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2. 그리스도의 어린시절(4)

[그리스도의 생애] - 2. 그리스도의 어린시절(4)


동방 박사와 무죄한 어린이의 학살자

시므온은 그리스도 아기가 이방인의 빛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는데, 이방인들은 벌써 이 빛을 만나려 길을 떠났다.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는 동방의 과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동방박사들이 곁에 있었으며, 그리스도가 죽을 때에는 서방의 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인들이 곁에 있었다.

시편 작가는 동방의 왕들이 임마누엘께 경의를 바치러 오리라고 예언하였다. 그들은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 와서 헤로데에게 왕이 어디서 태어나느냐고 물었다.
예수께서 헤로데왕 때에 유대베들레헴에서 나셨는데 그 때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오 2, 1-2)

그들을 인도한 것은 별이었다. 하느님은 자연과 철학자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말씀하셨으며, 유대인들에게는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이제 메시아가 올 시간이 무르익었으며, 온 세상이 그것을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은 천문학자였지만, 별에 대한 지식 속에 남아 있는 희미한 진리에 의해 야곱의 별에 도달하였듯이 아테네인들이 섬기던 "미지(未知)의 하느님"을 보고 바오로는 그들이 모르면서도 어렴풋이 기대하던 하느님을 그들에게 설파하였다. 별을 숭배하는 나라에서 왔지만 그들은 그러한 별을 만드신 분 앞에 엎드려 예배함으로써 그들의 종교를 버렸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을 성취한 이방인들은 "땅 끝에서 그리스도를 뵈러 왔다." 헤로데에게 왕의 탄생지에 대해 묻는 동안 사라졌던 별이 다시 나타나서 마침내 아기가 태어난 곳 위에서 멈췄다.

이를 보고 대단히 기뻐하면서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리고 보물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마태오 2, 10-11)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었다.

큰 낙타 떼가 너의 땅을 뒤덮고 미디안과 에바의 낙타들이 우굴거리리라.
사람들이 스바에서 찾아오리라. 금과 향료를 싣고, 야훼를 높이 찬양하며 찾아오리라.(이사야 60, 6)

그들은 세 가지 예물을 가져왔다. 그리스도의 왕권을 기리는 황금과,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기리는 유향과 죽음을 맞게 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기리는 몰약 이 세 가지 예물이었다. 몰약은 그리스도를 장사지낼 때 사용하였다. 구유나 십자가에는 둘다 몰약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동방박사들이 예물을 가지고 동방에서 왔을 때 헤로데 대왕은 유대인들에게 분명하게 예언된 왕이 탄생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방인들이 고대하는 것을 보고 어렴풋이 우려하고 있었다. 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처럼 그는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태어날 왕은 정치적 왕일거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태어날 장소에 대해 알아보았다. 대제사장과 학자들은 "유대아에 있는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하고 답변하였다. 헤로데는 자기도 그리스도 아기를 경배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보면 "만약 이 아이가 메시아라면 그를 죽이고 말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대중하여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마태오 2, 16)

헤로데는 종교를 탐구하면서도 그가 얻은 지식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자들의 영원한 모델이 될 것이다. 열차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려주는 안내원처럼 그들은 모든 역 이름을 알고 있지만 한 번도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머리로 배운 지식은 의지와 올바른 행동이 따르지 않는 한 무용지물이다.

