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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2. 그리스도의 어린시절(3)

[그리스도의 생애] - 2. 그리스도의 어린시절(3)


"첫 아이"

드디어 첫 아들을 낳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 (루가 2, 7)

"첫 아이" 라는 말은 마리아가 육체적으로 다른 아이를 낳으리라는 뜻이 아니였다. 다른 자식이 없다하더라도 항상 첫 아이에게는 법적인 특권이 주어졌다. 루가가 여기서 이런 단어를 쓴 것은 나중에 성모 어머니가 성전에서 "첫 아들"로 자식을 봉헌하는 봉헌기사를 고려해서 쓴 것 같다. 루가가 언급하는 주의 다른 형제들은 마리아의 아들들이 아니라, 혹시 요셉이 전에 결혼했었더라면 그 때 난 배다른 형제나 아들들이었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촌들이었다. 마리아는 육체적으로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았다.

여기서 "첫 아이"라는 말은 마리아가 영적으로 갖게 될 다른 자녀들과의 관계를 가리킬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뜻에서 그리스도는 십자가 밑에 서 있는 요한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영적으로 요한은 마리아의 "둘째 아들" 이었다. 성 바오로는 후에 아버지의 외아들인 우리 주님의 영원한 탄생을 나타내는 말로 "첫 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어느 천사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느님께서 당신의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에는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예배를 드려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 5-6)

그리스도의 족보

그리스도의 신성은 영원하지만 그의 인성(人性)은 유대인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 그리스도의 핏줄 속에 흐르고 있는 피는 가난했지만 위대한 왕의 가문에 속한 그의 어머니를 통해 다윗 왕가의 혈통에 속한 것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절대적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어떤 사람도 절대로 메시아로 인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복되신 우리 주님께서도 당신이 다윗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부인하지 않으셨다. 단지 다윗의 혈통에 속한다는 것이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같이 신성(神性)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고 단언하였을 뿐이다.

마태오 복음서의 서두는 주의 출생사(出生史)를 제시해 주고 있다. 구약성서 서두는 만물을 만드신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거사로 장식되어 있다. 신약성서는 또 다른 창조사(創造史)로 시작하고 있는데 그것은 만물을 새롭게 만드는 창조사를 기술하고 있다. 복음서가 제시하는 족보를 보면 그리스도는 단순히 아담의 한 후예일 뿐이 아니라 "제 2의 인간"임을 알 게 된다. 이방인을 위해 복음서를 쓴 루가는 우리 주님의 족보를 첫 인간인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 반면,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를 저술한 마태오는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루가와 마태오의 족보가 다른 것은 이방인을 위해 복음서를 쓴 루가는 조심스럽게 자연적인 족보를 말하고 있고, 그에 비해 유대인을 위해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오는 다윗 시대 이후의 족보에 유념함으로써 우리 주님은 다윗 왕국의 상속자라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분명히 주지시켜 주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루가는 인자 (the Son of Man)에 대해 관심이 있었고 마태오는 이스라엘의 왕에 대해 더 관심이 많았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마태오 1, 1)

마태오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족보를 세 주기로 나눠서 각 주기마다 십 사 대씩 나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사가 그리스도의 족보를 완벽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십 사 대로, 다윗에서 바빌론 포로생활까지 십 사 대,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주님까지 십 사 대로 묘사되어 있다. 이 족보는 히브리인의 혈통 외에 몇 명의 비유대인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이렇게 비유대인을 포함시키고, 아울러 별로 세인 (世人) 의 평판이 좋지 못한 사람들까지 족보에 올려 놓은 데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중 한 사람이 라합 (Rahab) 으로서 이방인이자 죄인이었으며, 또 한 사람은 룻 (Ruth) 으로 유대 백성에 받아들여졌지만 이방인이었으며, 또 한 사람은 베사베 (Bethsabee) 로서 다윗과 범한 죄로 왕가의 혈통에 먹칠을 한 사람이었다. 왕의 가문에 이렇게 오점이 끼어도 된단 말인가? 베사베는 여성적인 정숙함을 잃어 버린 사람이었고 룻은 도덕적으로는 훌륭했지만 외래인의 피를 왕의 혈통에 끌어들인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아마도 결점투성이의 죄 많은 사람들과 매춘부와 죄인들 그리고 심지어는 주님의 복음과 구원에 포함되어 있는 이방인들과 그리스도가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70인역 성서의 번역을 보면 족보를 기록하는 데 사용하는 단어가 "낳았다" 라는 말이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다" 고 나타내고 있다. 70인역의 또 다른 번역 표현에는 "ㅡ의 아버지였다" 라는 말이 나온다. 예로서 "제코니아스는 살라티엘의 아버지였다." 고 나타내고 있다. 이런 번역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사십일 세대를 말하는데 단조로운 이러한 표현을 줄곧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흔 두 번째 세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표현을 생략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예수의 동정 탄생 (Virgin Birth) 때문이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 예수가 나셨는데 이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마태오 1, 16)

