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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황사영 백서사건-5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⑧ 그 다음에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이 혼자 숨어 있는 곳에서, 박해(迫害)받는 형제(兄弟)들에게 종교(宗敎)의 자유(自由)를 얻어주기 위하여 생각해 낸 여러 가지의 방안(方案)들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첫째는 교황(敎皇)이 중국황제(中國皇帝)에게 편지(便紙)를 보내어, 천주교인 (天主敎人)들을 편안하게 두고, 선교사(宣敎師)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었다. 이 신입교우(新入敎友)의 천진한 신앙(信仰)은, 어떤 전제군주(專制君主)이든, 그 가 비록 외교인(外敎人)이라 하더라도, 지상(地上)에서 하느님의 대리자(代理者) 인 교황(敎皇)의 말씀을 따르기를 감히 거절(拒絶)한다는 것은 상상(想像)할 수 도 없었던 것이다.

종교(宗敎)의 자유(自由)가 일단 중국(中國)에서 허용(許容)된다면, 그 여파로

조선에서도 쉽게 종교의 자유가 허용(許容)되리라는 것이었다. 만약에 조선정부 (朝鮮政府)가 말썽을 부리면, 중국황제(中國皇帝)가 무력(武力)으로라도 조선정부 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강요(强要)하는 것은 쉬우리라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이 계획(計劃)이 극복(克服)할 수 없는 장애물(障碍物)을 만나는 경 우에 대하여,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은 북경주교(北京主敎)에게 서양(西洋)의 그리스도교 국가(國家)들에 호소(呼訴)하여, 6만 내지 7만의 군대(軍隊)를 보내 어 조선(朝鮮)을 정복(征服)하라고 간청하고, 그렇게 많은 군대(軍隊)를 모으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7~8천 명을 가지고 시도(試圖)하도록 간청하라고 제 안(提案)하였으니, 부득이한 경우에는 이 마지막 숫자로도 충분(充分)하리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편지(便紙)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 저희들에게는 하루가 몇 해 같습니다. 저희들은 무엇인가 하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므로 다만 희망(希望)을 가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 희들은 주교님이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지체 없이 저희들을 도와주시기 를 간절히 원합니다.

올해의 심한 박해(迫害)를 치르고 나니, 빠져나온 교우(敎友)가 별로 없는데, 모두가 숨어서 그들이 완전히 섬멸(殲滅)된 줄로 믿게 해야 합니다. 이 방법 (方法)만이 이곳 천주교회의 그루터기를 보존(保存)하는 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행상인(行商人)이 되었고, 어떤 이들은 이사(移徙)를 할 수밖 에 없어서 길을 방황(彷徨)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대재(大齋)와 소재(小齋)의 관면(寬免)을 청하는 바입니다.

천주강생(天主降生) 1801년 10월 29일, 시몬 다두 성인 첨례(瞻禮) 이튿날, 저희들 토마스와 다른 죄인(罪人)들은 이 사실(事實)들을 적어 올리면서, 다시 한 번 문안(問安)드리는 바입니다.』

⑨ 이 편지(便紙)는 명주에 은현(隱現) 잉크로 써서 비밀(秘密)을 알아내지 못하고 서는 읽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황심(黃沁) 토마스는 이 편지를 북경(北京)에 가 져가는데, 평안도(平安道)에 사는 옥천희(玉千禧)라는 교우와 동행(同行)하려고 했는데, 옥천희(玉千禧)도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편지(便紙)를 전하고, 심부름을 하기 위하여 여러 번 중국(中國)을 내왕하였다.

1800년에서 1801년에 걸친 겨울 동안에도 그는 중국에를 갔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박해(迫害)가 심하게 일어난 상태라는 소식(消息)을 듣고, 즉시 중국 국경 선상(國境線上)에 있는 변문(邊門)으로 돌아가, 중국교우(中國敎友)들에게 알려주 려고 하였었다.

황심(黃沁) 토마스는 옥천희(玉千禧)를 만나는데 성공하여 황사영(黃嗣永)알렉 산델에게 데려왔고, 둘이는 이 편지를 북경주교(北京主敎)에게 드리기 위하여, 연례사신(年例使臣) 일행과 함께 연말(年末)에 떠나기로 약속(約束)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攝理)는 달리 결정을 하셨으니. 편지(便紙)는 목적지(目 的地)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편지는 10월 29일자였는데, 11월 2일 황심(黃 沁) 토마스가 체포(逮捕)되었다.