전체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는 국가의 적이다고 즐겨 말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적을 일컫는 완곡한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헤로데는 첫 번째 전체주의자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두 살이 되기도 전에 자기 적이라고 생각했다. 동굴 속에서 비천하게 태어난 아기가 절대 권력자들이나 왕들을 뒤흔들어 놓을 수가 있을까? 아직까지도 그를 따르는 군중이 한 명도 없는 이 아이가 국민이 지배하는 민주주의의 위험한 적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아기도 그토록 포악한 정부의 폭력을 불러일으킨 적은 없었다. 소련의 쟈르 황제는 구두공의 아들인 스탈린이 두 살이었을 때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언젠가 그가 전세계에 위협적인 인물이 되리라 걱정해서 구두공의 아들을 축출하거나 그의 어머니를 귀양보내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아기 히틀러의 머리를 노리는 칼도 없었으며, 모택동이 강보에 싸여 있을 때, 언젠가 중국을 공산화시킬까 두려워 정부가 그를 처벌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왜 이 아이 때문에 병사들을 소집하였을까? 그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는 자들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하느님에 대해 본능적으로 미움과 시기심을 감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 헤로데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보여 주었던 증오는 그 아비 헤로데 대왕이 그리스도 아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증오를 그대로 닮은 것이었다.

헤로데는 천상의 왕관을 가지러 오신 그리스도가 자기의 황금 왕관을 빼앗아 가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는 예물을 가지고 가고 싶은 척 했지만, 정작 그가 가지고 가고 싶은 예물은 죽음 뿐이었다. "나는 독실한 신자지만…" 하면서 사악한 인간들은 종종 신앙을 빙자하여 자신의 악한 의도를 감춘다. 사람들은 두 가지 이유, 즉 경배하기 위해서 아니면 해를 끼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탐구할 것이다. 헤로데가 동방박사들을 이용했듯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악한 목적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자들도 있다. 종교를 알아 본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결과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무엇을 묻느냐가 아니라 왜 그러한 질문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두 살이 되기 전에 그리스도 때문에 피흘림이 있었다. 이것이 그의 목숨을 노리는 첫 번째 시도였다. 아기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칼이 있었고 어른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돌이 있었으며 결국은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당신 백성이 그에게 한 대접이었다. 베들레헴은 갈바리아의 여명이었다.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희생의 법칙이 이 어린 생명들을 앗아가면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 어린이들은 무죄한 어린이 대축일날 성대히 기념되고 있다.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야고보는 낭떠러지에서 떠밀려 죽었고, 바르톨로메오는 칼로 죽었으며, 요한은 기름 가마 솥에서 오래 있다 죽었으며, 바오로는 칼로 죽고 베들레헴의 무죄한 어린이들도 칼로 죽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인장으로 봉인된 자들에게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고 약속하셨다. 이 어린이들은 전혀 알지 못한 왕을 위하여 죽은 것이다. 그들은 어린 양들처럼 하느님의 어린 양을 위해 죽었으며 이러한 죽음은 앞으로 이어질 수많은 순교자들의 원형(原型)이 된다.

이 어린이들은 그들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지만 영광을 받았다. 할례 때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를 흘렸지만, 이제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사람들이 피를 흘리기 시작한다. 할례가 구약의 표시이듯이 박해는 신약의 표시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내 이름 때문에" 그들이 미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와 과련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말해 준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으러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태어난 마굿간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는, 에집트에 살던 유대인들의 문설주에 피가 묻어 있었듯이, 피로 표시되어 있었다. 지난 수세기 동안 과월절에는 티없는 어린 양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피를 흘렸지만, 지금은 흠없는 어린이들이 어린 인간의 양들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피흘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동방박사들에게 주의를 주셨다.
박사들이 물러간 뒤에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하고 일러 주었다. (마태오 2, 13)

선의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그 누구도 그가 왔던 같은 길로 돌아가는 법이 없다.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했던 그의 계획이 좌절되자 화가 난 폭군은 두 살 이하되는 사내 아이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산아제한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음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가 맡게 될 십자가를 받아들일 각오가 이미 되어 있었지만 아직 의식이 낮은 요셉은 천사의 계시가 필요하였다. 천사는 그에게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를 가라고 명한다.

