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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강완숙 골룸바의 순교 -3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 역시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친척(親戚)이지만, 서족(庶族)인 김이백(金履白)에 대

    해서도 말해야 하겠다. 그의 결안(結案)이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결안에 첨부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는 김건순(金健淳) 요사팟과 같이 죽은 모양이다.

       그러나 이 문서(文書)에는 천주교(天主敎)의 이야기가 없고, 또 한편 다른 어떤 문서

    (文書)에서도 그가 천주교인(天主敎人)이라는 말이 없으므로, 그가 교우(敎友)인 듯하

    지만, 그에게 감히 순교자(殉敎者)의 칭호를 주지는 못하겠다.



이희영(李喜英) 루카는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절친한 친구(親舊)로, 그도 김건순

    (金健淳) 요사팟과 함께 같은 신앙고백(信仰告白)을 하였고, 그와 함께 순교(殉敎)하였

    다. 그는 처음에는 여주읍(驪州邑)에서 살았었는데, 거기에서 천주교(天主敎)를 배

    신봉(信奉)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서울로 이사(移徙)를 왔는데, 거기서 그의 신앙(신

    仰)과 열심(熱心)은 더해 가기만 했다.

       젊어서 그림 그리는 일을 배웠으므로 그는 많은 종교화(宗敎畵)를 그렸는데, 그것이

    그에 대한 결안(結案)의 핑계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의 결안(結案)은 김백순(金伯淳)의

    결안(結案)에 첨부되어 있으며, 3월 29일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집행(執行)은 6

    월 1일로 연기(延期)되어, 방금 말한 다른 증거자(證據者)들과 같이 참수(斬首)당한 것

    같다.


※ 그날 다른 희생자(犧牲者)들이 아마 또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한 수기(手

    記)에 의하면,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찬척과 친구들 중에서 약 20여 명이 붙잡혔는

    데, 그중에서 어떤 사람들이 충성(忠誠)을 보였고, 어떤 사람들이 나약(懦弱)하게 되는

    불행(不幸)을 가졌었는지를 정획(正確)히 알 수 없었다고 씌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 자세한 기록(記錄)을 얻기란 불가능(不可能)하였다. 그러나 그 집안에

    천주교인(天主敎人)의 수가 얼마가 되었었더라도, 지금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래도

    그 집안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신(情神)은 천주교(天主敎)에 대해서 적의(敵意)를 가지

    고 있지는 않다

       1875년에 승하(昇遐)한 순조(원문에는 純宗)의 왕비(王妃)도 이 집안 출신(出身)이었

    는데, 이 왕비는 감히 드러내놓고 천주교인(天主敎人)의 편을 들지는 못하면서도, 그들

    에게 항상 호의(好意)를 베풀었다. 지금의 왕비(王妃)도 같은 집안 출신(出身)인데, 오

    늘날까지도 교우(敎友)들에게 많은 귀찮음을 피하게 해준, 중요한 감사(監司)들이 대부

    분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친척(親戚)이다.



2.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의 순교 - 아! 너무도 아름다운 영혼이여!


① 한 달 후, 5월 23일(7월 3일) 새 순교자 9명(강완숙(姜完淑), 최인철(崔仁喆), 김현우

    (金顯禹), 이현(李鉉), 홍정호(洪正浩), 김연이(金連伊), 강경복(姜景福), 한신애(韓信

    愛), 문영인(文榮仁) 등)이 서소문(西小門) 밖으로 끌려가 참수(斬首)되었다. 이 순교자

    (殉敎者) 중 5명은 양반집 부인(婦人)들로서, 조선의 국법(國法)을 위반(違反)해가며

    처형(處刑)한 것이니, 이것은 천주교의 적들의 격노(激怒)로 밖에는 설명될 수 없다.

       이 영광(영광)스러운 무리의 첫 머리에, 신부(神父)를 헌신적(獻身的)으로 보좌해드

    린 강완숙(姜完淑) 골룸바가 있는데, 그에 대하여는 이미 위에서 말한 바 있다.


② 그녀가 잡힌 후, 관리(官吏)들은 그녀로부터 신부(神父)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무서운 주리를 틀었다. 그러나 그러한 혹형(酷刑) 가운데서도 강완숙(姜完

    淑) 골룸바는 입을 열지 않고, 마치 감각(感覺)이 없는 사람 같아, 형리(刑吏)들이 자기

    들끼리

    ꡒ저건 여자가 아니고 귀신이다.ꡓ

   하고 말할 지경이었다.

       조금이라도 나약(懦弱)한 표를 보이기는 고사하고, 옥중의 관리(官吏)들 앞에서조차,

    그의 사도직(使徒職)을 계속하여, 천주교(天主敎)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끊임없

    이 주장(主張)하며, 공자(孔子)와 그 밖의 가장 유명한 철학자(哲學者)들의 글에서 증

    거(證據)를 끌어내어, 자기의 말을 뒷받침 하였다.


③ 관리(官吏)들도 감탄(感歎)하여 강완숙(姜完淑) 골룸바를「유식한 여인네, 비길데 없

   는 여인」이라는 말로 그녀를 표현(表現)하면서 기가 막힌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비상

    (非常)한 놀라움으로 생기는 망연자실(茫然自失)을 뜻하는 조선식(朝鮮式) 표현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더욱 더 그녀를 배교(背敎)시키려고 더욱 열중하여, 생각할 수 있

    는 방법(方法)을 총동원하여 가장 잔인(殘忍)한 형벌(刑罰)을 그녀에게 가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그녀의 그 희생적(犧牲的)인 초자연적 인내(超自然的 忍耐)에 지고 말았

    다.