황심(黃沁) 토마스는 옥에 갇힌 데에 대해 필요(必要) 이상으로 겁을 먹어, 자 기가 붙잡혔으니 어떤 교우(敎友)도 빠져나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또는 어쩌 면 자백(自白)으로 박해(迫害)를 멎게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希望)을 가지고서,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이 숨어있는 곳을 대주었다. 일이 극단(極端)에 이르면 저기를 밀고(密告)하라는

명을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에게서 받았었다고 주장(主張)하는 교우들이 많 다, 포졸(捕卒)들이 급히 배론으로 달려왔으나, 그들이 찾는 사람을 발견(發見)하 지 못하다가, 마침내 지하실(地下室) 위를 걸어 다닐 때 커다란 옹기그릇들이 내 는 둔탁한 소리가 그들의 의심(疑心)을 일으켰고, 결국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 은 발견되었다.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은 포졸(捕卒)들이 오는 것을 보고서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전에 임금이 친히 쥐었었고, 왕의 은총(恩寵)의 표시(表示)로 비단 이 감긴 손을 만지지 말라고 명하였고, 이 명은 지켜졌다.

⑩ 포졸(捕卒)들은 그를 쇠사슬로 결박(結縛)하여 서울로 데려갔는데, 그의 몸에서 옷 속 에 둘둘 말아서 지니고 있던, 그 유명(有名)한 편지(便紙)가 발견되었다. 관리(官吏)들이 어떻게 그 편지를 읽을 수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죽인다는 위협(威脅)을 받은 어떤 교우(敎友)가 그 비밀 (秘密)을 알려주겠다고 나서서, 그 제안(提案)이 수락되었다고 하지만, 이 사실은 전혀 입증(立證)되지 않았다.

어떻든 이 편지는 읽혀졌고, 조정(朝廷)을 몹시 놀라게 했다. 천주교인(天主敎 人)들을 구하기 위해, 나라 안에 서양(西洋)사람들을 불러오려는 음모(陰謀)는 명백(明白)히 드러났다. 어기에 대한 확실(確實)한 증거(證據)를 손에 쥐게 된 것 이었다.

조선정부(朝鮮政府)처럼 외국인(外國人)에 대해 그렇게도 의심(疑心)이 많고, 시기심(猜忌心)이 많은 정부로서는, 그 10분의 1만 되었어도 옥에 갇힌 사람들 을 국사범(國事犯)으로 취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⑪ 그와 때를 같이하여, 또는 아마도 황심(黃沁) 토마스기 제공(提供)한 정보(情報) 에 의하여,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의 두 동지(同志)인 옥천희(玉千禧)와 김한빈 (金漢彬) 베드로가 잡혀, 같은 옥에 갇혔다.

미구에 역관계급(譯官階級)에 속하는 사람으로, 현계흠(玄啓歆) 또는 현(玄) 「사수」라고도 하는 다섯 번째 교우가 같은 옥에 갇혔는데, 이 사람은 1846년에 신앙(信仰)을 위하여 참수(斬首)를 당하는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회장의 아버지 이다.

현계흠(玄啓歆)은 처음에는 지방으로 피신(避身)하였으나, 그의 도피(逃避)로 인하여 온 일가친척(一家親戚)이 연루되어,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하자, 그에게 자수(自首)하라는 편지를 하였던 바 그는 그대로 따랐었다.

그는 1799년, 동래(東萊) 앞 바다에 며칠 동안 정박(碇泊)하였던 외국의 선박 (船舶)위에 올라가 보고서, 그와 같은 배 한척만 있어도 조선의 전함(戰艦) 백 척(百隻) 이상을 쉽게 격파(擊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해서 비난(非 難)을 받았었는데, 이런 일은 관리(官吏)들이 볼 때, 그가 분명 음모(陰謀)에 한 몫 낀 것을 증명(證明)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옳건 그르건 간에 황사영 (黃嗣永) 알렉산델의 소송사건(訴訟事件)에 관련되게 되었다.

이 피고(被告)들은 모두가 드물게 보는 고문(拷問)을 당해야만 했는데, 모두가 그것을 영웅적(英雄的)으로 참아 견디었다. 신앙(信仰)을 배반(背反)할 마음은 한 순간도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사형판결(死刑判決)을 받았다.

황심(黃沁) 토마스의 공식 결안(結案)은 아래와 같은 바, 그 동료(同僚)들의 결 안도 비슷하다.

 

 

※ 황심(黃沁) 토마스의 결안(結案)

『10월 24일 금부죄인(禁府罪人).

