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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제 2장 지방의 순교자들- 3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⑤ 기묘(奇妙)한 방법(方法)을 가지고 계신 하느님의 섭리(攝理)는 이렇게 박해자(迫害者)

    들의 악의(惡意)를 이용하시어, 전에는 천주교가 알려지지 않았던 곳에 그 영광(榮光)

    을 드러내셨다.

       과연 우리 순교자의 사형선고(死刑宣告)와 그들의 용감(勇敢)한 죽음을 기회로, 천

    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평산(平山) 고을이 그러하였다. 사수(射手)들이 모인

    군영(軍營)에 속하여있기 때문에 황포수(黃砲手)라는 별명을 듣던 증거자 황씨(黃氏)

    가 참수(斬首)를 당한 같은 도의 봉산(鳳山) 고을이 또한 그러하였다.

       황씨(黃氏)는 자가 군영(軍營)에 복귀하려고 서울에 왔다가 천주교 이야기를 듣고

    입교(入敎)하는 행복을 얻었다. 박해(迫害)가 시작되자 이내 잡혀 흔들리지 않는 굳건

    함으로, 배교(背敎)의 조그마한 표시(表示)도 하기를 거부하여,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 자기의 고향(故鄕)인 봉산(鳳山) 고을로 이송되어 형의 집행(執行)을 당하게 되었

    다.

       전하는 바로는, 그가 형장(刑場)으로 끌려갈 때, 그의 젊은 여종(女從) 하나가 그를

    따라갔는데, 증거자(證據者)가 천국의 일에만 정신을 쏟아 그 여종을 바라보기를 거절

    하자, 여종은 화가 나서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으나, 그것을 기꺼이 참아 받았다고 한

    다.


⑥ 이국승(李國昇) 베드로는「성겸」이라고도 하는데, 충청도(忠淸道) 음성(陰性) 고을

    출신으로 충주(忠州) 고을로 이사하였었다.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것을 철저히 배우기 위하여 양근(楊根) 권씨(權氏) 형제들에게 가서, 은총(恩寵)으로

    마음이 움직여 즉시 교회의 본분(本分)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 외교인(外敎人)인 그의 선생이, 있는 구변을 다 써서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으니, 이국승(李國昇) 베드로는 그의 모든 궤변

    (詭辯)을 쉽게 반박하였다.

       처음에 1795년에 잡혀 배교(背敎)의 말을 하여 석방(釋放)되었으나, 나중에 진심으

    로 그것을 뉘우치고 오랫동안 보속(補贖)을 하였다. 그의 부모가 결혼(結婚)을 시키려

    하였으나, 아내와 아들이 천주교의 본분을 지키는데 방해(妨害)가 되리라고 생각하여

    끈질기게 거절하고, 끊임없는 재촉을 피하기 위하여 서울에 가서 살았다.

       착한 일을 하는데 지극히 열성적(熱誠的)이고, 집안 걱정이 도무지 없었으므로, 그는

    남을 가르치는 데 쉽게 전념(專念)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애덕(愛德)의 일

    에 온전히 자기를 바쳤고, 그의 말은 교우(敎友)는 물론이고 외교인(外敎人) 들에게도

    많은 구원(救援)의 열매를 맺었다.

       그는 대박해(大迫害) 때에 체포되어 옥에 들어가는 때부터, 방금배교를 한 고광성(高

    光晟)에게 뉘우치라고 권고함으로써, 자기의 열성(熱性)을 발휘(發揮)할 기회를 가졌

    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성공(成功)을 거두어 고광성(高光晟)에게 순교의 영관

    (榮冠)을 얻게 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러니 오래지 않아 자신도 형벌(刑罰)의 시련

    (試鍊)을 받아 배교(背敎)한다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관원(官員)이 고문을 중지시키

    고 석방(釋放)하려 할 때에, 갑자기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풀려나면 전과 똑같이 다시

    종교를 신봉(信奉)하겠다고 외쳤다.