귀양살이는 구세주의 운명이 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박해를 피해 조국을 떠난 수많은 망명자들은 고향을 잃어 버리고 필사적으로 도주해야 하는 고통을 이해해 주는 하느님이 없었을 것이다. 에집트에 계심으로, 아기 구세주는 대대로 당신 백성의 원수였던 나라를 축성해주셨으며, 나중에 당신을 배척하게 될 다른 나라에 희망을 주셨다. 그리스도 아기가 에집트를 임시 고향으로 삼음으로써 출애굽이 거꾸로 이뤄졌다.

마리아는 미리암처럼 노래를 불렀으며, 그 동안 보호자 요셉은 모든 사람이 열망해 오던 살아있던 빵을 호위하였다. 헤로데가 무죄한 어린이를 죽인 것은 파라오가 히브리 어린이를 학살한 것을 상기시켜주며, 헤로데가 죽었을 때 일어난 사건은 원래의 출애굽 사건을 상기시켜 준다. 헤로데대왕이 죽었을 때, 천사가 요셉에게 갈길을 제시해주며 갈릴레아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그리스도는 갈릴래아에 돌아와 정착함으로써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한 예언이 성취되었다.

아기의 부모는 주님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자기 고향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루가 2, 39)

"나자렛 사람" 이라는 말은 멸시하는 말이었다. 이 조그만 마을은 산기슭에 나있는 간선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산봉우리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상인이나 로마 군대들, 세파에 닳고 닳은 사람들이 그 곳에 가기를 두려워 하였다. 이 마을은 고대 지리학 책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 마을은 나무 그루터기에서 자라나는 새싹 곧 "새순"이었기 때문에 거론할 만한 이름이 되었다.

수세기 전에 이사야는 "가지"나 "새싹" 또는 "새순" 이 민초(民草)들 가운데서 자라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러한 새싹은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무시하였지만, 이 싹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이처럼 멸시를 받는 마을에 거처를 정하였기 때문에 무명인(無名人)과 불명예가 그리스도 자신과 그 제자들을 계속 괴롭히게 되었다. "나자렛" 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주장을 비웃으며 무시하는 "반대의 표징" 위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머리 위쪽에 못질해서 매달 게 될 것이다. 그 전에 나타나엘에게 필립이 이렇게 말했을 때,

그가 나타나엘을 찾아가서 "우리는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을 만났소.
그분은 요셉의 아들 예수인데 나자렛 사람이오." 라고 말하였다. (요한 1, 45)

나타나엘은 이렇게 반박했다.

그러나 그는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물었다. 그래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권하였다. (요한 1, 46)

사람들은 종종 대도시에서는 온갖 지혜를 다 발견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조그만 마을은 낙후되고 발전이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탄생지로 보잘 것 없는 베들레헴을 선택하셨고, 당신의 어린시절을 보낼 장소로는 놀림을 받는 나자렛을 선택했으며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장소로는 영광스러운 세계적인 예루살렘을 선택하셨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은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부터 무슨 구원이 올 수 있겠는가?" 라는 빈정거림의 서두에 지나지 않는다.

나자렛은 그리스도에게 굴욕의 장소요 갈바리아의 골고타를 대비하는 훈련장이 될 것이다. 나자렛은 갈릴래아에 있었으며 갈릴래아 전체는 교양있는 유대인의 눈에는 천한 지역으로 보였다. 갈릴래아 말투는 거칠고 퉁명스러웠기 때문에,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을 때, 하녀까지도 그의 말투를 보면 그가 갈릴래아 사람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할 정도였다. 따라서 아무도 갈릴래아 인을 스승으로 삼으려하지 않았으나 세상의 빛이신 이 분은 갈릴래아 인이었다. 하느님은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여 스스로 잘났다고 뻐기는 자들을 무안하게 만드신다.

나타나엘의 말은 인류의 역사처럼 오래된 고약한 편견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사람과 그의 가르치는 능력을 그의 출생지를 보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세속적인 지혜는 모두가 예상하는 곳 즉 베스트셀러 책이나 "표준 상품" 이나 대학교에서 나온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나온다. 나자렛이라는 불명예가 나중에 그리스도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청중들은 이렇게 비웃곤 했다.

