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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2. 그리스도의 어린시절(1)

[그리스도의 생애] - 2. 그리스도의 어린시절(1)


예수 수태고지(受胎告知)

모든 문명은 예외없이 과거의 황금시대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보다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 유대인의 문헌은 남자를 유혹한 여자를 통해 무죄와 행복의 상태에서 인류가 타락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만약 여자가 인류의 타락에 크게 책임이 있다면, 인류를 원상복귀시키는 데도 일익(一翼)을 맡는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잃어 버린 낙원에서 인류가 최초의 결혼식을 올렸다면, 새로운 낙원에서 인간과 하느님이 결혼식을 올려서는 안될까?

때가 되었을 때 빛의 천사가 빛의 옥좌에서 내려와 무릎 꿇고 기도하는 한 동정녀를 찾아가서 신에게 인성을 기꺼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민이 고대하는 자"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사랑이 없다면 출생도 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는 그 처녀의 말이 옳다.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사랑의 불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생명을 낳는 인간의 열정 외에 성령의 "잔잔한 열정과 격렬한 평온"이 있다. 바로 이러한 성령이 여인을 그늘지어 엠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낳으신 것이다. 마리아가 Fiat (피아트;그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응답하는 순간 천지 창조시의 Fiat Lux(빛이 생겨라)보다 훨씬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왜냐하면 지금 창조된 빛은 태양이 아니라 살을 취한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Fiat 라고 고함으로써 마리아는 여성의 역할 -인간에게 하느님의 선물을 전달하는 자-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여성이 우주의 율동과 함께 그 우주에 Fiat 라고 말할 때, 남성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 남성의 사랑에 Fiat 라고 말할 때, 성령을 받으면서 하느님께 Fiat 라고 말할 때 순종하며 그러한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다.

어린이들은 모두 항상 남성과 여성의 각별한 사랑의 열매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남녀끼리는 서로 사랑을 원할지라도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의 사랑이 열매인 어린이를 원하지는 않는 법이다. 인간적인 사랑에는 불확정적인 요소가 있다. 부모들은 태어날 아기가 아들일지 딸일지 혹은 언제 태어날지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을 한다고 항상 아이가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생겨난 후에 부모가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지, 부모가 직접 의도적으로 자식이 생기게 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수태고지 시에는 예수 아기를 예기치 않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아기를 원했다. 한 여인과 신적인 사랑의 성령이 협력하여 아이가 생기게 되었다.
Fiat 라는 말로 자발적인 동의가 이뤄졌으며, 아울러 신체적인 협력도 자유스럽게 이뤄졌다. 보통 어머니들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신체적인 변화를 통해 모성을 의식하게 되지만 마리아는 성령께서 행하시는 영적인 변화를 통하여 모성을 의식하게 되었다. 마리아는 서로를 결합시키는 사랑의 행위에서 남녀가 느끼는 희열보다 훨씬 강렬한 영적인 환희를 맛 보았을 것이다.