       배교(背敎)를 하였다가 곧 바로 취소(取消)하는 장면이 여러 번 되풀이된 모양인데,

    그것은 과히 놀라울 것이 없으니,  이국승(李國昇) 베드로는 자기 기질(氣質)의 모든

    장점(長點)과 더불어 모든 결점(缺點)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성질이 급하고 열렬하며 열성(熱性)이 가득한가 하면, 변하기 쉽고 끈기가 없어 여러

    경우에 유감스러운 경솔(輕率)을 보여 주었었다. 그러니 그의 마음속을 잘 아시는 하느

    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시어, 당신 종의 일체의 교만(驕慢)과 자신에 대한 일체의

    과신(過信)을 완전히 없애주시기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그런 잘못을 저지르게 허락

    (許諾)하신 다음에, 꾸준히 신앙을 굳세게 증거(證據)하고, 사형선고(死刑宣告)를 얻어

    내는데 필요한 모든 힘을 그에게 주셨다.

       그는 참수(斬首)당하기 위하여 공주(公州)로 하송(下送)되었다. 그는 형장(刑場)으로

    끌려가면서, 그를 따라오는 구경꾼들에게 여러 번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ꡒ당신들은 나를 동정하는 것 같은데, 참으로 불쌍한 것은 당신들이오,ꡓ

       이국승(李國昇) 베드로는 5월 26일이나 27일에 참수를 당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는 30세였으며, 그의 시신(屍身)은 조카들이 공주(公州)에다 매장하였다.


⑦ 날짜는 알 수 없으나 같은 5월에, 문(文)「윤진」이라는 불쌍한 여종(女從)이 공주읍

    (公州邑)에서 또 처형되었다. 그녀는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피신(避身)하여 있는 집들

    중의 하나에서 시중을 들다가, 박해(迫害)를 피하기 위하여 시골로 도망을 하였으나 붙

    잡혔다. 그녀는 꾸준한 마음으로 순교(殉敎)의 은총(恩寵)을 얻게 되었다.

       다른 데에는 도무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녀와 약간 친하게 사귀다가 공주읍(公州

    邑)으로 그녀를 따라가서, 그녀가 형장(刑場)으로 끌려갈 때에 지나가는 것을 본, 어떤

    늙은 여교우(女敎友)가 그녀라고 알려 주었다.


    

4. 7월 13일의 순교자들


조선의 문헌(文獻)에는 6월 중에는 아무런 사형집행(死刑執行)도 기록(記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천주교의 적들의 격노(激怒)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어서, 아직도 오랫동안 우리의 역사(歷史)는 오랜 기간을 순교자(殉敎者)들의 명단(名單)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7월 13일(8월31일), 다른 증거자(證據者) 5명, 충청도(忠淸道)의 김광옥(金廣玉) 안드

레아, 김정득(金丁得), 전라도(전라도)의 한정흠(韓正欽) 스다니슬라오, 최여겸(崔汝謙) 마티아, 감천애(金千愛) 안드레아 등에게 사형선고(死刑宣告)가 내렸다.



1) 증거자(證據者)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


①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는 내포지방(內浦地方) 예산(禮山)고을 여사울의 부유한 양가

    (養家)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오랫동안 면장(面長)의 직책을 맡았었다. 비록  훌륭한 

    자질을 타고 났으나, 지나치게 사나운 성질(性質로 인하여, 그를 아는 사람은 모두가

    그를 무서워하였다.

       약 50세가 되었을 때에, 거의 한 동네라고 할 수 있는 가까운 마을에 살던 이존창(李

    存昌) 곤자가의 루도비꼬에게서 천주교를 배워, 모든 이가 놀라는 가운데 입교하여, 외

    교인(外敎人)들을 전혀 염려(念慮)하지 않고 드러나게 교의 본분(本分)을 아주 열심히

    실천(實踐)하기 시작하였다. 더 나아가서 그는 자기의 집안과 동네의 많은 친구(親舊)

    와 다른 사람들을 입교(入敎)시켰다. 계절(季節)에 상관없이 매일 모두가 한 자리에 모

    여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함께 드렸다.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가 교리(敎理)를 설명하는 일도 자주 있었는데, 그는 자기

    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열렬(熱烈)한 신앙(信仰)이 생겨나게 할 줄을 알았다.

