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제 3 권
신유박해(辛酉迫害) 후기(後期)의 양상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 야고보 신부의 순교(殉敎) 이후부터
박해(迫害)의 종말까지〔1801~1802〕
제 1 장
강 완숙(姜完淑) 골룸바의 순교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순교 - 강완숙(姜完淑)골룸바와 그 동료들의 순교
1.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순교
①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죽음은 조선교회(朝鮮敎會)의 큰 재난(災難)이었다. 조선교회
는 그를 잃음으로써 그들의 유일(唯一) 한 목자(牧者)를 잃었고, 오랜 세월 동안에 그를
대신할 만한 사람을 얻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不可能)한 것 같아 보였다.
물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모든 신입교우(新入敎友)들이 신부(神父)를 보고,
또 그의 가르침을 듣고, 그의 손으로 성사(聖事)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들 중의 소수만
이 이러한 행복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가 있음으로 인하여, 적어도 여러 천주교회의 공
동의 중심(中心)이요 집합점(集合點)이 있었다. 모든 중요한 일에는 단일방향(單一方
向)이 있었고, 또 무엇보다도 미사성제(聖祭)를 자주 드려 모든 은총(恩寵)의 셈인 예수
그리스도의피가 이 불신자(不信者)들의 땅에 자주 흘렀었다.
② 주문모(周文謨) 신부는 자수(自首)하면서 박해자(迫害者)들의 격노(激怒)를 온통 자기
에게만 쏠리게 하여, 자기 양떼의 불행(不幸)을 막기를 희망(希望)하였었다.
한편 천주교회의 원수(怨讐)들은 신부(神父)가 죽고 나면, 지휘자 없는 군대 모양으
로, 천주교인들이 사기(士氣)가 떨어져 쉽게 배교(背敎)를 하게 되고, 그들의 교는 뿌리
뽑아지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상황(狀況)은 결코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신부(神父)의 희망(希望)이 무너지고 박해(迫害)가 더욱 맹렬(猛烈)하
여지도록 허락하셨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신자(信者)들에게 더 꿋꿋한 용기(勇氣)와,
굽힐 줄 모르는 인내심(忍耐心)을 불어넣어 주시고, 순교자(殉敎者)들의 수를 늘어나게
하심으로써, 천주교를 반대하는 자들의 모든 계획(計劃)을 실패(失敗)로 돌아가게 하셨
다.
필자(筆者)는 순교자(殉敎者)들 중 중요한 사람들에 대하여 몇 가지 적어보고자 한
다. 교회사(敎會史)에는 이처럼 영광(榮光)스러운 페이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③ 주문모(周文謨) 신부는 1801년 5월 31일(양력)에 참수(斬首)되었다. 그 이튿날 6월 1일
에, 노론(老論)의 가장 유명(有名)한 가문(家門) 중의 하나에서 태어난 김건순(金健淳)
요사팟과 그의 친척 여럿이 같은 형벌(刑罰)로 같은 승리(勝利)를 거두었다. 주의(注
意)할 만항 중요한 사항(事項) 한 가지가 자연 여기에서 나타나게 된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비록 천주교(天主敎)를 금하는 윤음(윤音) 반포(頒布)에는
당파간(黨派間)의 원한(怨恨)이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마찬가지
인 것처럼, 조선(朝鮮)에도 가장 중요한 첫 째 원인(原人)은 교회(敎會)에 대한 지옥(地
獄)의 영원히 불붙는 증오심(憎惡心)이다.
그런데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은 남인(南人)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당파(黨派)에도
있었다. 왜냐하면 천주교(天主敎)는 결코 어떤 계급(階級)이나 어떤 당파(黨派)에도 복
종(服從)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가 섭
정(攝政)한 이후부터는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은 큰 인물(人物)들이 거의 다 남인(南
人)에 속하여 있어, 그것이 박해(迫害)에 어떤 정치적(政治的) 보복(報復)의 성격(性格)
을 띠게 하였고, 외교인(外敎人)들의 눈에는 순교자(殉敎者)들의 영광(榮光)을 변질(變
質)시키고 감소(減少)시킬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희생자(犧牲者)들 대부분의 경우, 천주교(天主敎)를 고백(告白)한 것이 처
벌(處罰)의 유일한 원인(原因)이었음을 모든 이에게 명백(明白)히 보여주기 위하여, 또
증거자(證據者)들의 죽음에 그 진정한 성격(性格)을 회복(回復)시켜 주기 위하여, 하느
님께서는 박해자(迫害者)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사정(事情)으로 인하여, 자기들 당파
(黨派)의 훌륭한 사람들 여럿을 희생(犧牲)시키지 않을 수 없게 허락(許諾)하셨다.
④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당시 노론(老論)의 중요한 집안의 하나였고, 오늘은 조선(朝
鮮)의 첫째가는 가문(家門)이 된 안동 김씨(安東金氏) 집안의 자손이었다.
그는 어려서 그 집안 종가(宗家)에 양자(養子)로 들어가 벼슬과 명예(名譽)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에 있게 되었는데, 그의 양부(養父)는 여주 읍(驪州邑)에 살고 있었
다.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뛰어나게 조숙(早熟)한 지능(知能)으로 사람들의 주목(注
目)을 끌었다.