황심(黃沁)은 비천(卑賤)하고 비열(卑劣)하며 사교(邪敎)에 빠졌고, 서울과 지방 을 돌아다니며, 불충(不忠)하고 상스러운 파당(派黨)을 위하여 모든 힘을 기울이 고 암약(暗躍)하였다. 그는 비밀리에 외국에 가서 서양교(西洋敎)의 이름을 받았 으며,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위하여 여러 번 여행(旅行)을 하고 그의 편지(便紙) 를 전하였다.

사교(邪敎)를 믿는 자들이 꾸민 모든 것 중에 그가 알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 었다. 그는 삶과 죽음을 걸고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과 결탁(結託)하였고, 황사 영(黃嗣永)이 법망(法網)을 벗어나기 위하여 제천(堤川)으로 간 것을 알자 일부 러 그를 만나러 갔으며, 베개를 같이 베고 누워서, 밤에 그 흉악(凶惡)한 편지 (便紙)를 제 눈으로 읽었는데, 그 편지의 잔악(殘惡)함은 고금(古今)을 통하여 하 늘 이래 비길 것이 하나도 없다. 붓으로는 그 흉악(凶惡)함을 쓸 수 없으니, 그 러한 일은 일찍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바인 까닭이다.

황심(黃沁)은 뻔뻔스럽게도 사영(嗣永)과 짜고서, 큰 배들을 불러들여 나라를 위태(危殆)롭게 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외국인(外國人)들에게 보내기로 약(約束) 하였다. 그러나 그 흉측(凶測)한 계획(計劃)은 발각(發覺)되었다. 그는 역적(逆賊) 이요 대죄인(大罪人)이다. 그를 서소문(西小門) 밖으로 끌어내어 육시(戮屍)를 하 고 참수(斬首)하라.』

⑫ 10월 24일 (11월 29일), 편지(便紙)에 서명(署名)을 하였던 황심(黃沁) 토마스는 결안(結案)대로 참수(斬首)되고 육시(戮屍)를 당하였다. 김한빈(金漢彬) 베드로는 그와 함께 형장(刑場)으로 끌려갔으나, 참수만 당하였다. 황심(黃沁) 토마스는 그 때 나이가 45세였고, 김한빈(金漢彬) 베드로는 38세였다.

11월 5일(12월 10일), 그들의 세 동료(同僚)의 차례가 왔다.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은 편지(便紙)를 쓴 장본인(張本人)이며, 악독(惡毒)하고 잔인(殘忍)한 사람으로서, 천륜(天倫)과 인륜(人倫)을 어긴 죄인으로 판결(判決)되어, 참수(斬 首)와 육시(戮屍)를 당하였다. 나머지 두 사람은 보통의 죄인처럼 참수(斬首)만 당하였다.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은 27세 밖에 되지 않았었고, 옥천희(玉千禧)는 35세 가량, 현계흠(玄啓欽)은 39세였다. 동시에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의 집과 재산 이 적몰(籍沒)되고, 어머니는 거제도(巨濟島)에, 아내는 제주도(濟州道)에, 아들 경한(景漢)은 추자도(楸子島)로 귀양을 갔는데, 경한(景漢)은 몇 해 전까지도 아 직 그곳에 살고 있었다.

※ 김귀동(金貴同)의 순교

며칠 뒤에,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을 숨겨 준 까닭에 그와 함께 붙잡혀 옥에 갇혔던 배론의 두 교우(敎友)를 재판(裁判)하였다. 한 사람은 귀양을 갔는데, 아 마도 배교한 뒤에 그리 되었을 것이고, 김귀동(金貴同)이라는 또 한 사람은 용기 를 좀 더 보였다.

김귀동(金貴同)은 내포(內浦)지방 출신으로, 천주교를 자유롭게 신봉(信奉)하기 위하여 재산(財産)과 집안과 고향(故鄕)을 버리고, 배론으로 가서 옹기를 만들어 생계(生計)를 이어나갔다.

오랫동안 고문(拷問)을 한 후, 관원(官員)은 그에게 배교(背敎)하기를 원한다면 풀어주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끝까지 거절(拒絶)하고, 다른 교우 와 같이 죽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결국 그는 고향인 홍주(洪州)읍내로 이송(移 送)되어 12월 30일(1802년 2월 2일) 참수(斬首)를 당하였다.