마태오는 족보를 작성하면서 그리스도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복음서 초장부터 주님이 유대민족과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전적으로 유대민족에 속하지는 않으신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유대민족 속에 들어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유대민족과는 완전히 구별되신다. 마태오 복음서의 족보에 동정탄생에 대한 암시가 있듯이 루가 복음서의 족보에도 그러한 암시가 있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요셉이 주님을 낳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루가 복음서에서 주님은 이렇게 불리온다.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루가 2, 34)

루가의 말은 사람들이 주님을 요셉의 아들로 생각했다는 뜻이다. 두 개의 족보를 한데 묶어 볼 때, 마태오 복음서에서 주님은 다윗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루가 복음서에서는 아담의 아들이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으로서 뱀의 머리를 쳐부술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죄많은 인간들이 하느님의 계획을 수행하는 도구가 되었다. 우리아 (Uriar)를 죽인 다윗은 그의 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피가 마리아에게까지 흘러들어 갈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다윗 가문에는 죄인들이 많이 있었으나, 인간을 천상 아버지의 양자로 삼으면서 십자가의 족보 위에 매달리실 때 그리스도는 죄인 중에 가장 극악한 죄인처럼 보이실 것이다.

할례

여드레 째 되는 날 아기에게 할례를 베푸는 날이었다. 그날이 되자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대로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루가 2, 21)

할례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맺으신 계약의 상징이었으며, 출생 후 팔일 째 되는 날 행했다. 할례는 죄인들이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 아기는 죄인을 대신해서 할례를 받는다. 그리스도는 일생을 통해 죄인을 대신해야 할 것이다. 할례는 이스라엘 집단에 정식으로 가입하는 표시요 상징이었다.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어린이가 자동적으로 하느님의 선민(選民)에 속하지 못했다. 선민에 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의식이 필요하였으며, 창세기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뿐 아니라 네 후손 대대로 지켜야 한다. 너희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아라. 이것이 너와 네 후손과 나 사이에 세운 내 계약으로서 너희가 지켜야 할 일이다. 너희는 포경을 베어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운 계약의 표다." (창세기 17, 9-11)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를 예표하고 있다. 둘 다 죄와 더불어 육(肉)의 생활을 끊어버림을 상징한다. 할례를 통해 그리스도 아기는 이스라엘 백성에 속하지만, 세례를 통해서는 새로운 이스라엘, 즉 교회에 속한다. "할례"라는 용어는 그 후 성서에서 극기를 통해 육체를 제어하는 영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마음의 할례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였다. 역적 미아도 똑 같은 말을 하였다. 성 스테파노는 살해당하기 전 최후 연설에서 청중들에게 그들은 마음과 귀의 할례를 받았다고 말했다. 죄가 없었기 때문에 전혀 필요치 않았다.

할례를 받음으로서 인간이 된 하느님의 아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법적 요구사항을 충실히 이행하였으며 앞으로도 다른 모든 히브리 법규를 충실히 이행하실 것이다. 그는 과월절을 지켰고 안식일을 지켰으며 대명절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희미하게 가려져 있던 예형들인 고대 율법을 현실화시키고 영성화시킴으로써 율법을 완성할 때가 도래할 때 까지 율법을 준수하였다.

그리스도의 할례에서는 미리 흘린 피 때문에 갈바리아의 암울한 전조가 예감된다. 이미 십자가의 그림자가 생후 팔일밖에 안된 아기 위에 드리워져 있다. 앞으로 일곱 차례나 피를 흘리게 될 것이며 이번이 그 첫 번째 피흘림이다. 다른 여섯 번은 올리브 동산에서 고뇌에 차 번민하시던 때와 채찍질을 당하시던 때, 가시관을 쓰실 때,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그리고 창이 가슴을 찌를 때이다. 그러나 갈바리아를 상징할 때마다 영광의 표징도 함께 나타난다. 피를 흘림으로써 갈바리아를 미리 체험하는 바로 이 순간에 예수라는 이름이 그에게 주어진다.

