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2. 그리스도의 어린시절(2)

[그리스도의 생애] - 2. 그리스도의 어린시절(2)


하느님은 항상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 계신다.

모든 그림은 화가의 머리 속에서 나온 창작물이기 때문에 화가에게 있어 화실은 자기 집이나 마찬가지며, 조각품은 조각가의 손에서 나온 작품이기에 조각품은 조각가에게 너무도 친숙한 것이며,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포도나무는 포도농부에게 더 없이 친숙한 것이며, 자녀들은 아버지가 낳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아무런 스스름이 없다면, 세상을 만드신 그분에게 세상은 당연히 친숙한 곳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들 말할 것이다.

화가가 자기 화실에 들어가듯, 아버지가 자기 집에 들어가듯, 그렇게 자유스럽게 그분도 이 세상에 오셔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 가운데 오신 창조주께서는 피조물로부터 무시를 당하셨으며, 하느님은 당신 백성 가운데 오셨지만 냉대를 받으셨으며, 자기 집에 오셨으면서도 집없는 자가 되셨다. 이런 것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이 아기가 전혀 하느님이었을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을 보지 못한 것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 계신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은 당신이 만든 세상에 뒷 문으로 들어오도록 초대를 받으셨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분은 땅 속, 즉 유사이래 맨 처음 혈거인(穴居人)으로 태어나셨다. 동굴 속에서 하느님의 아들은 세상을 그 밑바닥까지 뒤흔들어 놓으셨다. 동굴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그분을 뵙고자하는 자는 필히 허리를 구부려야 한다. 허리를 구부리는 것은 겸손의 표시이다. 교만한 자들은 허리를 구부리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놓쳐 버린다. 그러나 자아를 꺽고 들어간 사람들은 자기들이 있는 곳은 동굴이 아니라, 아기가 손 안에 세상을 떠받치고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새로운 우주라는 사실을 알 게 될 것이다.

구유와 십자가는 구세주의 생애 가운데 두 개의 극단을 이루고 있다. 구세주는 여관에 방이 없었기 때문에 구유를 받아들이셨으며, "이 사람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지 않겠다" 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다. 이 세상에 들어오실 때는 나몰라라 냉대를 받으시고, 세상을 떠나실 때는 배척을 받으신 구세주께서는 태어나실 때는 낯선 사람의 구유에 누이셨으며, 돌아가실 때는 낯선 사람의 무덤에 누이셨다. 베들레헴에서는 황소와 나귀가 구세주의 요람을 감싸고 있었으며, 갈바리아산 위에서는 두 도둑이 십자가의 양 옆에 있었다. 구세주는 태어나실 때 포대기로 둘러싸여 계셨으며, 무덤 속에서도 포대기에 둘러 싸여 계셨다. 이 포대기는 주께서 인간의 형상을 취하셨을 때 그의 신성에 가해진 제약을 의미한다.

근처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동들은 천사의 말을 듣는다.

"너희는 한 갓난 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하고 말하였다. (루가 2, 12)

구세주는 이미 십자가를 지고 계셨다. 그것은 아기로서 질 수 있었던 유일한 십자가, 즉 가난과 추방과 제약의 십자가였다. 베들레헴 언덕에서 천사들이 노래한 메시지 속에 이미 구세주의 희생적인 의도가 밝히 드러났다.

"오늘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루가 2, 11)

탐욕은 구세주의 가난으로 이미 도전을 받고 있으며, 교만은 마굿간의 굴욕에 의해 도전을 받고 있다. 아무런 제한도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신적인 능력, 그분을 포대기로 감싸는 것은 권력만을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너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된다. 그들은 하느님의 겸허하심을 이해하지 못하며 당신의 가난을 통해 우리가 부유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 부자가 가난하게 될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받게 될 신성(神性)의 표징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구세주 아기가 전혀 아무런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뿐이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리라고 했으면서도 지금은 이 땅의 천조각으로 둘러싸여 있는 구세주 아기의 가련한 모습 외에 다른 표징은 없을 것이다.

천사들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일컬은 분이 우리 모두가 태어났던 진흙 속에 내려오시어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점에 있어서 약하고 타락한 인간과 하나가 되셨다. 바로 이분의 "표징"이 되는 것은 포대기다. 전능하신 분이 번개를 가지고 오셨다면 아무런 표징도 없었을 것이다. 무언가 자연과 상반되는 것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표징도 없는 것이다. 빛나는 태양은 아무런 표징도 되지 않지만 태양이 빛을 잃는 것은 표징이 된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당신이 오시기 전 "태양의 징표"가 먼저 일어나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그것은 빛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뜻할 것이다. 베들레헴에서 하느님의 아들은 빛을 감춰 버리심으로 마음이 겸손한 자들만이 그분을 알아 볼 수 있게 하셨다.

