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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황사영 백서사건 -6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2. 조선의 왕이 중국황제(中國皇帝)에게 보낸 편지(便紙)와 그에 대한 답서(答書)

① 금부(禁府)에서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과 그 동료(同僚)들의 소송사건(訴訟事 件)에 대한 심리(審理)가 진행되는 동안, 동지사(冬至使) 일행이 북경(北京)으로 떠나는 시기가 되었다.

최근(最近)에 일어난 사건(事件)이 너무나 중대(重大)하고, 큰 인물(人物)들의 처형(處刑)이 너무나 많아서, 그것을 말하지 않고서 지나칠 수는 없었다. 또한 황제 모르게 중국신민(中國臣民)에게 사형(死刑)을 언도하고 집행(執行)한 것을 언급하고, 그에 대한 사과(謝過)를 해야만 했었다.

외교(外交)의 일상적인 간계(奸計)와 거짓말이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 를 도와서, 사실을 그럴듯하게 윤색(潤色)하였다. 어린 왕의 이름으로 가경(嘉慶) 6년 19월 20일(1801년 11월 25일)자로 된 편지(便紙)의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 다.

조선의 왕이 중국황제(中國皇帝)에게 보낸 편지(便紙)

『㉠ 조선왕(朝鮮王)은 소방(小邦)이 강도단(强盜團)으로부터 불행을 겪게 되어 그 들을 사형(死刑)에 처함으로써, 법을 시행한 바 있는 소요(騷擾)의 자초지종 (自初至終)을 폐하께 겸손(謙遜)되이 보고하나이다.

폐하(陛下)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은(殷)나라 군대(軍隊)의 잔여 병력이 동 방(東方)으로 건너온 뒤로부터, 소국(小國)은 예절(禮節)과 정의(正義)의법도 (法道)가 명하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지키고, 일반적으로 본분(本分)에 충실 (充實)함으로써 항상 뛰어났사오며, 이 사실은 중국조정(中國朝廷)에서도 항상 그 공적(功績)을 인정(認定)한 바이옵나이다.

항상 깨끗한 풍속(風俗)을 보존(保存)하여 온 이 나라는 유도(儒道) 이외에 는 어떤 것도 존중(尊重)하지 아니하나이다. 주자(朱子)나 맹자(孟子)나 노자 (老子)의 책이 아닌 다른 모든 책은 이 나라의 선비들과 관헌(官憲)들이 결코 인정(認定)하지 아니하였사오며, 더구나 그들 사이에서 유통된 일은 절대로 없 었나이다.

번잡한 네거리와 초가(草家)의 여자들과 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사회의 받 침대가 되는 삼강오륜((三綱五倫)과 친숙하지 않은 자가 없으며, 그것을 처신 (處身)의 일상법규(日常法規)로 삼지 않는 자가 없나이다. 다른 도(道)는 어떤 것이나 소방(小邦)에서는 생소한 것이오며, 오류(誤謬)가 거기에 침입(侵入)한 적은 일찍이 없었나이다.

㉡ 그러나 한 10년 전부터 흉측(凶測)하고 더러운 오랑캐 도당(徒黨)이 나타나, 서양에서 가져왔다는 도를 따른다고 자처하며, 하늘을 모독(冒瀆)하는 말을 하 고, 성현(聖賢)들을 업신여겼나이다.

그들은 국왕(國王)에게 반역(反逆)하고, 효성(孝誠)의 감정을 억누르고 조상 (祖上)들에 대한 제사(祭祀)를 폐지(廢址)하고 신주(神主)를 불사르며,천당(天 堂)과 지옥(地獄)을 설교하여 무식(無識)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미혹(迷惑)케 하여 따르게 하였나이다.

또한 영세(領洗)라는 것을 통하여 그들 도당(徒黨)의 흉악(凶惡)한 죄를 없 앤다 하며, 퇴폐적(頹廢的)인 책을 감추고 부참(符讖)(불교의 중)들의 것과 같 은 요술(妖術)을 써서, 사방에서 여자들을 모아 금수(禽獸)처럼 사나이다. 어떤 자들은 신부(神父)라고 자칭하고, 또 어떤 자들은 교우(敎友)라고 하나이다.

그들은 백련(白蓮)과 황건(黃巾) 강도들의 본을 따서, 이름을 바꾸어 칭호(稱 號)와 별명(別名)을 지어 가지나이다. 그들은 점을 치며 오류(誤謬)와 혼란(混 亂)을, 서울에서 충청(忠淸), 전라도(全羅道)에 이르기까지 퍼뜨리고 있나이다. 그들의 도리(道理)는 불과 같이 빨리 번져나가고, 그들을 따르는 자들의 수효 는 무섭게 불어나나이다.