유다인들은 "저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렇듯 아는 것이 많을까?" 하고 기이하게 여겼다. (요한 7, 15)

이 말은 그의 가르침에 대해 마지못해 보내는 찬사였지만, 그가 "오지(奧地)의 마을에서 태어난 것에 대한 비아냥거림이기도 했다. 그가 어떻게 그런 지식을 얻었을까? 그들은 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즉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배우거나 독학하거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았듯이 그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배우지도 않은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머니와 마을 회당에서 배웠지만, 그러한 지식의 비결은 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하나라는 사실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순종과 성전에서 찾은 아이

예수가 열 두 살이 된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과월절에 그의 부모는 예수를 데리고 다른 나자렛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율법에 의하면 모든 유대 남자는 삼대명절, 즉 과월절과 오순절, 장막축일을 지켜야 했다. 그리스도가 성전에 올라갔을 때는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유대 율법 규율을 지켰을 것이다. 세 살 때 예수는 술이 달린 옷을 받았으며, 다섯 살 때는 어머니의 지도아래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일부 율법을 배웠으며, 열 두 살 때는 유대인들이 매일 기도를 외울 때 쓰는 성구함(聖句函)을 쓰기 시작했다. 나자렛에서 예루살렘 성도(聖都)까지 나있는 좁은 길을 따라 여행하는 데는 며칠이 걸린다. 다른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성전 벽이 맨 처음 눈에 띄었을 때 부르던 시편 121편을 노래하며 행렬하였을 것이다.

요셉은 빠스카 양을 죽이기 위해 틀림없이 성전으로 갔을 것이다. 예수도 성전 의식에 참여할 수 있는 법적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상처에서 흘러나온 어린 양의 피를 제단 기슭 사방에다 뿌리는 것을 지켜 보았다. 다시 한 번 그의 눈 앞에 십자가가 어른거렸다. 예수는 죽은 양으로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죽은 어린 양은 율법에 따라 나무 꼬챙이 두 개를 몸통에 찔러 저녁 준비를 하였는데 꼬챙이 하나는 가슴팍에 꽂았기 때문에 어린 양은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모습을 하였다.

의식이 다 끝난 후 남자와 여자는 따로 무리를 지어 떠나고 밤에 다시 만났다. 그러나 소년 예수는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예루살렘에 그냥 남아 있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순례객들 틈에 끼여 있겠거니 생각하며 하루 길을 간 후에 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해서 예수는 삼일 동안 "행방불명" 이 되었다. 예수의 유년기를 쭉 살펴볼 때 "반대" 와 "칼" , "빈 방이 없음" , "귀양살이" , "학살" 같은 단어들을 들어 보았는데 이제는 "잃어 버렸다" 는 말까지 나왔다.

이 삼일 동안 마리아는 죄 때문에 생긴 결과의 하나인 하느님을 잃어 버린 것을 알 게 되었다. 마리아는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잃어 버렸을 때 죄인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외로움과 어둠과 고독을 알 게 되었다. 그것은 성스러운 숨바꼭질이었다.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이었기에 마리아는 예수를 찾았지만, 예수는 구원 사명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를 떠나 성전으로 간 것이다. 마리아는 에집트에서 육체적인 어둔 밤을 지냈지만 예루살렘에서는 영혼의 어둔 밤을 지내게 되었다. 어머니들은 십자가를 질 각오들이 되어 있어야 한다.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가 되는 특권을 받았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값비싼 희생을 치뤄야 될 것이다. 나중에 마리아는 성 금요일부터 성토요일까지 삼일 동안 다시 예수를 잃어 버리는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예수를 잃어 버리는 것은 하나의 준비 과정이었다.