생후 팔일밖에 안된 아기가 벌써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피를 흘림으로써 그리스도가 완벽한 인간임이 드러난다. 요람은 갈바리아의 상징인 심홍색 피 빛으로 물들어 있으며, 고귀한 성혈이 순례의 장도(長道)를 시작하였다. 출생 팔일 만에 그리스도는 율법의 창시자면서도 그러한 율법에 순종하였고, 이러한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적용됨으로써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인간의 피 속에는 죄가 들어 있었으며 이제 죄를 없애기 위하여 이미 피가 흘려지고 있다. 석양에 동쪽은 서쪽의 황홀빛을 반영하듯이 할례는 갈바리아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당장에 구원을 시작해야만 되는가? 십자가는 좀 기다릴 수 없을까? 구원을 이룰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아버지의 품에서 곧장 지상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왔을 때 그리스도는 어머니의 팔에 안겨 첫 번째 갈바리아로 옮겨졌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아버지의 일이 완료되었을 때,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거두신 후 다시 어머니의 품 안에 거두어질 것이다.

성전 안에서의 봉헌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는 배척을 받았으며, 할례 때는 예견되는 구세주였으며 봉헌 때는 거슬르는 표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느님이셨기 때문에 할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며 마리아는 죄없이 잉태되셨기 때문에 정화될 필요가 없었지만, 예수께서 할례를 받으심 같이 마리아는 정화를 받았다.

그리고 모세가 정한 법대로 정결예식을 치르는 날이 되자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루가 2, 22)

인간 본성에 죄가 내재해 있다는 사실은 할례를 받을 때 죄를 보상하기 위해 고통을 참아 받아야 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정화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의해 강조된다. 에집트인들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은 이후, 그리고 에집트인들의 장자들이 학살된 이후로 유대인들의 장자들은 항상 하느님께 봉헌된 제물로 간주되었다.

율법에서 사내 아이에게 지정해 준대로 생후 40일에 예수를 성전으로 데려갔다. 출애굽기의 법령에 의하면 첫 아들은 하느님 것이었다. 민수기에 의하면 레위 지파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해 별도로 지정되어 있었으며, 사제의 봉헌은 첫 아들의 희생을 대신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첫 아들을 희생하는 의식은 한 번도 거행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성전으로 데려갔을 때 첫 아들을 봉헌하는 율법이 완전하게 이행되었다. 왜냐하면 아들을 아버지께 봉헌한 것은 절대적이었으며 이로써 그리스도 아기는 십자가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형상을 한 하느님께서 인간의 가난을 함께 나누시는 또 다른 예를 보게 된다. 정결례에 필요한 전통적인 봉헌물은 부모가 부자인 경우 어린 양 한 마리와 멧비둘기 한 마리였으며 부모가 가난할 경우는 집비둘기 한 쌍이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을 이 세상에 낳아 준 어머니는 하느님의 어린양말고는 봉헌할 어린양이 없었다. 하느님은 생후 사십 일이 되었을 때 성전에서 봉헌되셨다. 약 30년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성전을 들어 하느님이 거하시는 당신 몸의 상징으로 이용하실 것이다. 여기서 봉헌되는 아들은 마리아의 첫 아들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아버지의 첫 아들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그리스도는 여기서 구원된 인류의 첫 아들로 봉헌되었다. 새로운 민족이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하였다.

성전에서 살며 그리스도 아기를 받아들인 시므온이라는 사람의 성품은 단순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에게는 성령이 머물러 계셨는데 (루가 2, 25)

그는 성령의 계시를 받고 있었다.
성령은 그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고 알려 주셨던 것이다. (루가 2, 26)

성령의 말씀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보면 그 즉시 죽음의 고통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 노인은 예수 아기를 팔에 안고 기쁨에 넘쳐 외친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 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아기의 부모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 (루가 2, 29-33)

시므온은 하느님께서 빛을 지키도록 보내신 보초와 같은 자였다. 드디어 빛이 나타났을 때 그는 "이제 이 종을 떠나게 해주소서." 라는 노래를 흔쾌히 부를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보잘 것 없는 제물을 봉헌하면서 데려온 가난한 예수 아기를 보면서 시므온은 세상의 부(富)를 발견하였다. 이 노인이 예수 아기를 팔에 안고 있을 때 그는 호레이스(Horace)가 말하는 그런 늙은이가 아니었다.

