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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주문모 신부의 순교 -6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⑫ 오랜 시간동안 사형집행을 준비하는 동안, 그전까지는 맑고 청명(淸明)하던 하늘이 갑

    자기 두터운 구름이 덮이고, 형장(刑場)위에 무서운 선풍(旋風)이 일어났다. 맹렬한 바

    람과 거듭 울리는 천둥소리, 억수같이 퍼붓는 흙 섞인 비와 캄캄한 하늘을 갈라놓는 번

    개 따위가, 모두 이 피비린내 나는 광경(光景)을 만든 자들과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놀

    라움과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데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거룩한 순교자(殉敎者)의 영혼(靈魂)이 하느님께로 날아가자마자, 고운 무지

    개가 서고 구름이 걷히며, 폭풍우(暴風雨)도 금세 가라앉았다. 태양이 망나니들의 죄악

    (罪惡)을 보지 않기 위하여 얼굴을 가렸다가 그들의 희생자(犧牲者)의 승리(勝利)를 축

    하(祝賀)하기 위하여, 그 찬란(燦爛)한 모습을 완전히 다시 드러내는 것 같았다.

       구경하던 외교인(外敎人)들과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이 이 매우 이상한 우연의 일치

    에서 선교사(宣敎師)의 성덕(聖德)의 증거(證據)를 보았다.

    ꡒ이렇게 무서운 표적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 하늘도 이 처형자의 운명에 무

     관심하지 않구나.ꡓ

    하고 외교인들은 크게 놀라며 말하였다.


⑬ 순교자(殉敎者)의 머리는 매달려 있었고, 그의 시신(屍身)은 처형장에 다섯 날과 다섯

    밤 동안 그대로 놓아두었었다. 그동안 사람들이 그리로 가까이 오는 것을 철저히 막았

    고, 아무도 그곳에 들어갈 허가(許可)를 받지 못하였다. 매일 밤 무지개가 또는 찬란한

    빛이 그 시신(屍身) 위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한 사실은 여하간에, 그때에 이상한 현상(現象)이 일어나 많은 외교인(外敎人)들

    이 크게 감명(感銘)을 받았음은 확실한데, 당시의 여러 수기(手記)에 기록된 천주교인

    들과 외교인들의 일치된 구전(口傳)이다. 여러 교우(敎友)들이 오늘까지도 그이야기를

    듣는 것이 드물지 않다고 말한다.

       마침내 어영대장(御營大將)은 시신(屍身)을 묻으라고 명하고, 그곳을 전과 같이 계속

    지켰다. 교우들은 순교자(殉敎者)의 유해(遺骸)를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갈 생각으로

    자리를 묻힌 자리를 잘 보아두었었다. 그러나 파수꾼들은 계속해서 지키기가 귀찮아 시

    신(屍身)을 몰래 다른 곳으로 갖다 묻었다. 그 후 교우들이 백방으로 찾아보았으나, 조

    선의 맨 처음 선교사(宣敎師)의 보배로운 유해(遺骸)가 묻혀 있은 자리를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다.


⑭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神父)의 기억(記憶)은 조선 교우들의 마음에 아직도 생생

    하게 남아 있어, 이들은 그의 열성(熱性), 슬기, 극기(克己)의 생활, 업적(業績) 및 죽음

    에 대하여 깊은 경의(敬意)를 가지고 말한다.

       북경주교(北京主敎)는 그를 보내면서 자기의 가장 훌륭한 인물(人物)을 잃는다고 말

    하였는데, 과연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는 훌륭한 재질(才質)과 한문의 박학(博學)

    한 지식과 아울러 비범(非凡)한 종교지식과 덕행(德行)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일

    에 있어서나 또 언제나 이 나라 천주교의 자랑이 되었다. 그의 점잖은 외모(外貌), 고상

    한 태도(態度) 및 크나큰 친절(親切)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끌었었다.

       처음 여러 해 동안은 은거(隱居)해야만 했고, 마지막에는 극히 조심스럽게 자기의 모

    든 행동(行動)을 숨겨야만 했던 그는, 하느님 앞에 수많은 공로(功勞)를 세울 기회(機

    會)를 가졌고, 자기의 충성으로 순교(殉敎)의 은총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

       교우(敎友)들이 전하는바에 의하면, 그가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30년 뒤에는 조선

    (朝鮮)에 신부(神父)들이 다시 들어올 것이라고 예언(豫言)하였다 한다. 과연 교우들은

     32년 동안을 기다린 후에야 새 선교사(宣敎師)를 맞아들일 수 있었다.

       한문(漢文)으로 쓰고 조선말로 번역된 책이 한 권 나와 있는데, 그것을 늘 주문모(周

    文謨) 신부(神父)가 쓴 것이라고 하였고, 또한 사실로 그가 쓴 것 같다.  그 책은「사순

    절(四旬節)과 부활시기(復活時期)를 위한 안내서」라는 책인데, 거기에는 고백(告白)과

    성체성사(聖體聖事)를 받을 때 해야 하는 마음의 준비가, 분명(分明)하고 또 매우 간결

    (簡潔)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조선교우(朝鮮敎友)들에게 많은 도움

    을 주고 있다.


⑮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의 옷과 갓과 또 그가 지녔던 상본(像本) 두 장이 신입교우

    (新入敎友)들에 의하여 오랫동안 아주 정성되이 간직되어 있었다.

       신대보(申大甫) 베드로는 그의 수기(手記)에서 이 유물(遺物)들이 여러 번 기적적(奇

    蹟的)으로 화재(火災)를 모면하였다고 말한다. 지금은 지난번의 박해(迫害)로 인하여

    그 유물(遺物)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중국(中國)과의 사이에 어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조선정부(朝鮮政府)는 주문모(周文

    謨) 신부(神父)를 처형(處刑)할 때, 그가 제주(濟州)태생이라는 소문(所聞)을 퍼뜨렸었

    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그 후 황제(皇帝)에게 조선왕(朝鮮王)의 이름으로 보낸 편지

    (便紙)에서 그가 중국인(中國人)이었다는 것을 자백(自白)하고, 그의 출생지(出生地)가

    그가 죽은 후 공범자(共犯者)들의 뒤따른 고백으로 비로소 알려졌다고 주장하였다. 이

    자백(自白)과 더불어 황제(皇帝)의 진노(震怒)를 가라앉히기 위한 많은 은(銀)을 보내

    는 것을 잊지 않았고, 사건(事件)은 그것으로 완전히 끝이 났다(이상 원고(原稿) 제 2권(上

     卷 486쪽까지)이 종결).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주문모 신부의 순교 -6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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