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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황사영 백서사건-4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 저희들에게는 하루가 몇 해 같습니다. 저희들은 무엇인가 하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므로 다만 희망(希望)을 가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 희들은 주교님이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지체 없이 저희들을 도와주시기 를 간절히 원합니다.

올해의 심한 박해(迫害)를 치르고 나니, 빠져나온 교우(敎友)가 별로 없는데, 모두가 숨어서 그들이 완전히 섬멸(殲滅)된 줄로 믿게 해야 합니다. 이 방법 (方法)만이 이곳 천주교회의 그루터기를 보존(保存)하는 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행상인(行商人)이 되었고, 어떤 이들은 이사(移徙)를 할 수밖 에 없어서 길을 방황(彷徨)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대재(大齋)와 소재(小齋)의 관면(寬免)을 청하는 바입니다.

천주강생(天主降生) 1801년 10월 29일, 시몬 다두 성인 첨례(瞻禮) 이튿날, 저희들 토마스와 다른 죄인(罪人)들은 이 사실(事實)들을 적어 올리면서, 다시 한 번 문안(問安)드리는 바입니다.』

⑨ 이 편지(便紙)는 명주에 은현(隱現) 잉크로 써서 비밀(秘密)을 알아내지 못하고 서는 읽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황심(黃沁) 토마스는 이 편지를 북경(北京)에 가 져가는데, 평안도(平安道)에 사는 옥천희(玉千禧)라는 교우와 동행(同行)하려고 했는데, 옥천희(玉千禧)도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편지(便紙)를 전하고, 심부름을 하기 위하여 여러 번 중국(中國)을 내왕하였다.

1800년에서 1801년에 걸친 겨울 동안에도 그는 중국에를 갔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박해(迫害)가 심하게 일어난 상태라는 소식(消息)을 듣고, 즉시 중국 국경 선상(國境線上)에 있는 변문(邊門)으로 돌아가, 중국교우(中國敎友)들에게 알려주 려고 하였었다.

황심(黃沁) 토마스는 옥천희(玉千禧)를 만나는데 성공하여 황사영(黃嗣永)알렉 산델에게 데려왔고, 둘이는 이 편지를 북경주교(北京主敎)에게 드리기 위하여, 연례사신(年例使臣) 일행과 함께 연말(年末)에 떠나기로 약속(約束)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攝理)는 달리 결정을 하셨으니. 편지(便紙)는 목적지(目 的地)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편지는 10월 29일자였는데, 11월 2일 황심(黃 沁) 토마스가 체포(逮捕)되었다.

황심(黃沁) 토마스는 옥에 갇힌 데에 대해 필요(必要) 이상으로 겁을 먹어, 자 기가 붙잡혔으니 어떤 교우(敎友)도 빠져나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또는 어쩌 면 자백(自白)으로 박해(迫害)를 멎게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希望)을 가지고서,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이 숨어있는 곳을 대주었다. 일이 극단(極端)에 이르면 저기를 밀고(密告)하라는

명을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에게서 받았었다고 주장(主張)하는 교우들이 많 다, 포졸(捕卒)들이 급히 배론으로 달려왔으나, 그들이 찾는 사람을 발견(發見)하 지 못하다가, 마침내 지하실(地下室) 위를 걸어 다닐 때 커다란 옹기그릇들이 내 는 둔탁한 소리가 그들의 의심(疑心)을 일으켰고, 결국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 은 발견되었다.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은 포졸(捕卒)들이 오는 것을 보고서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전에 임금이 친히 쥐었었고, 왕의 은총(恩寵)의 표시(表示)로 비단 이 감긴 손을 만지지 말라고 명하였고, 이 명은 지켜졌다.

⑩ 포졸(捕卒)들은 그를 쇠사슬로 결박(結縛)하여 서울로 데려갔는데, 그의 몸에서 옷 속 에 둘둘 말아서 지니고 있던, 그 유명(有名)한 편지(便紙)가 발견되었다. 관리(官吏)들이 어떻게 그 편지를 읽을 수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죽인다는 위협(威脅)을 받은 어떤 교우(敎友)가 그 비밀 (秘密)을 알려주겠다고 나서서, 그 제안(提案)이 수락되었다고 하지만, 이 사실은 전혀 입증(立證)되지 않았다.

어떻든 이 편지는 읽혀졌고, 조정(朝廷)을 몹시 놀라게 했다. 천주교인(天主敎 人)들을 구하기 위해, 나라 안에 서양(西洋)사람들을 불러오려는 음모(陰謀)는 명백(明白)히 드러났다. 어기에 대한 확실(確實)한 증거(證據)를 손에 쥐게 된 것 이었다.

조선정부(朝鮮政府)처럼 외국인(外國人)에 대해 그렇게도 의심(疑心)이 많고, 시기심(猜忌心)이 많은 정부로서는, 그 10분의 1만 되었어도 옥에 갇힌 사람들 을 국사범(國事犯)으로 취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⑪ 그와 때를 같이하여, 또는 아마도 황심(黃沁) 토마스기 제공(提供)한 정보(情報) 에 의하여,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의 두 동지(同志)인 옥천희(玉千禧)와 김한빈 (金漢彬) 베드로가 잡혀, 같은 옥에 갇혔다.

미구에 역관계급(譯官階級)에 속하는 사람으로, 현계흠(玄啓歆) 또는 현(玄) 「사수」라고도 하는 다섯 번째 교우가 같은 옥에 갇혔는데, 이 사람은 1846년에 신앙(信仰)을 위하여 참수(斬首)를 당하는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회장의 아버지 이다.

현계흠(玄啓歆)은 처음에는 지방으로 피신(避身)하였으나, 그의 도피(逃避)로 인하여 온 일가친척(一家親戚)이 연루되어,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하자, 그에게 자수(自首)하라는 편지를 하였던 바 그는 그대로 따랐었다.

그는 1799년, 동래(東萊) 앞 바다에 며칠 동안 정박(碇泊)하였던 외국의 선박 (船舶)위에 올라가 보고서, 그와 같은 배 한척만 있어도 조선의 전함(戰艦) 백 척(百隻) 이상을 쉽게 격파(擊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해서 비난(非 難)을 받았었는데, 이런 일은 관리(官吏)들이 볼 때, 그가 분명 음모(陰謀)에 한 몫 낀 것을 증명(證明)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옳건 그르건 간에 황사영 (黃嗣永) 알렉산델의 소송사건(訴訟事件)에 관련되게 되었다.

이 피고(被告)들은 모두가 드물게 보는 고문(拷問)을 당해야만 했는데, 모두가 그것을 영웅적(英雄的)으로 참아 견디었다. 신앙(信仰)을 배반(背反)할 마음은 한 순간도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사형판결(死刑判決)을 받았다.

황심(黃沁) 토마스의 공식 결안(結案)은 아래와 같은 바, 그 동료(同僚)들의 결 안도 비슷하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황사영 백서사건-4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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