인류의 타락이 자유로운 행위에서 비롯되었듯이 구원도 자유로운 행위에서 나와야 했다.
예수의 수태고지란 하느님께서 실제로 자신이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피조물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어떤 음악가가 제멋대로 틀린 음을 쳤다고 가정해보자. 지휘자는 유능한 사람이고 음표는 정확히 악보에 기록되어 있으며 연주하기 쉬운 곡인데도 그 음악가는 계속 불협화음을 내고 있으며 그 음은 곧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런 경우 지휘자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즉 악보를 다시 연주하도록 명하거나 아니면 불협화음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하든 별 문제가 안된다. 틀린 음은 음속의 빠른 속도로 공간 속을 여행하고 있을 것이며 시간이 지속하는 한 우주에 불협화음이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세상에 다시 화음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그것은 영원으로부터 이 세상에 들어와서, 격렬하게 퍼져 나가는 음을 멈추게 하는 사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음표에 맞지 않은 이 음이 잘못된 음일까? 화음은 한 가지 이상음이 있기만 해도 파괴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음이 새로운 멜로디에서 기초음이 된다면 그 음을 토대로 화음이 이뤄질 것이다.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 바로 이런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최초의 인간에 의해서 발생한 도덕적 불협화음이라는 그릇된 음이 온 인류에게 영향을 끼쳤었다. 하느님은 그것을 무시할 수도 있으셨겠지만, 그렇게 하셨다면 정의에 어긋났을 것이며 그런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인류를 대표하는 한 여인에게 하느님 자신이 새로운 인간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그에게 자유롭게 인간성(人間性)을 주도록 부탁하셨다. 아담이 옛 인간성을 갖고 있었다면 그리스도는 새 인간성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 어머니의 자유로운 협력을 통하여 인간이 된 하느님이셨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났을 때, 하느님은 새로운 인류에 대한 이러한 사랑을 고지하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었으며, 마리아는 "새로운 아담이 돌보게 될 살로 둘러싸인 낙원이"되었다. 첫 번째 정원에서 하와가 파멸을 가져왔듯, 마리아는 그의 태내의 정원에서 구원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스도가 마리아 안에 은둔해 있던 9개월 동안 마리아가 섭취한 모든 음식인 밀과 포도는 자연적인 성체가 되어 그리스도에게 전달되었다. 그리스도는 나중에 자신이 생명의 빵이요, 포도주라고 선언하게 될 것이다. 마리아의 태내에서 9개월이 지난 후 그리스도가 태어날 마땅한 장소는 베들레헴이었다. 베들레헴은 "빵의 집"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 (요한 6, 33)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 35)

하느님의 아들이 잉태되었을 때 마리아의 인성(人性)은 그에게 손과 발, 눈과 귀, 고통을 당하게 될 육신을 주었다. 마치 에너지라도 흡수하는 것처럼 장미의 꽃잎들이 이슬방울을 머금듯이 신비의 장미인 마리아는 구약성서가 땅 위에 내린 이슬방울이라고 묘사한 그분을 머금었다. 마침내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낳았을 때 그것은 마치 거대한 성합(聖合)이 열린 것과 같았으며 마리아는 세상의 주인이신 위대한 손님을 손으로 받쳐들고, "보라, 이는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실 분이시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해 아이를 잉태했다는 표시를 받았다. 마리아의 손위 사촌 엘리사벳은 늙은 나이에 이미 아들을 잉태하였으며 이미 6개월째 되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비밀을 가슴에 간직한 채 며칠을 걸려 나자렛에서 헤브론 마을까지 여행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헤브론은 하느님 백성의 조상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ㅡ 의 유해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엘리사벳도 신비스럽게 마리아가 메시아를 태중에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물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루가 1, 43)

선구자의 어머니가 왕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인사하였다. 이 왕의 길을 선구자가 닦도록 되어 있었다. 아직 어머니의 태내에 들어있던 요한 세례자는 어머니의 증언을 듣고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모셔온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

이런 인사말에 대한 마리아의 화답을 마니피깟 (Manificat) 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일을 기리는 기쁨의 노래인 것이다. 마리아는 대대로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보며 뭇 백성과 모든 세대가 자기를 "복되다"고 일컬을 무한정한 미래까지도 꿰뚫어 보았다. 이스라엘의 메시아는 오시는 중이며 하느님은 바야흐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실 것이며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마리아는 아들의 속성에 대해서까지 예언하며 그는 자비와 정의가 충만한 자로 태어날 것이다고 말했다. 마리아는 권세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올림으로써 그리스도가 시작할 혁명을 환호하며 노래를 마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탄생 전 역사

마리아로부터 탄생할 주님은 출생 전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러나 이 출생 전 역사는 원시시대의 진흙이나 정글이 아니라 영원한 아버지의 품에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바위를 깍아내어 만든 마굿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베들레헴에서 혈거인(穴居人)처럼 나타나셨지만, 인간으로서는 시간상 시작이 있으나 무한한 영원 속에서 존재하시는 하느님으로서는 시작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오직 점진적으로 당신의 신성(神性)을 계시하여 주셨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신성을 의식하면서 성장한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자기가 온 목적을 서서히 알려주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성 요한은 복음서 서두에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출생전 역사를 이야기한다.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 1, 1-3)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생각에 따라 창조되었다. 모든 것은 생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모든 새와 꽃과 나무들은 신의 정신 속에 존재하는 개념에 따라 창조되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생각을 추상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의 말씀 곧 생각이 인격체로 계시된다. 지혜가 인격체가 되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생각이요 말씀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신다. 인간의 말은 마음 속에 품어졌다. 입밖에 나오면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으로부터 나왔으며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말씀을 통하여 영원한 아버지는 당신이 이해하고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하신다.

