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제 2 장
지방(地方)의 순교자 들
5월부터 8월까지 있은 지방의 순교자들
〔5월 23일(7월 3일) 판결(判決)을 받은 사람들은 위에서 말한 9명의 순교자(殉敎者)만이 아니었다. 다른 여러 건의 사형선고(死刑宣告)가 같은 날 내려졌으나, 그것들은 그 뒤 며칠이 지난 후에야 집행(執行)되었다. 왜냐하면 위에서 이미 말한 바 있는 방침(方針)에 따라서, 증거자(證據者)들을 그들의 출생지(出生地)로 이송(移送)하여, 그들의 처형(處刑)을 보게 함으로써, 지방주민(地方住民)들을 겁내게 하려고 한 까닭이다. 다음에 알려진 순교자들을 몇 분 보기로 한다.〕
1. 정순매(鄭順每)의 순교
우선 여주(여주) 고을에서 난 정광수(鄭光受)의 누이 정순매(鄭順每)가 있다. 그녀는 동정(童貞)을 하느님께 바치기를 원하였으나, 외교인(外敎人)들의 법석을 피하기 위하여 자기는 허가(許哥)라는 사람과 혼인(婚姻)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올렸고, 이런 계책(計策)으로 혼자 지내며 그녀의 신심(信心)이 일러주는 모든 착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결안(結案)에는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서 세례(洗禮)를 받았다고 씌어 있었
다. 그녀는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을 당하였으나, 여성답지 않은 용기(勇氣)를 보여주었고, 사형언도(死刑言渡)를 받고 여주읍(驪州邑)으로 압송(押送)되어, 서울의 동료들보다 이틀 뒤인 5월 25일 참수(斬首)되었다.
2. 윤점혜(尹占惠) 아가타의 순교
① 정부의 기록(記錄)에서 윤점혜(尹占惠)라고 불린 두 번째 여인은 다른 여러 죄목
(罪目)중에서도, 특히 과부(寡婦)라고 자칭하며 동정(童貞)으로 있었다고 고발(告
發)되었는데, 같은 날 자기의 고향 양근(楊根)에서 침수(斬首)되었다. 한결같은 구전
(口傳)과 필자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헌(文獻)으로 보아, 필자는 이 윤점혜(尹占
惠)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 유명(有名)한 동정녀(童貞女) 윤(尹) 아가타임을 확신
(確信)한다.
② 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북경(北京)을 세 번이나 왕래(往來)하여 주문모(周文謨) 신
부를 조선에 모셔오고, 1795년에 순교(殉敎)한 윤유일(允有一) 바오로의 사촌(四寸) 누
이였다.
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향반(鄕班)으로 태어나 양근(楊根)고을에서 살았다. 천주
교(天主敎)를 알자 곧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기를 원하여 동정(童貞)의 서원(誓
願)을 하였고, 집안에서는 그녀의 거룩한 결심(決心)에 방해(妨害)가 올 것을 염려하
여, 몰래 남자(男子)의 옷을 지어 입고 삼촌(三寸)들 중의 한 사람의 집으로 도망을 갔
다.
어머니는 그녀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힌 줄로 알고 슬퍼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는데,
오랜 동안 집을 떠나 있다가 어머니에게로 돌아왔다. 그녀의 영웅적인 결심(決心)을 조
금도 이해(理解)하지 못하는 가족들의 간청(懇請)도 불평(不評)도 그녀의 마음을 움직
일 수는 없었다. 오히려 간청과 불평이 심할수록 그녀는 반대로 자기를 하느님께 온전
히 바치고자 하는 생각이 더욱 굳어지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앙(信仰)의 은총
(恩寵)을 마련해 주려고 하는 데에 더욱 열심하여졌다.
