恩寵)에 끝까지 충실하였고 또한 그들의 열심과 인종(忍從), 그들의 명성(名聲)과
지위(地位)로 인하여, 새로 나는 천주교회에 크나큰 격려(激勵)를 주었다.
⑨ 이들의 죽음은 자연히 그들과 함께 신앙(信仰)을 받아들이고 신부(神父)를 섬기는데 헌
신(獻身)하였던 궁내(宮內)의 여러 나인(內人)들의 죽음을 초래하였다. 이들도 같은 사
형언도(死刑言渡)를 받았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들은 서소문(西小門) 밖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된 작은 집에 가서 ꡐ사약(賜藥)을 받아야 했다ꡑ 한다. 이들의 수효
와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적어도 순교(殉敎)한 이가 둘 이상이었음은 확실한데, 어
떤 이는 다섯 사람이었다고까지 말한다.
왕족부인(王族婦人)들의 사형언도는 그 여파로, 아들이 역적모의(逆賊謀議)를 하였
다는 구실로 이미 강화도(江華島)에 유배(流配)된 송(宋) 마리아의 남편 이인(李인)의
사형선고(死刑宣告)를 초래하였다.
그의 적들은 왕족부인들이 신부(神父)와 연락을 한 것은 국가의 안전(安全)을 해치는
어떤 끔찍한 음모(陰謀)를 꾸미는 갓 밖에는 다른 목적(目的)이 있을 수 없으며, 왕족
(王族) 이인(李인)이 의심할 것 없이 그 음모(陰謀)의 주동자(主動 者)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 가증스러운 무함(誣陷)을 대왕대비 김씨(大王大妃金氏)에게 제출한 상소
문(上疏文)에 발표했는데, 그 내용(內容)은 아래와 같다.
『역적 인의 처와 역적 심의 처는 궁중 그윽한 곳에 들어 앉아 악한 종자와 상종하였습니
다. 우선 여러 비루한 여종(女從)들을 통하여 길을 마련한 다음 매일 밤 왕래를 하였으
며, 죄인들과 긴밀(緊密)히 연락을 취하였으며, 다음에는 법을 피해 다니는 자들을 감
추고 숨겨, 그들의 거처를 역적(逆賊)을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의도(意圖)와 비
밀한 계획(計劃)은 마침내 형언할 수 없는 극악무도(極惡無道)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
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두 여자만의 일일 수 있겠습니까? 이런 흉측한 음모(陰謀)의
주동자(主動者)는 분명 이인 자신입니다.
인의 처와 심의 처를 사형(死刑)에 처하라는 명령은 아무 의심할 바 없이, 근본원리
(根本原理)를 튼튼히 하고 악인(惡人)들의 음모(陰謀)를 꺾기를 원하시는 성덕(聖德)
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을 다만 일각(一刻)이라도 천지간에 용납(容納)하
여 두면, 역적(逆賊)들의 형편은 이전과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에게도 사
약(賜藥)을 내리시어 그를 죽이게 하시기를 삼가 청하옵니다.』
대왕대비 김씨(大王大妃金氏)는 무함당한 이 불행한 왕족(王族)을 변호할 생각은 조
금도 없었다. 그리하여 얼마 안 있어, 이인은 비록 선왕(先王)의 동생이요 천주교를 신
봉(信奉)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조정(朝廷)에서 공식으로 내린 독약(毒藥)을 받아
손수 먹어야만 하였다.
⑩ 이제 다시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의 재판(裁判)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대신(大臣)
들이 최후적인 결정(決定)을 내리기 전에, 그에 관하여 여러 번 회의를 한 것 같다. 어
떤 사람들은 그를 중국(中國)으로 되돌려 보내어,
「두 나라 중 한 나라의 어떤 신민(臣民)이거나 상대방 국토에서 발견되면, 자기나라의
군주(君主)에게로 송환(送還) 되어야 한다.」는 국제조약(國際條約)대로. 황제(皇帝)
의 손에 넘길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공식 조약(條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는 그들이 미친 듯이 박해(迫害)하던
종교의 두목(頭目)을 벌하지 않고 버려 둘 결심(決心)을 할 수가 없어서, 사형(死刑)
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결국 대왕대비 김씨(大王大妃金氏)의 승인(承認)을 얻었다. 대
왕대비 김씨(大王大妃金氏)가 작성을 지시한 결안(結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4월 19일, 흉측한 외국종자 죄인 주문모(周文謨)의 사건.