그리스도는 항상 예상 외의 장소에서 만나게 된다. 동방박사들은 구유에서 그리스도를 만났고, 사도들까지도 우습게 본 작은 고을에서 그리스도는 자라났다. 예수의 부모는 뜻밖에 성전에서 그를 찾았다. 그들은 삼일이 지난 후에야 그리스도를 찾았듯이, 갈바리아에서 돌아가신 후 삼일째 되는 날 마리아는 예수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성전은 하늘의 작은 모령이요 형상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성전에 굉장한 매력을 느꼈다.

성전 안에는 학교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많은 랍비들이 가르치고 있었다. 신사다운 힐렐 (Hillel)은 아마 그 당시에 살아있었을 것이며, 성전에 있으면서 예수와의 토론에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 가말리엘의 나이는 예수와 같은 나이 또래였을 것이다. 안나는 그 당시 대제관으로 갓 임명되었으며, 토론 장소에 없었더라도 분명히 예수에 대해서 들었을 것이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를 찾은 곳이 바로 이 랍비 학교였다.
그리고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능과 대답하는 품에 경탄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예수를 보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고 말하였다. (루가 2, 47-48)

예수가 박사들 가운데 앉아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학생으로서가 아니라 교수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부 외경(外經)에 기록된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이 장면에 대한 복음서의 표현은 자제되어 있다. 2세기경에 나왔으며 공인된 복음서에 속하지 않는 도마 복음서는 이 당시에 주께서는 교수로 가르치셨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 후 시기에 나온 아라비아 복음서는 형이상학이나 천문학을 가르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계시를 받은 복음서는 우리 주의 생애를 묘사할 때 극히 신중하게 항상 표현을 자제하고 있다.

부모는 예수가 학자들과 토론하는 학식에 어안이 벙벙하였을 것이다. 시편 작가는 예수가 하느님에 대한 증거를 공부했기 때문에 그의 스승들보다 더 깊은 지식을 갖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보통 어머니들은 아들이 그렇게 빨리 어른으로 성장해서 자기의 개인적인 인생의 목표를 주장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예수의 부모도 놀랐을 것이다.

아버지의 권한이 절대적인 나라에서 양부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마리아의 질문 속에 동정 탄생이 암시되고 있다. 마리아의 질문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보다는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을 더 강조하는 것 같다. 마리아가 "너의 아버지와 내가"라고 하면서 부성에 대해 한 마디를 덧붙임으로써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훨씬 강하게 구별되고 있다.

예수는 지상에서 존경하는 아버지와 영원한 아버지를 명확히 구분지어 말한다. 이 답변으로 그의 인생은 갈림길에 들어선다. 그렇다고 예수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효도를 드리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는 즉시 부모에게 복종했다. 그러나 이제 부모들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복음서에 기록된 첫 번째 예수님의 말씀이며 의문문의 형식을 띄고 있다.
그러자 예수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루가 2, 49)

이 말은 "너의 아버지와 나" 라는 마리아의 말에 대한 명확한 의사표시였다. 예수는 자기가 아버지의 일을 하려고 함을 모르냐고 어머니에게 물었을 때 그것은 마리아가 천신의 수태예고를 듣고 알 게 된 것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루가 1, 35)

예수는 어머니와 자기의 관계를 가나 혼인잔치에서 다시 밝히게 된다. 여기서 예수는 양부와의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였다. 예수는 신적인 부성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부성(父性)을 주장함으로써 육체적인 부성을 끊어 버렸다. 가나에서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보시고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2, 4)

그 당시에는 육에서 나온 모성이 다른 모성을 암시하였듯이 이제 예수는 요셉이 행사하던 것과는 다른 부성을 암시한다. 요셉은 복음서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성전에서 주님은 양부의 권한에서 독립하였듯이, 나중에 가나 혼인잔치에서는 어머니의 권한에서 독립하신다. 예수의 최상의 임무는 구세주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세상의 보호자인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도 구세주가 되는 길에 속한다.

