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3. 양근(楊根) 고을의 또 다른 순교자들
① 그 시기에 양근(楊根) 고을에는 다른 순교자도 많이 있었다. 몇 해 전까지 아직 살아 있
던 그 지방의 노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 읍내에는 그 고을 군수(郡守) 정주성(鄭周
誠)의 잔인성(殘忍性)으로 인하여 피가 넘쳐흘렀고, 외교인(外敎人)들까지도 그의 이
름을 말할 때에는 몸서리를 칠 지경이었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이런 사실(事實)들에 대한 그 시대의 기록(記錄)을 필자는 갖지 못하였
다. 다만 목격한 증인들에게서 얻은 몇 사람의 이름만을 적기로 한다.
② 배석골에 살던 전주 이씨(全州李氏)네 양반집은 교회에 순교자(殉敎者) 4명을 바쳤다.
55세의 이「재몽」, 50세쯤 된「중긴」이라고도 하는「괘몽」과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
의 딸인 26세 내지 30세의 두 젊은 여자들인데, 이 여자들은 자기들의 동정(童貞)을 하
느님께 바쳤었다.
4월 20일 이들은 모두 함께 붙잡혀 고문(拷問)을 당하였다. 그 후에도 배교(背敎)하
기를 꾸준히 거부하여, 5월에 매를 맞아 죽거나 참수(斬首)를 당하였다.
지여울에 사는 양반(兩班) 집안 출신 김「원성」도 그들과 같이 잡혀 처형(處刑)되었
는데, 나이는 45세 내지 50세였다.
③ 이 명단(名單)에 유명한 동정녀(童貞女) 이(李) 아가타를 추가해야 하겠다. 그녀는 광
주 이씨(廣州李氏) 집안 이동지(李同知)의 딸로, 1839년 초에 순교하는 회장 이광헌(李
光獻) 아우구스티노의 먼 친척이었다.
이 처녀는 양근(楊根) 부근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일찍부터 그녀는 하느님
께 자기의 동정(童貞)을 바치기로 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외교인(外敎人)들의 위협을
견딜 수 없어, 친척(親戚) 중의 한 사람인 유한숙(愈汗淑)과 서로 짰다. 유한숙(愈汗淑)
이 순교(殉敎)하였음은 이미 말 한 바이지만, 그가 이 아가타를 몰래 빠져나오게 하여
서울의 윤점혜(尹占惠) 아가타에게로 데려다 주었다.
이 은신처(隱身處)에서 이 아가타는 아주 자유스럽게 기도(祈禱)와 착한 일에 전념
하며 마지막 싸움을 준비(準備)할 수가 있었다.
필자는 이(李) 아가타의 기억이 오늘까지도 그녀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의 특별한 찬
양(讚揚)을 받고 있는 만큼, 그녀의 생애(生涯)에 대한 자세한 내용(內容)을 알 수 없음
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④ 끝으로, 5월 23일 선고(宣告)를 받은 이들 중에서 고광성(高光晟)과 이국승(李國昇),
그리고 아마도 황포수(黃捕手)가 들어 있으니, 이제는 이들에 대하여 몇 마디 해야 하
겠다.
고광성(高光晟)은 황해도(黃海道) 평산(平山) 고을의 양민(良民)의 집안에서 태어났
다. 그가 어떤 경위로 입교(入敎)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고, 그에 대한 신문내용(訊問內
容)도 알 수가 없다(그러나 다른 기록(捕廳과 刑曹의 기록)에는 자세하게 나온다).
서울 옥에 갇혔을 때 불행이도 배교(背敎)를 하였었는데, 그 때 하느님께서는 이국승
(李國昇)이 같은 옥으로 끌려오게 하셨다. 이국승(李國昇)은 그의 잘못을 심하게 나무
라며 취소(取消)할 것을 권하면서, 그렇게 하는 일을 돕기 위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를 알려 주었다.
ꡒ배교한 것은 자네가 아니고, 마귀가 지네를 속여 자네의 입을 빌어 말한 것이라고 관장
에게 말하게.ꡓ
이런 권고(勸告)를 받은 고광성(高光晟)은 적당히 취소(取消)를 하고 나서, 세번이
나 새로운 신문(訊問)을 당하였는데, 어떠한 나약(懦弱)의 표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
는 자기의 고향(故鄕)인 평산(平山)으로 이송되어 참수(斬首)를 당하였는데, 보통의
사형(死刑)때에 쓰는 연장이 아니라, 도끼로 참수되었다. 그의 죽음은 서울에서 평산
(平山)까지의 거리로 보아 동월 27일이나 28일에 있었을 것이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