㉢ 선왕(先王) 공선왕(恭宣王)이 모든 무질서(無秩序)를 정확히 알고 그 결과(結 果)를 미리 내다보시어, 그 악의 흐름을 막기 위하여 가장 엄한 명령을 내리시 고, 가장 효과적(效果的)인 조치(措置)를 취하였었나이다.

건륭(乾隆) 신해년(辛亥年, 1791)에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과 그 밖의 자들이 제사(祭祀)를 폐하고, 거기에 소용(所用)되는 모든 물건을 부수었 으므로, 모두 사형(死刑)으로 벌을 받았나이다.

비록 아주 어리기는 하나, 저는 선왕(先王)의 뒤를 이어 왕위(王位)에 올랐 나이다. 저 부패(腐敗)한 강도(强盜)들은 존경(尊敬)과 예의(禮義)의 감정(感情) 들을 일체 눌러버리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나이다. 그때부터 그들 사이에는 더욱 활발(活潑)하고 더욱 계속적인 연락(連絡)과 더욱 긴밀(緊密)한 합심(合 心)이 이루어졌으며, 오래지 않아 넘치는 도랑물 같이 되고, 모든 것을 삼켜버 리는 불과 같이 되었나이다.

공범자(共犯者)들은 마치 새싹이 나무에서 돋아나 여러 개의 싹을 또 내고, 그것들이 같은 모양으로 다른 싹을 내고 하여, 잠깐 사이에 무한히 퍼져나가 는 것처럼, 매일같이 수효가 늘어나나이다.

㉣ 금년 3월에 수도(首都) 한성(漢城)에서 이 부패시키는 강도(强盜)들의 편지(便 紙) 여러 장과 그들의 사악(邪惡)한 도리(道理)를 담은 책들을 압수(押收)하여, 그것을 가지고 그들의 재판(裁判)을 시작하였나이다.

그때 저는 이 사건(事件)을 의논(議論)하기 위하여 의정대신(議政大臣)들과 의금부(義禁府),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의 고관(高官)들을 소집하였었 나이다.

먼저 책들을 조사하였나이다. 그것들은 정약종(丁若鍾)이 저술한 것으로 드 러났는데, 이 자의 진술에 의하면, 이승훈(李承薰)이 자기의 아버지 이동욱(李 東郁)을 따라갔던 사신행차(使臣行次)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양의 도리(道理) 를 담은 책들을 가져왔다 하옵는데, 그 책들은 이승훈(李承薰)이 북경(北京)에 머무르는 동안 교제(交際)하였던 그곳의 서양인(西洋人)들에게서 받은 것이라 하였나이다.

이승훈(李承薰)은 우선 이 책들을 이벽(李檗)에게 전하였고, 다음에는 윤지 충(尹持忠)과 정약종(丁若鍾) ․ 정약용(丁若鏞)형제와, 이가환(李家煥) 및그 밖 의 사람들에게 주었나이다. 이들은 이 책들을 연구(硏究)하고 같이 토론(討論) 하여 그것을 자기들의 처신규범(處身規範)으로 삼았나이다.

그로부터 그들은 자기 부모들을 버리고, 도당(徒黨)과 제자(弟子)들을 모았 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나라의 풍속(風俗)을 고치겠다고 생각하였었나이다. 그러나 법이 지엄(至嚴)함으로, 그들의 원한이 불평(不評)으로 발산되어, 악담 (惡談)하고 저주(咀呪)하며 정면으로 대항(對抗)하여, 반역(反逆)외에 다른 것 은 생각지 않았나이다.

㉤ 이벽(李檗)이 죽은 지는 꽤 오래 되오나, 정약전(丁若銓) ․ 정약용(丁若鏞), 이 가환(李家煥), 정약종(丁若鍾) 및 이승훈(李承薰)의 공술(供述)은 모두 완 전히 일치하나이다.

그런데 이가환(李家煥)은 학문(學問)과 육예(六藝)에 능하여 2품(二品)의 관 직(官職)을 얻었었나이다. 그는 이승훈(李承薰)이 가져온 퇴폐적(頹廢的)인 책 들을 언문(諺文)으로 옮겼으며, 그 도당(徒黨)들의 앞장을 서서 멀리까지 그것 을 전파(傳播)하였나이다.