⑬ 불행이도 너무나 유명(有名)하고 그 결과(結果)가 매우 유감(有感)스러웠던이 사 건(事件)은 이렇게 끝이 났다.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의 흥분한 상상(想像)에서 나온 계획(計劃)이, 특히 그 시대에 있어서는 비현실적(非現實的)이었음은 명백 (明白)하다. 그것이 무모(無謀)하고 위험(危險)하였다는 것을 필자(筆者)는 기꺼 이 인정한다.

승리자(勝利者)인 노론(老論)에 대한 패배자(敗北者) 남인(南人)의 정치적인 격 정(激情)과 노여움이 외국간섭에 대한 이 호소(呼訴)에 관계가 없지 않았다는 것 도 있었음직한 일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가 바른 의향(意向)을 가지고 있었고, 교우들의 해방(解 放)과, 외교(外敎)에 대한 복음(福音)의 승리와, 지옥(地獄)에 대한 하느님의 승 리(勝利)를 특히 고려(考慮)하였음은 의심(疑心)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그를 판단(判斷)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自由)이지만, 그의 계획 (計劃)이 실려 있는 그 편지(便紙)는, 그와 피신처(避身處)의 세 동료(同僚)의 개 인적인 일이다. 그때의 교우(敎友)들은 아무도 그 편지를 알지 못하였고, 알 수 도 없었다. 왜냐하면, 날짜를 보면 그 편지가 씌어지자마자 그것을 쓴 사람들이 잡혔다는 것이 증명(證明)되기 때문이다.

조선정부(朝鮮政府)는 이 문서(文書)가 천주교인 전체(全體)의 음모(陰謀)에 대 한 분명한 증거(證據)가 된다고 주장하고, 천주교인들이 벌써 필요한 돈을 모았 으며, 많은 군사(軍士)를 모집하였다고 도처(到處)에 선전(宣傳)하였다.

⑭ 그러나 사실은 이 비난(非難)과 어긋난다. 교우들이 거둔 약소(弱小)한 금액은, 신부(神父)와 그 사환(使喚)들의 비용(費用)에 충당(充當)하는 데에도 넉넉할까말 까 하였고, 또 바로 그 편지(便紙)에서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이, 동교인(同敎 人)들이 가난하다는 말을 여러 번 한 것으로 보아, 결코 외국(外國)의 침입(侵 入)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군대(軍隊)를 모았다는 혐의(嫌疑)는 더욱 더 우스꽝스러운 것이니, 땅굴 속에 숨어있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은 10명의 무리도 만들 만한 시간(時間)과 능 력(能力)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숨어 있는 곳에서 편지(便紙)를 쓴 바로 그때에, 서양인(西洋人)들의 후원(後援)을 청할 생각을 한 것이니, 그 증거(證據) 로는 전에는 일찍이 어떤 교우(敎友)도 무력간섭(武力干涉)에 대한 말을 들은 적 이 없었던 것이다.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은 도무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니, 그 재판(裁 判)이 있던 시기에도 그렇고, 최근(最近)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이러한 혐의(嫌 疑)는 관리(官吏)들이 꾸며낸 가증(可憎)스러운 무함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 는 데에 의견(意見)을 같이 하였다.

서양선교사(西洋宣敎師) 자신들도 많은 고생을 하여 이 편지(便紙)의 진짜 사 본(寫本)을 얻은 뒤에야 비로소 그 내용(內容)을 알게 되었다.

⑮ 어떻든 빚어진 결과(結果)는 비참(悲慘)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존재(存在)하였고, 위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는 두 가지 원인(原因), 즉 천주교인들에 대한 외교인 (外敎人)들의 본능적인 증오심(憎惡心)과 당파(黨派)들 간의 원한(怨恨)에다, 그 때부터는 전자(前者)들 만큼이나 강력한 세 번째의 원인이 덧붙여졌으니, 그것은 민족독립(民族獨立)의 감정(感情)이었다.

이 이후부터는 항상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을 나라와 왕조(王朝)의 타고난 원수 (怨讐)로 보는 체하였다.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의 원수들에 의하여 교묘(巧妙)히 유지된 이 여론(與論)이, 설령 수없이 많은 박해(迫害)와 괴롭힘의 원인(原因)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큰 핑계거리는 되었다.

또한 근래에 실패(失敗)한 여러 가지 개임(介入) 움직임이 정부(政府)의 시샘 많은 공포심(恐怖心)을 더 확증(確證)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교우(敎友) 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 외에는 달리 소용(所用)이 되지 않았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황사영 백서사건-5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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