예수는 어머니나 양부가 알고 있어야 될 역사상의 어떤 일, 즉 자기가 있을 곳에 당연히 있음을 뒷받침 해주는 어떤 일이 있음을 넌지시 말하면서 부모들에게 자기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제 아버지의 집에 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하였다.

예수는 아버지의 성전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 말은 복되신 주께서 일생을 통해 여러 차례 "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신 것 가운데 첫 번째 표현으로써 이는 자신이 대속물(代贖物)이 되도록 명령을 받았으며 순종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주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해야만 한다." 는 단어를 쓴 것은 아들은 순종한다는 것을 뜻하였다. 주님은 열두 살 때 인간으로서는 고역스럽게 보이는 뭔가를 위해서 마음을 가다듬었으며, 그의 본성 전체는 신적인 "해야 할 일"을 완수하는 데 몰두하였다.

예수께서 아버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의식이 점차적으로 발전했다는 그릇된 가정을 일소시켜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열두 살 먹은 소년 예수가 자신의 신비스러운 기원과 아버지의 특별한 양육, 그리고 하느님과 자신이 일치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암시해주는 이 성서 본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인생을 좌우하는 신적인 구속(救贖)을 벌써 철저히 깨닫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자주 "해야 한다"는 단어를 쓰셨다.

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해야 한다.
나는 너의 집에 머물러야 한다.
나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인자는 많은 고통을 당해야 한다.
인자는 높이 들어 올려져야 한다.
인자는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 고통을 당해야 한다.
인자는 다시 부활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항상 명령을 받고 있는 사람처럼 말하였다. 유전이나 환경, 가문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는 열 두 살 소년은 자기는 하늘의 사명을 받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는 왜 자기를 찾느냐고 부모에게 물었다. 예수께서 놀라신 것은 당신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해명을 부모까지도 요구했다는 것이다. 신적인 사랑의 명령이 예수님의 "나는~해야 한다." 는 말 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성전에서의 소년과 십자가 상에 "높이 들려야만 한다." 고 말하게 될 인자(人子)하고는 근본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분은 구원하시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죽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에게 효성스럽게 순종하는 것은 인간을 가엾이 여기는 연민 때문이었다. 그의 죽음은 비극이 아니다. "인자는 반드시 3일 후에 다시 부활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계획은 서서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계시 되었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자기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점진적으로 계시받거나 새롭게 이해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성전에서 삼일을 지낸 마지막 날의 아버지의 일은 무덤에서 삼일을 지낸 마지막 날의 아버지의 일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유년기에 발생했던 모든 사건처럼, 이 사건도 십자가의 사명을 증거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살기 위해 태어나지만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일, 곧 죽음으로써 구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 처음으로 기록된 이러한 말들은 수난의 꽃봉오리처럼 보인다. 부활 주일날 마리아는 성전에서 다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여기서의 성전은 영광스럽게 된 그의 육체를 말한다.

십자가가 자기 아들에게 닥치기도 전에 벌써 칼이 마리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벌써 칼로 찌르듯 이별의 아픔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극심한 고뇌의 외침을 발할 것이다. "내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 저를 버리셨습니까?" 그러나 마리아는 그리스도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성전에서 잃어 버리고 이런 고통의 외침을 발하였다. 영혼을 파고드는 가장 아픈 고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서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셨다. 피조물은 서로 겉으로만 상처를 줄 수 있을 뿐이지만 하느님의 정화의 불꽃은 양날을 가진 칼처럼 영혼을 파고 든다.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생애를 대비해서 마리아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켰다. 그의 인성은 삼일 낮 동안, 아니면 보다 나은 표현으로써 삼일 밤 동안 당신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마리아로부터 감추심으로 가르침을 주셨고, 그리스도의 신성은 아버지께서 그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하늘에 일을 하도록 ㅡ 이 일은 인간의 죄의 빚을 갚음으로써 인류에게 공개될 것이다 ㅡ 하셨음을 선포함으로써 마리아에게 가르침을 주셨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2. 그리스도의 어린시절(4)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