③ 1795년에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와서 살았다. 그녀가 아직 성세(聖洗)를 받지
못하였을 때에, 사촌 오빠인 윤유일(尹有一) 바오로가 외국신부를 모셔 들여 왔다는 죄
목(罪目)으로 붙잡혀 재판(裁判)을 받고, 사형(死刑)을 당하였다. 이때에 그녀도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고, 또한 많은 고통(苦痛)을 당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의 집으로 가서, 착한 사업을 하는 데
에 힘닿는 데까지 그녀를 도와주기를 열망하여, 강완숙(姜完淑) 골룸바가 자기 집에다
모아서 가르치는 처녀(處女)들을 헌신적(獻身的)으로 가르쳤다.
남의 영혼구원(靈魂救援)에 지칠 줄을 모르는 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자기 자신의
성화(聖化)에 더욱 열심히 힘썼다. 매우 엄격(嚴格)한 생활과 잦은 금식(禁食)과 엄한
극기(克己)와 아울러 끊임없는 가도(祈禱)와 묵상(黙想)을 하였다. 이러한 덕으로 그녀
는 완덕(完德)의 길로 빨리 나아갔다. 하느님께서는 이 여종(女從)의 고귀한 노력(努
力)을 여러 가지 특별한 은혜(恩惠)로 상주시기까지 하셨다.
④ 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그녀의 어머니가 성사(聖事)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을
몹시 한탄하였다. 그런 차에 하루는 그녀의 어머니가 동정(童貞)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이 보였다. 꿈이나 마귀(魔鬼) 혹은 요술(妖術)이 아닌가 하고 염려하여, 윤점혜(尹
占惠) 아가타는 그 발현 이야기를 선교사(宣敎師)에게 말하였고, 선교사(宣敎師)는 그
것을 좋게 해석(解釋)하여 그녀의 미음에 평화(平和)를 돌려주었다.
또 한 번은 동정성모(童貞聖母)의 발현(發現)을 보았는데, 성령(聖靈)이 하늘의
모후(母后)위에 내려와 그 성심(聖心)위에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겸손(謙遜)이 지극한
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恩寵)이 실제적(實際的)인 것이라고
감히 믿지 못하였는데, 만약 신부(神父)가 그녀가 보았던 것과 똑같은 상본(像本)을 보
여주며 그녀의 걱정을 가라앉혀 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것을 수용(受容)하지 못하
였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주보성인(主保成人)을 특별히 공경하였는데, 같은 열심을 주위의 사
람들에게 일으키기에 힘썼다.
ꡒ나도 아가타 성녀(聖女)처럼 순교(殉敎)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ꡓ
하면서 자주 말하였는데. 결국 그녀의 소원(所願)은 이루어졌다.
⑤ 2월 말경 대박해(大迫害)가 일어난 초기에 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와 함께 붙잡혀 석 달 동안 그녀와 같이 옥에 갇혀 고통(苦痛)을 겪고, 같은 신문
(訊問)을 당하며, 같은 고문(拷問)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도 서로 잘 이해(理解)하고, 그렇게도 서로 친하게 지내던 이 두 위대
한 여인이 함께 순교(殉敎)하러 가는 위로(慰勞)를 받지는 못하였다. 그들의 선고(宣
告)는 같은 날 내려졌으나, 강완숙(姜完淑) 골룸바는 그녀가 열성적으로 일했던 서울의
땅을 즉시 자신의 피로 적신데 반하여, 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양근(楊根)으로 이송
되어 이틀 후에야 순교(殉敎)의 월계관(月桂冠)을 받았다.
최후의 순간까지 그녀가 보여준 불굴(不屈)의 용기(勇氣)와 평화스럽고 조용한 기상
(氣像)은 많은 교우들에게 좋은 교훈(敎訓)이 되었고, 많은 외교인(外敎人)들에게도 강
렬하고 유익한 인상(印象)을 남겼다.
하느님께서는 윤점혜(尹占惠) 아가타의 때묻지 않은 동정(童貞)에 대해, 그녀의 동
료 문영인(文榮仁) 비비안나의 동정에 대해 주신 겉과 같은 증거(證據)를 주셨으니, 그
녀의 머리가 떨어질 때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젖과 같이 희게 보였다고 한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