정신이 생각을 통해 스스로 대화를 나누며 이러한 생각에 의해 세상을 보고 이해하듯이 아버지는, 거울을 통해 보듯, 당신 말씀을 통해 자신을 보신다. 유한한 지성은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말을 써야 하지만, 하느님은 스스로 단 한번에 모든 것을 말씀하신다. 한 마디 말씀으로 우리가 알고 있고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꿰뚫어 보신다. 바로 이 하느님의 말씀 속에 모든 지혜의 보물과 과학의 비밀, 예술의 착상, 인류의 지식이 숨겨져 있다. 인간의 지식은 말씀과 비교해 볼 때 하잘 것 없는 단절된 음절에 불과할 뿐이다.

무한한 영원 속에서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생각이 아직 말로 표현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태양에는 광선이 없을 수 없듯, 아버지에겐 아들이 없을 수 없다. 생각하는 사람에게 생각이 없을 수 없듯, 신적인 정신은 끝없이 당신 말씀과 함께 계신다. 하느님은 영원한 시간을 혼자서만 외로이 활동하신 것은 아니었다. 하느님에게는 당신과 동등한 말씀이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요한 1, 3-5)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창조능력에 의해 존재한다. 물질은 영원하지 않다. 우주는 건축가요 설계가며 고생을 참고 어려운 일을 버티어 나가는 자인 지혜로운 인격체가 뒤를 받치고 있다. 창조는 하느님의 업적이다. 조각가는 대리석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고, 화가는 화폭 위에 그림을 그리고, 기계 기술자는 기계를 가지고 작업을 하지만, 아무도 창조할 수는 없다. 그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새롭게 조화를 이루게 할 뿐 그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창조는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각 사람의 영혼 속에 당신 이름을 새기신다. 이성과 양심은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이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를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않은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라고 말하곤 하였다. 인간은 하느님 출판사에서 나온 책과 같은 것이며, 설사 그 책에 아무 것도 써 있지 않다하더라도 최소한 저자의 이름은 표지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다. 하느님은 종이 위의 무늬와 같으며 그 위에 무얼 쓰든 그 무늬는 지워지지 않는다.

베들레헴

세상에서 제일 가는 장부정리의 도사인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티베르강가에 있는 궁전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로마 제국 세계지도 (Orbis Terrarum, Imperium Romanum) 이라는 표제가 붙은 지도 한 장이 펼쳐 있었다. 그는 세계 인구조사를 명하려는 참이었다. 모든 문명국은 로마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수도(首都)로서는 오직 하나 로마가 있을 뿐이었으며, 유일한 공식 언어는 라틴어며, 유일한 통치자는 카이사르가 있을 뿐이었다.

모든 국경지역과, 모든 지방군주와 총독에게 모든 로마의 시민들은 각자 자기 고향에서 호적 등록해야 한다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제국의 변두리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 나자렛에서도 병사들이 모든 시민은 자기 고향에 가서 등록을 해야 한다는 방을 벽에다 붙였다. 이 때문에 건축가요, 위대한 다윗 왕의 먼 후손인 요셉은 다윗의 마을인 베들레헴에 가서 등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칙령에 따라 마리아와 요셉은 나자렛 마을에서 베들레헴 마을로 길을 떠났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5 마일쯤 되는 건너편에 있다. 오백년 전에 미케아 예언자는 이 작은 마을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였다.