두 부류의 사람만이 아기 주님을 알아 보았다. 즉 목자들과 동방박사들로서 그들은 순박한 사람들과 학식있는 사람들,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자기가 다 아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은 독선적인 식자(識者)의 눈에는 결코 보이시지 않으며,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신다. 교만한 자의 마음은 하느님도 어찌 하실 수가 없다. 오로지 겸손한 자들만이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카릴 하우셀란데르(Caryll Houselander)가 말한 것처럼 "눈송이가 우주의 본질을 말해주듯 베들레헴은 갈바리아의 본질을 말해준다." 카릴은 똑같은 생각을 표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벽 틈바구니에서 핀 꽃을 완전히 안다면 "하느님과 인간이 무엇인지" 알 게 될 것이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원자는 그 안에 태양끼리 신비를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의 일생에 그림자를 던지며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기보다는 십자가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으며, 거꾸로 그의 탄생에 십자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보통 사람들은 아는 세계에서 미지 (未知)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며 그들의 힘을 초월한 세력에겐 굴복한다. 여기서 "비극"이라는 것이 나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는 세계에서 아는 세계를 향해 나아갔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신 이유, 즉 "예수"나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 와서, 그가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즉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나아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생에는 비극이란 없었다.

왜냐하면 비극이란 예측할 수 없으며, 통제할 수 없으며 숙명적인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암흑과 구원 받을 수 없는 죄가 있을 때의 현대 생활은 비극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아기는 통제할 수 없는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았으며 빠져나갈 틈이 없는 운명의 쇠사슬에 복종하지도 않았다. 그리스도 아기 안에는 원자와 같이 골고타 위의 대우주적 십자가를 요약하고 있는 소우주적 구유라는 "본질"이 자리하고 있었다.

첫 번째 강림에서 그리스도는 예수 곧 "구세주"라는 이름을 취하셨지만 두 번째 강림하실 때는 "심판관"이란 이름을 취하실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이름이 아니었다. 예수라는 이름은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결합된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플라톤이 가르쳤다"고 말하듯이 "예수께서 가르치셨다"고 말하지만, 예수의 이름은 "죄에서 구해주시는 구세주"라는 뜻임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는다. 일단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이름을 받아들이자 갈바리아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일부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요람 위에 드리워진 십자가의 그림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짓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그의 이름을 짓는 것은 "그의 아버지의 일"이었다. 그밖에 모든 것은 거기에 따르는 부수적인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유사이전 사실이 역사가 되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순수하고 거룩한 신성(神性)이 부패에 물들지 않고 개혁의 원리로서 타락한 아담의 족보 속에 들어왔다. 동정녀로부터 탄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역사 속에 있는 악에 예속되지 않고 인간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게 되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 1, 14)

베들레헴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어 하느님과 인간이 여기에서 만나 서로 얼굴을 마주하였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육신을 취하였을 때, 아버지께서 인간의 육신을 준비하시고 성령께서 모양을 만드셨으며 성자께서 그것을 취하셨다. 아버지의 품 속에서 영원한 세대를 누리고 있던 그분이 시간 속에서 일시적인 세대를 누리게 되셨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그 분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태어나기 위해 오셨다. 베들레헴에서 수 천번 태어나신다하더라도, 그분이 사람들 안에서 다시 태어나지 못하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분을 맞아 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요한 1, 12)

이제 인간은 아담처럼 하느님을 피해 숨을 필요가 없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됨으로써 더 완전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느님으로서의 속성도 결코 잃으신 것이 아니었다.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팔 안에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숨어있고, 그의 심장의 박동 속에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이 뛰고 있으며, 그의 눈동자 속에는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심이 담겨 있었다. 이제 하느님은 사람이 되시어 나타나셨다. 이것이 바로 화신(化身)이라는 것이다. 권능, 선, 정의, 사랑, 미 등을 총망라하는 신적인 속성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 우리 주께서 활동하시고 말씀 하셨을 때 그분을 보거나 듣고 만져본 사람들에게 완전한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셨다. 나중에 그리스도는 필립보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 (요한14, 9)

어느 누구도 자기 팔로 껴안을 수 없으면 아무 것도 사랑할 수가 없다. 우주는 너무 크고 방대하다. 그러나 일단 하느님이 아기 그리스도가 되어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계시자 사람들은 "이분이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인간 본성을 취하시어 당신과 하나되는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을 주심으로써 인간 본성은 품위있게 고양되었다. 이러한 일치는 사실이기에 원래 인간적인 그의 모든 행동과 말, 모든 고뇌와 눈물, 모든 사고와 추론과 결심과 정서는 동시에 영원한 하느님의 아들의 행동과 말, 고뇌와 눈물, 사고와 추론, 결심과 정서가 되었다.

화신(化身)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본성, 즉 신성과 인간성이 두 본성을 관장하는 한 위격 안에서 결합된 것을 가리킨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에 힘든 것은 아니다. 극히 낮은 차원에서 두 가지 전혀 다른 실체, 즉 물질과 비물질, 육체와 영혼이 단일한 인간 인격체의 섭정통치 아래 하나로 결합한 표본 외에 인간이 무엇이겠는가? 육체와 정신의 힘의 수용능력만큼 서로 거리가 먼 것이 있겠는가? 육체와 정신이 결합되기 이전에는 영혼과 육체가 단일 인격체 안에 한 순간이라도 결합되어 있을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제 영혼과 육체는 긴밀히 결합되어 있어서 누구나 다 아는 명백한 사실이 되었다. 영·육의 결합은 주지의 사실이기에 이를 보고 놀라는 사람은 없다.