조선인들의 전기(傳記)(황사영의 백서)에 의하면, 그는 아홉 살부터 그 도(道)를 따
르는 자들에게 불사(不死)의 길을 열어준다고 하는 노자(老子)의 도(道)에 전념(專念)
하고자 하였다. 그의 집에는 북경(北京)의 예전 선교사(宣敎師)들이 통속적으로 재미있
게 한문(漢文)으로 지은 참 종교(宗敎) 연구(硏究)인 일종의 입문서(入門書)가 있었다.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열 살인가 열두 살 때에 그 책을 매우 즐겨 읽었고, 오래지 않
아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의 존재(存在)와 필요성(必要性), 그 책에 다루어진 다른 여
러 가지 문제(問題)들을 토론(討論)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가 대신(大
臣)의 지위(地位))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커가면서 그는 학문(學問)을 광범하
게 하였으니, 경서(經書), 역사(歷史), 불교(佛敎)와 노자(老子)의 도리, 의술(醫術), 음
양서(陰陽書), 병서(兵書)까지 그 어느 것도 그에게 생소한 것이 없었다.
⑤ 미구에 그는 재질(才質)을 보여 줄 기회(機會)를 얻었다. 아직 그가 18세 밖에 되지 않
았을 때에 양부(養父)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조선(朝鮮)에서는 법적(法的)인 장례
(葬禮)가 있을 때마다, 더 오래된 옛날 의식(儀式)을 무시하고, 송조(宋朝) 때의 의식
(儀式)을 따라 행하여졌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의심(疑心)을 품은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당시 아직 천주교인
(天主敎人)이 되지 않았던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에게 문의(問議)를 하였고, 그 결
과 어떤 예식(禮式)들은 경서(經書)에 근거(根據)를 두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
것들을 그릇된 것이라고 배척(排斥)하여, 아버지 장례(葬禮)에 그것을 행하지 않았다.
선비들은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이 풍습(風習)을 어기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맹렬
(猛烈)히 항의(抗議)하였다.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곧 자기의 행동(行動)을 변호(辯
護)하기 위하여 긴 변호문(辯護文)을 썼는데, 거기에는 수많은 인용(引用)과 증거(證
據)가 너무도 유식(有識)하고 알맞게 씌어져, 당시 나라의 첫째가는 학자로 통하던 이
가환(李家煥)도 자신(自身)으로서는 도저히 그와 비슷하게 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⑥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집에 있을 때는 성격(性格)이 점잖았고, 효성(孝誠)이 두터웠
으며, 성실(誠實)과 너그러움으로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끌었다. 집안이 부유(富裕)하
였던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즐겨 희사(喜捨)하는 데 썼으나, 자기 자신(自
身)의 옷과 음식에 대해서는 극히 필요(必要)한 것으로만 한정(限定)하여, 자신은 매우
검소(儉素)한 생활을 하였다.
그가 서울에 갈 때면 그가 머무르는 집 앞에 교군(僑軍)과 말이 몰려들었다. 왜냐하
면 누구나 한번이라도 그를 보고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만족(滿足)을 갖고 싶었기 때
문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와 몇몇 다른 친구와 함께,
바다를 건너 북경(北京)에 가서 서양학자들(西洋學者)에게 문의(問議)하고, 그들에게
서 유익(有益)한 지식(知識)을 많이 얻어다가, 고국에 돌아와 그것을 전파(傳播)할 계
획(計劃)을 세웠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천주교에 대하여 극히 간접적(間接的)으로 밖에
는 듣지 못하여, 거기에 대한 정확한 개념(槪念)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강이천(姜彛
天)을 포함한 몇몇 친구와 협력하여, 그는 천주교에서 마술(魔術)의 비밀과 비상한 비
방(秘方)을 얻을 줄로 생각하고서, 그것을 연구(硏究)하기 시작하였다.
이 강이천(姜彛天)이란 사람은 마음씨가 고약하고 꾀가 많은 소북(小北)의 이름있는
선비였다. 머지않아 왕조(王朝)가 바꾸리라는 생각을 하고, 그는 기묘한 비방(秘方)을
탐구하고 마술(魔術)을 연구하였다가, 그때에 대비(對備)하여 성공(成功)의 길을 개척
(開拓)하고자 하였다.
⑦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이 사람과 교제(交際)하면서 그의 깊은 생각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기로서는 모르는 것을 배우고자하는 타고난 호기심(好奇心) 밖에
도 실제로 복음(福音)의 도리(道理)를 깊이 연구(硏究)하고자 하는 진실한 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집안이 속해 있는 노론(老論)에는 고명(高名)한 천주교인을 볼 수가 없
어, 남인(南人)사람들의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하고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에게 사
람을 보내어, 종교문제(宗敎問題)에 관하여 그와 몇 번 토론(討論)을 갖자고 청하였다.
이 양반교우(兩班敎友)는 거기에 기꺼이 동의하였다. 그러나 두 집안의 세습적(世襲的)
인 적대관계(敵對關係)로 공공연하게 만날 수가 없었으므로,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밤에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를 찾아갔다.
처음 몇 번 만나보자, 그는 하느님의 존재와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현의(玄義)를 어
렵지 않게 믿게 되었다. 그러나 강생(降生)의 현의(玄義)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그의 모
든 생각을 뒤엎어 놓아, 그는 근심하고 낙담(落膽)하였다. 그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벼락을 맞거나, 다른 어떤 천벌(天罰)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여러 날 동안 방문
(訪問)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를 죽이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서 다시 연구(硏究)를 시작하였
는데, 성령(聖靈)의 은총(恩寵)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으므로, 그는 졌다고 자백(자백)
하며, 자기의 이성(理性)을 신앙(信仰)에 굴복(屈服)시키고, 굳게 천주교를 받아들였
다.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마음이 바르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편지(便紙)를 보내어 복음(福音)의 참 정신을 알리고, 신기(神奇)한 물건이나 마술적
(魔術的)인 힘에 대한 생각을 일체 버리게 하고자 하였다. 김건순 (金健淳) 요사팟은
감격하여 기꺼이 항복(降伏)하고, 구원(救援)의 길로 곧바르게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