    그는 사순절(四旬節)에는 엄격한 금식(禁食)을 하고, 여러 가지 극기(克己)의 행위를

    실천(實踐)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러 가지 천주교의 덕행(德行)을 매우 부지런히 닦음

    으로써, 마침내 어떻게나 자기의 성격을 꺾게 되었던지, 사람들은 그가 젖먹이같이 되

    었다고 말할 지경이었다.


② 1801년의 박해(迫害)가 그렇게도 맹렬히 일어남을 보자, 그는 공주(公州)의 산골로 피

    해 들어갔다. 그러나 1월부터 밀고(密告)되어 이내 자기의 본읍(本邑)  포교(捕校)들에

    게 붙잡혔다. 그는 그때 이렇게 말하였다.

  ꡒ집에 앉아 기다리는 것은 나로서는 매우 무모한 짓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약한데 내 힘을 믿는 것 같았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피하여 위험을

    모면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순교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원이었다. 오늘

    잡힌 것은 오직 천주의 명으로 된 것이니, 매우 기쁘다.ꡓ

       과연 마음속의 이 천상(天上)의 기쁨이 그의 얼굴과 행동에 밝히 나타나, 포졸(捕卒)

    들과 목격자(目擊者)들이 놀랄 지경이었다.


③ 관장(官長)은 즉시 그를 신문(訊問)하고 비겁하게 도망한 것을 나무라며, 공범자(共犯

    者)들을 댈 것과 천주교서적(天主敎書籍)을 내놓을 것을 명하였다.

  ꡒ저는 동교인(同敎人)은 많습니다만, 그들을 알려드리면 저와 같이 취급하실

    것이므로 아무 말도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의 책으로 말씀드리면 너무나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사또께 드릴 수가 없습니다.ꡓ

      관장(官長)은 성이 나서 고문(拷問)을 배로 더하게 하였고, 김광옥(金廣玉)안드 레아

   는 의식(意識)을 일었다. 그런데도 큰 칼을 씌워 옥으로 데리고 가게 하였다.

      두 번째 신문에서도 관장(官長)은 똑같이 잔인(殘忍)하였고, 김광옥(金廣玉) 안드레

   아는 똑같이 용감(勇敢)하였다,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는 이렇게 말하였다.

  ꡒ사또의 모든 위협도, 어떤 언약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는 저에게 물어보

    지 마십시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烈女)는 두 지아비를 따

    르지 않습니다, 사또께서는 임금님의 명을 어길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또는

    감히 임금님을 배반하시겠습니까? 저도 천주의 명을 거역하기를 원치 않습

    니다. 저는 대군대부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만 번 안 됩니다. 임금과 부모

    에 대하여는 밖에 드러나는 행동이 마음에 있는 감정과 서로 조화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천주께서는 비밀한 생각과 감정과 의향

    을 보고 계시므로, 그분 앞에서는 마음속으로라도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

    다. 저는 사또께 전부를 말씀드렸으니, 마음대로 하십시오.ꡓ


④ 관장(官長)은 형리(刑吏)들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몽둥이와 치도곤(治盜棍)으로 그를

    치게 하였으나 헛일이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신문(訊問)에서도 그와 같은 고문(拷問)

    을 계속하였으나 역시 헛일이었다.

       사람과 지옥의 악의(惡意)보다도 더 강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자의 힘을

    돋우어 주셨다. 관장(官長)은 기가 막혀 말하였다.

    ꡒ아니, 도대체 너는 죽는 것이 무엇이 그리 좋으냐? 너는 아내도 있고 자식

    도 있으며 재산도 있다. 네가 한 마디만 하면  돌아가 그것을 다시 누릴 터

    인데, 어째서 형벌 중에 쓰러지려고 고집하느냐?ꡓ

     증거자(證據者)는 대답하였다.