영혼과 육체를 한 인격체에 결합시키신 하느님은, 본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신적인 위격의 통제 아래 한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당신의 신성(神性)과 문제없이 결합시키실 수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다음 성서 구절의 의미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 1, 14)

인성을 취하신 이 분은 다른 사람들처럼 창조된 분이 아니시다. 그분의 위격은 선재(先在)하던 말씀 곧 로고스였다. 다른 한편 그분의 인성은 기적적인 마리아의 잉태로 ㅡ 이 잉태는 성령의 그느르심과 인간의 피앗(Fiat), 즉 한 여인의 동의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이뤄진 것이다 ㅡ 인하여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질료에서 나온 새로운 인류의 시작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을 때 신적인 말씀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 아니다. 발(發)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으셨다. 그 때 벌어진 일은 신격(神格)이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기 보다는 인격(人格)을 하느님 안에 받아들이신 것이었다.

마리아로부터 취한 인격을 통해 타락한 인류와 하나가 되셨지만, 그리스도 위격이 선재하던 로고스(Logos)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스도는 인간과 구별되시는 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말 그대로 제 2의 아담이 되시며, 이 아담을 통해 인류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한다. 그리스도가 마리아로부터 취한 인성이 영원한 말씀과 결합된 것처럼, 인간 본성이 자기와 하나가 된 점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중심을 두고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겸손을 인간이 이해하기란 힘들다. 가능하다는 가정 하에서, 인간이 육신을 벗어던지고 뱀의 몸둥아리 속에 자기 영혼을 주입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경우 두 가지의 모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첫째는 뱀보다 월등히 우수한 지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뱀의 유기체적인 한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한 제한성은 어느 뱀도 가져본 적이 없는 생각을 뱀의 독 이빨로는 적절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모욕은 이렇게 "자신을 비움"으로써 어쩔 수 없이 뱀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비우신 것과 비교할 때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비우시어 인간의 형상을 취하시고 배고픔과 박해와 같은 인간이 지니는 제한성을 받아들이셨다. 또한 하느님의 지혜가 무식하기 짝이 없는 가난한 어부들과 스스로 어울려 사신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자렛의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셨을 때부터 시작해서 이러한 굴종은 최후로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굴종에 이르기까지 오만한 인간으로부터 당하게 될 온갖 모욕은 서두에 불과한 것이었다. 십자가가 없다면 구유는 없었을 것이며 십자가에 박은 못이 없었더라면 아기 그리스도를 뉘인 짚더미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교훈을 죄의 대가라고 가르칠 수만은 없었다.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다. 하느님은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당신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셨다. 그것이 바로 포대기에 감싸여 있는 비밀이었다.

"예수"라는 이름

"예수"라는 이름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름이었다. 히브리 원어로는 "요수에"라고 하였다.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에 대해 말해준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하고 일러 주었다. (마태오 1, 21)

세상에서 성취시켜야 할 그리스도의 사명의 본질을 처음으로 밝히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왜냐하면 먼저 구원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가르침은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동시에 또 하나의 이름을 얻게 된다. 그것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오 1, 23)

이 이름은 이사야 예언에서 취한 것으로 단순한 하느님의 현존만이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과 함께 구원하고 살려 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의미하였다. 아울러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루가 1, 31-33)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 이란 칭호는 게라사 지방에서 한 젊은이를 지배하고 있던 악령이 구세주를 부르던 바로 그 칭호였다. 이처럼 마귀도 천사와 같이 구세주의 본질을 고백하였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마르코 5, 7)

"예수"라는 이름이 약속하고 있는 구원은 사회적인 구원이라기보다는 영적인 구원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가난으로부터 구한다기보다는 죄로부터 구원해주실 것이다. 죄를 파멸시키는 것은 가난의 첫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에서 이끌어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를 상기시켜 주었다. 요수아가 예수의 예표(豫表)였다는 사실은 결정적으로 악을 쳐부수고 승리하는데 필요한 무사적(武士的)인 기질이 예수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승리는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와 임전무퇴의 용기와 확고부동한 의지 그리고 아버지의 명령에 대한 일편단심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로마인의 멍에 밑에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옛 요수아에 대한 예언이 어떻게든 실현된다면 그것은 정치와 무관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나중에 백성들은 그리스도에게 언제 카이사르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해주겠느냐고 질문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무사는 자기 인생을 시작하는 첫 순간에 천사를 통하여 당신을 카이사르보다 더 강한 적을 정복하러 왔다고 단언하였다.

백성들은 여전히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쳐야 했으며, 그리스도의 사명은 훨씬 강력한 속박 곧 죄의 속박에서 그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줄곧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 구원의 개념을 현실적으로 이해하려 하였으며, 구원이란 정치적으로만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예수" 즉 구세주라는 이름은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성취하신 후에 받은 이름이 아니라, 어머니의 태내에 잉태되던 바로 그 순간에 받은 이름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시간이 아니라 영원에 근원을 둔 것이었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2. 그리스도의 어린시절(2)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