정약종(丁若鍾)의 중요한 공범(共犯)들은 홍락민(洪樂敏), 김건순(金建淳), 최 창현(崔昌顯), 이희영(李喜英), 홍필주(洪弼周), 최필공(崔必恭), 홍교만(洪敎 萬), 지홍(池洪), 윤지충(尹持忠) 등이었나이다. 그들의 모든 공술(供述)이명백 (明白)하고 일치(一致)하나이다.

지식(知識)있고 대가출신(大家出身)인 이 자들 외에도, 낮은 계층(階層)의 장 사치와, 서민(庶民)중에서도 수백 명 이상이 여기에 합세(合勢)하였나이다. 모 두가 뱀처럼 감기고 또 엉켰고, 노끈과 같이 매어져 있나이다.

한편 유혹(誘惑)되어 그 도당(徒黨)에 끌려들어간 여자들은, 홍필주(洪弼周) 의 어미 강완숙(姜完熟)을 그 두목(頭目)으로 하고 있나이다.

㉥ 전에 왕족(王族) 이인(李인)이 모반(謀叛)과 역적(逆賊)의 죄를 지었었나이다. 선왕(先王)은 친족(親族)에 대한 인정(人情)과 너그러움으로, 그를 죽일 결심을 못하고, 섬으로 귀양을 보냈었나이다.

그런데 이인(李인)의 가족(家族)과 하인배(下人輩)가 모두 강완숙(姜完熟)과 비밀리에 통하여, 이 사도(邪道)를 전파하고, 그들의 흉악(凶惡)한 계획을 함 께 꾸몄나이다. 동시에 이인(李인)은 밤을 타 섬에서 도망하였나이다.

사건(事件)이 발단(發端)할 단계에 이르렀던 건륭(乾隆) 병신(丙申, 1776)년 에, 왕족(王族)과 인척(姻戚)이 되면서 배반(背反)과 역적(逆賊)과 강도(强盜)의 죄를 지은, 홍인한(洪獜漢)의 조카 되는 홍락임(洪樂任)이 홍계능(洪啓能)과 몇 몇 다른 자들과 함께 역적(逆賊)을 음모(陰謀)하였으나, 왕은 그들을 길 잃은 왕족으로만 생각하여, 모르는 체하고 사하여 주었었나이다.

그러나 홍락임(洪樂任)은 그 흉악(凶惡)한 계획(計劃)을 추진하는 데에 더욱 열중하여, 이가환(李家煥)과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긴밀(緊密)히 결탁(結託)하 여, 둘은 같은 목적(目的)을 세웠었나이다.

대신(大臣) 윤행임(尹行恁)은 그의 권력을 다하여 홍락임(洪樂任)의 죄악(罪 惡)을 도우며, 재판(裁判)을 오래 끌게 하고, 국법(國法)을 정면으로 어겨가면 서, 모든 것을 혼란(混亂)케 하고 대중(大衆)을 속이려고 힘썼나이다.

그 타락(墮落)한 강도(强盜)들이 일체의 인륜(人倫)을 짓밟고, 국가에 공공연 하게 반기(反旗)를 들려했던 것이 확실한 것 같사옵나이다. 벌써 오래 전부터 폭발하게 될 무서운 요인(要因)이 비밀리에 준비(準備)되었사온데, 겉으로는 사도(邪道)를 내세우는 것으로 만족하고, 속으로는 끔찍한 계획(計劃)을 품고, 훌륭한 행동규칙(行動規則)을 따르는 체하고 있으나, 그것은 혼란(混亂)을 일 으키는 방법에지나지 아니하였사온데, 이인(李인)은 그들의 재주꾼이요 보배였 사옵나이다.

이 도당(徒黨)이 신부(神父)라는 칭호(稱號)로 부르는 주문모(周文謨)를 공론 하여 맞아들인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었나이다. 강완숙(姜完熟)의 집이 그의 은신처(隱身處)로 쓰여졌었나이다,

성명(姓名)과 거처(居處)를 물으니, 그는 모호한 말과 둔사(遁辭)로만 대답하 며, 천가지 모양으로 자신의 죄를 숨겼나이다. 비록 여러 차례 매를 맞았으나, 어떤 것도 그의 둔사(遁思) 쓰는 고집을 이길 수 없었나이다.

그런데 주문모(周文謨)는 이 무리의 모든 계획(計劃) 중의 주모자(主謀者)였 고, 그들의 연락(連絡)의 중심이어서, 그자들은 모두가 그를 중심으로 뭉쳐있 어, 오직 그만을 위하여 모두가 함께 죽음을 당했을 것이옵나이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황사영 백서사건 -6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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