  ꡒ삶과 죽음이 제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천주를 배반할

    생각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각기 처지거가 다릅니다. 임금님의 녹

    을 받는 사또께서는 그분의 명령을 따라야 하고, 저는 다만 사또께서 그 명

    령을 집행하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비록 매를 맞아 죽는다 하더라도 저는

    결심이 서있습니다. 만 번 죽을지라도 다른 대답을 드릴 수가 없으니 마음

    대로 하십시오. 저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ꡓ

     관장(官長)은 몹시 화가 나서 그에게 모진 매질을 시키고는 사형선고(死刑宣告)에 서

     명(書名)하라고 하니,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는 기쁨으로 얼굴을 빛내며, 자기의 행

     복(幸福)을 천주와 동정 마리아에게 감사(感謝)를 드렸다. 옥으로 다시 끌려와 낮이나

     밤이나 드러내놓고 기도(祈禱)를 드리며, 기회(機會)가 있을 때는 외교인(外敎人)들에

     게 천주교의 진리(眞理)를 전하였다.


⑤ 얼마 후에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는 도의 병사(兵使) 주재지인 청주병영(淸州兵營)

    으로 이송되었다가 거기에서 다시 서울로 이송(移送)되어, 그곳에서 최종 결안(結案)

    이 내려진 것 같다.

       조정(朝廷)의 명령이 그를 그의 출신 고을인 예산(禮山) 읍내에서 처형(處刑하라는

    것이었으므로, 자기와 같은 날 판결(判決)을 받은 친척 김「대춘」과 함께 길을 떠났는

    데, 김「대춘」은 예산(禮山)과 인접한  대흥(大興)고을에서 처형(處刑)을 당하게 되었

    다.

       두 증거자(證據者)는 길을 가는 동안 서로 격려하다가 길이 갈라지는 갈림길에 이르

    러, 각기 참수(斬首)를 당하기로 되어 있던 시간인 이튿날 정오(正午)에 천국(天國)에

    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며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들의 마지막 대화(對話)는 주변 사람

    들을 얼마나 감동(感動)시키는 것이었겠으며, 구세주(救世主) 예수의 품 안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며 나눈 그 작별인사(作別人事)는 또 얼마나 감격적(感激的)이었겠는

    가?



⑥ 이튿날, 일곱 달 동안의 옥살이와 고통(苦痛)을 당한 뒤,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는

    들것에 실려 형장(刑場)으로 운반되었다. 형장으로 가며 그가 큰소리로 묵주신공(黙珠

    神功)을 드리니, 구경꾼들이 말하였다.

  ꡒ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군. 죽는 것이 좋아서 노래를 부르면서 형장으로 가고

    있으니 말이야.ꡓ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가 이 말을 듣고서

  ꡒ그것은 내가 오늘 천주의 곁으로 가서 끝없는 복락을 누리게 되겠기 때문이

     오.

   하고 대답하였다.

     지정된 장소에 이르자 그는

   ꡒ내 기도를 마치지 못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ꡓ

     라고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祈禱)를 마친 다음, 머리를 받치게 되

     어 있는 나무토막을 자기가 몸소 집어다가 머리 밑에 놓고 몸을 숙였다.

        망나니가 헛쳐서 어깨밖에는 다치지 않았다.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는 벌떡 일어

     나 손수건으로 피를 닦고, 다시 자기의 위치로 돌아가

   ꡒ조심하여 머리를 단번에 자르도록 하게.ꡓ

     하고 말한 뒤, 더 할 수 없이 침착한 자세로 그의 제헌(祭獻)을 완성하여 주는 마지막

     칼질을 받았다. 때는 7월 17일(8월 25일) 이었고, 그때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의 나

     이는 60세 가량이었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제 2장 지방의 순교자들- 3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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