유대의 땅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유대의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영도자가 너에게서 나리라고 하였습니다. (마태오 2, 6)

고향에 들어섰을 때 요셉은 아주 기대에 차 있었으며, 특히 마리아는 아기를 가진 몸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숙소를 마련해 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요셉은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모두가 만원사례였다. 결국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그 분이 탄생할 수 있는 자리를 찾지 못했다. 창조주가 피조물 가운데서 자리를 찾지 못하시다니 그럴 수도 있을까? 요셉은 가파른 언덕을 따라 문간에 가로질러 있는 줄에 매달려 희미한 등불이 흔들거리고 있는 데까지 올라갔다. 이곳은 마을 여관이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기서만은 은신처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그곳에는 잔악하게 유대 백성을 굴복시킨 로마 병사들을 위해서나, 부유한 동방거상(巨商)의 딸들이나, 왕궁에 사는 비단옷을 걸친 자들을 위한 방은 많이 있었다. 사실 여관 주인에게 돈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방을 얻을 수 있었지만 막상 세상에 집 없는 모든 사람을 위해 여관이 되고자 오신 그분을 위해서는 방이 없었다. 마침내 역사의 두루마리에 최후의 한 자 까지 기록이 끝났을 때 가장 슬픈 한 구절이야말로 "여관에는 방이 없었다" 는 말일 것이다.

마침내 마리아와 요셉은 양치기들이 가끔 폭풍이 몰아칠 때 양들을 몰고 들어가는 언덕받이 동굴 마굿간으로 은신처를 찾아 나섰다. 외따로 버려져 있으며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동굴 안에서 평화스런 은신처를 찾았다. 세상 맨 밑바닥에서 천상에서는 어머니없이 태어난 그분이 지상에서는 아버지없이 태어나신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어린이들은 모두 엄마를 닮았다고들 말하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어머니가 아이를 닮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어머니를 창조한 아이에 대한 멋있는 역설이다. 어머니도 어린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상이 생긴이래 처음으로 누구나 천국은 "저 높은 어떤 곳"이 아닌 다른 아무데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 아기가 마리아의 품에 있을 때 마리아는 천국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장소인 마굿간에서 정결 자체이신 분이 태어나셨다. 나중에 동물처럼 날뛰는 사람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될 그분이 동물들 가운데서 탄생하셨다.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빵"이라고 일컬을 그분이 글자 그대로 먹이를 먹는 곳인 구유에 뉘여 계신다. 수세기 전 유대인들은 황금 송아지를 경배하였으며, 그리스도인들은 당나귀를 숭배하였다. 사람들은 마치 하느님을 경배하듯 그들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이제 황소와 나귀가 무죄한 보상을 하기 위해 이곳에 참석하여 그들이 하느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다.

여관에는 방이 없었지만 마굿간에는 방이 있었다. 여관이란 여론을 듣는 장소요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장소며, 속세인들이 만나는 곳이요 인기인들이나 성공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다. 그러나 마굿간은 추방자들, 무시받는 자들, 잊혀진 자들이 찾는 장소다. 세상 사람들은 혹시라도 하느님의 아들이 태어난다면, 여관에서 태어나실거라고 기대했을런지는 모르지만 어느 누구도 마굿간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태어나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 계신다.

누군들 이런 일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태양을 만들어 지구를 따뜻하게 하실 수 있던 분이 언제나 황소나 나귀의 입김으로 추위를 면하게 되리라고, 성서의 표현을 빌리면, 대각성(大角星)의 회전을 정지시킬 수 있었던 분이 제국의 인구조사에 따라 자신의 출생지를 지정받게 되시리라고, 들판을 잔디로 옷입혀주신 분이 정작 당신은 벌거벗게 되실 줄이야, 자기 손으로 별과 세상을 빚으신 분이 가축의 큰 머리를 만질 정도로 되지 못하는 조그만 손을 갖게 되리라고는, 끝없는 언덕을 딛고 있던 발이 언젠가 너무도 약해져서 걷지도 못하게 될 줄이야, 영원한 말씀이 벙어리가 될 줄이야, 전능하신 분이 아기 포대기에 둘러 싸이실 줄이야, 구원이 구유에 있을 줄이야, 보금자리를 만든 새가 그 안에서 부화될 줄이야, ㅡ그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찾아오시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무기력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2. 그리스도의 어린시절(1)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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