④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의 신앙은 그의 모성애(母性愛)도 마찬가지로 영광스럽게 이겼

    다. 그녀와 같이 잡혔으나 다른 옥에 갇혀 있던 전실(前室) 아들 홍필주(洪弼周) 필립보

    는, 형벌(刑罰) 중에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강완숙(姜完淑) 골룸바는 그 말을 듣고서, 그가 옥에서 법정(法廷)으로 가던 날 먼발

    치로 아들을 보며, 그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ꡒ예수께서 네 머리 위에서 너를 보고 계신다. 네가 그와 같이 눈이 어두워,

    스스로 멸망할 수 있느냐? 내 아들아, 용기를 내고 천당복(天堂福)을 생각하

    여라.ꡓ

    이 용감(勇敢)한 격려가 젊은이의 영혼(靈魂)을 구하였으니, 그는 이 말로써 힘을 얻

       어, 몇 달 후에 순교(殉敎)의 영관(榮冠)을 받았다.


⑤ 강완숙(姜完淑) 골룸바는 옥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가 죽었다는 소식(消息)을

    들었다. 그때 그녀는 자기의 옷자락을 찢어서, 거기에 선교사(宣敎師)의 사도적 업적

    (使徒的業積)을 썼다.

       한 성인(聖人)을 그렇게도 잘 알던 성녀(聖女)에 의해서 옥에서 씌어진, 이 성인(聖

    人)의 행적(行蹟)은, 불행하게도 그 비단 조각을 맡았던 여교우(女敎友)의 소홀로 없어

    지고 말았다.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와 함께 갇혀 있던 동료(同僚)들의 열심은, 그 몹쓸 옥(獄)을

    기도(祈禱)의 처소(處所)로 바꾸어 놓았었다. 신심행사(信心行事)에 충실(忠實)하면서,

    그들은 서로를 위로(慰勞)하고 격려(激勵)하며, 그들의 천상배필(天上配匹)에 합당하

    게 되려는 생각뿐이었다.

       천상배필(天上配匹)은 그의 갚음으로 그들을 명백히 보호(保護)하여 주셨다. 제헌(祭

    獻)의 시간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들은 더욱 기뻤고, 특히 그들이 죽기 전날은

    기쁨에 취한 것 같았다.


⑥ 드디어 그렇게도 기다리고, 그렇게도 열렬(熱烈)히 바라던 날, 승리(勝利)와 보답(報

    答)의 날이 밝았다.

        5월 23일(7월 3일),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와 동료(同僚) 4명이, 수레를 타고 형장

    (刑場)으로 끌려갔다. 길을 가는 동안 그들은 기도(祈禱)하고 서로 격려(激勵)하며, 하

    느님의 찬미(讚美)를 노래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군중(群衆)들은 그들의 얼굴에 거룩한

    기쁨이 빛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형장(刑場)에 이르러 강완숙(姜完淑) 골룸바는, 사형(死刑)을 주재(主宰)하던 괸리

    (官吏)에게로 몸을 돌려 말하였다.

    ꡒ법에는 사형을 받아야 하는 자들의 옷을 벗기라고 명해졌으나, 여자들을 그

    렇 다루는 것은 온당치 않을 것이니, 우리는 옷을 입은 채로 죽기를 청한다 

    고 상관에게 알리시오.ꡓ

    그 허락(許諾)이 내려져,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배필(配匹)들은 크게 만족(滿 

      足)하였다. 그때 강완숙(姜完淑) 골룸바는 십자성호(十字聖號)를 긋고, 맨 먼저 머리

      를 형리(刑吏)에게 내밀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41세였다.


⑦ 여기서 사건을 조금 앞질러, 홍필주(洪弼周) 필립보의 순교(殉敎)이야기를 하기로 하

    자. 그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의 남편(男便)의 전실(前室) 소생

    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의 풍습(風習)대로, 그는 언제나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의 아들

    로 불리어졌다. 그는 늘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와 같이 있었고, 그녀를 따라 서울로 왔

    으며, 그녀를 언제나 친어머니처럼 대접하였다.

       그들이 신부(神父)를 집에 모셔들었을 때, 홍필주(洪弼周) 필립보는 신부(神父)가 계

    신 것을 이용(利用)하여, 훌륭한 교우가 되었다. 그는 매일 미사 때 복사(服事)를 하고,

    신부(神父)의 어려운 처지(處地)로 인하여 필요하게 되는 모든 도움을 열심히 그에게

    드렸다.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와 함께 붙잡혀, 다른 감방(監房)에 갇혀 혹독(酷毒)한 고문

    (拷問)을 당하였다. 처음에는 누를 미치게 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매우 용감(勇

    敢)하게 견디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지는 것 같았을 때에, 그의 영웅적인 어머니가

    몇 마디의 말로, 그의 신앙(信仰)과 하느님께 의지하는 마음을 되살려 주었다.

       그이후로 그는 변하지 않았으며, 형벌(刑罰)을 이겨내어, 8월 27일(10월 4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머리를 바쳤다. 그때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강완숙 골룸바의 순교 -3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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