자칭 종교의 스승이요 신부(神父)라고 한다. 그는 그림지외 발자취를 조심스럽게 감추
며, 많은 무리를 기습(奇襲)하고 속여 영세(領洗)를 주는 규칙을 세워놓았다. 그가 말
하는 것은 모두가 헛되고 거짓된 것의 연속에 불과하다. 7, 8년 동안 그는 백성(百姓)
의 정신(精神)을 그른 길로 이끌었으며, 끊임없이 불어나는 홍수(洪水)와도 같이 그의
도리(道理)는 퍼져서 불안(不安)을 자아내는 재난(災難)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도를
따르는 자들은 반드시 야만(野蠻)과 짐승들의처지보다도 훨씬 못한 처지에 이르게 되
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수 좋게도 하늘이 그를 추격하는 일을 맡자 죄인(罪人)은 오늘
자수(自首)하고야 말았다.
그는 몇 년 전에 포졸(捕卒)들의 손을 벗어난 이후로 그 주위와 멀리까지 그의 거짓
된 도리를 계속 전파(傳播)하였다. 이제 그가 옥에 갇혔으니 서울과 지방의 백성(百姓)
은 쉽게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을 알아볼 수 있다. 그의 신분(身分)을 살펴보면, 그는
낮고 경멸(輕蔑)할만한 집안의 소생이며, 그의 행실(行實)은 바로 교활(狡猾)하고 간
사한 자의 행실이다. 그를 처벌(處罰)하는 데에는 군법(軍法)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
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를 군사법정(軍事法 廷)으로 압송하여 관례(慣例)의 절차
를 밟아 처형(處刑)하고, 그의 처형이 민중(民衆)에게 영향(影響)을 줄 수 있도록 하
라.
어영청 대장(御營廳大將)에게는 그 집행을 명하노라. 이것이 나의 의향(意向)이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이 대장(大將)은 그 같은 사명(使命)을 맡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병이 들어 나갈 수가 없다는 핑계를 대서, 다른 대장이 대신 임명(任命)
되었다.
⑪ 옥에서 나올 때에 신부(神父)는, 이런 경우에는 하는 관습(慣習)에 따라 다리에 매를 맞
았다. 그런 다음 시내에서 10 리 되는 곳에 있는 노들 혹은 새남터라고 불리는 군의 사
형집행(死刑執行) 장소로 기꺼이 갔다. 들것에 실려 가며 그는 들러 있는 사람들을 내
려다보고 장터를 지나가면서 구경꾼들의 무리를 조용히 둘러본 다음, 목이 마르다고 하
며 술을 청하였다. 군졸(軍卒)들이 술 한 잔을 주니 그것을 다 마셨다.
그가 처형장(處刑場)에 도착하자, 그의 양쪽 귀에 화살을 꽂고 그의 재판기록(裁判記
錄) 발췌와 결안(結案)을 보여주며, 그가 여러 가지 문서(文書)를 읽을 수 있게 하였다.
비록 그 글이 매우 길었으나 신부(神父)는 그것을 아주 침착하게 끝까지 다 읽고나서,
소리를 높여 모여 있는 군중(群衆)을 향하여 말하였다.
ꡒ나는 천주교를 위하여 죽습니다. 10년 후에 당신네 나라는 커다란 불행을
당할 것인데, 그때에 내 생각을 하게 될 것이오.ꡓ
관례(慣例)에 따라 신부를 모여 있는 사람들 둘레로 세 바퀴 조리를 돌린 다음, 대장
(大將)이 필요한 방향전환을 명하였으므로, 그는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고서 머리를 숙
이니, 그의 머리는 곧 칼 아래 떨어졌다. 때는 4월 19일(1801년 5월 31일), 성삼주일(聖
三主日, 성령강림대축일 다음 주일) 신시(申時)라고 부르는 시각 즉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였다. 그때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의 나이는 32세였다(32세가 아니고 50세).
-샤를르 달레 神父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