시므온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을 내다보며 이스라엘 백성의 장래뿐만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인 모든 이방인의 장래를 내다 보았다. 인생의 황혼기에 처한 한 노인이 세상의 해돋이를 예언하였으며, 인생의 저녁을 맞은 노인이 새 날의 도래를 예고하였다. 그는 신앙을 통해 미리 메시아를 알아 보았다. 이제는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었다.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은 기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꽃은 저녁에만 피는 것이 있다. 그가 지금 본 것은 "구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가난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이었다.

시므온의 찬가는 흠숭의 예배행위였다.

그리스도 아기의 유년시절을 보면 세 번의 흠숭예배 행위를 볼 수 있다. 목동들의 흠숭행위와 시므온과 예언녀 안나의 흠숭행위 그리고 이방인 박사들의 흠숭행위가 그것이다. 시므온의 찬가는 그림자가 실체를 예고하는 해넘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서 인간이 노래한 첫 번째 찬가였다. 시므온은 마리아와 요셉에게 말을 건네면서도 예수 아기에게 축복을 한다는게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마리아와 요셉에게는 축복을 내렸지만 예수 아기에게는 축복하지 않았다.

찬미의 송가를 마친 후 시므온은 자청해서 마리아에게만 말을 건네었다. 시므온은 자기 팔에 안겨 있는 아기와 핏줄이 닿는 사람은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 나아가서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가 겪을 고통이 많이 쌓여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시므온은 이렇게 말하였다.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루가 2, 34)

예수 아기의 모든 역사가 이 노인의 눈 앞에 그대로 펼쳐지는 것 같다. 이 예언은 곧이 곧대로 이 아기의 삶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 아기가 가녀린 팔을 쭉 뻗쳐 십자가 모형을 만들 수도 있기 전에 확인된 십자가의 가혹한 실제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이 아이 때문에 선과 악은 치열한 싸움을 벌일 것이며 서로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엄청난 증오를 낳을 것이다.

이제 예수 아기는 걸림돌이 될 것이며 선과 악을 가르는 칼이요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동기와 기질을 폭로시킬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일단 이 아이의 이름과 생애에 대해 듣고 알 게 되면 그 어느 누구든 그리스도와 무관한 척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배척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관한한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수락 아니면 배척이요 부활 아니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는 본성에 의하여 하느님에 대한 인간들의 속 생각들을 드러나게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죄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리스도는 운명적으로 죽음에 이르도록까지 사람들로부터 극렬한 반대를 당할 것이며, 이 때문에 마리아는 비참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여인 중에 복받으신 분"이라고 인사했지만 시므온은 복은 받으셨지만 고통의 어머니 (Mather Dolorosa)가 되실거라고 말한다. 원죄의 벌 가운데 하나는 여인이 해산의 고통을 겪는 일이었다. 시므온은 마리아가 아기 때문에 계속 고통 중에 살리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고통의 사나이라면 마리아는 고통의 어머니일 것이다.고통을 당하는 그리스도에게 고통을 당하지 않는 어머니란 사랑이 없는 어머니일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그 죄를 보상하기 위해 죽음까지 원하셨기 때문에 자기 어머니도 자신의 고통을 함께 해주기를 바랬을 것이다.

시므온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 마리아는 아기의 손을 쳐들 때 마다 그 손에 박힌 못 그림자를 보았을 것이며, 저녁놀을 볼 때 마다 피로 붉게 물든 그의 수난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시므온은 미래를 보지 못하게 인간의 눈을 가리고 있던 칼집을 뽑아 던져 버리고 세상의 고통의 칼날이 마리아의 눈 앞에서 번득이게 했다.
아기의 가녀린 손목에서 마리아가 느끼는 맥박은 먼 훗날 듣게 될 망치 소리의 메아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고통을 통해 구원을 이루고자 하셨을진대 마리아도 고통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데 동참하여야 했다. 이 어린 생명이 인생의 첫 발을 내디디자마자 노련한 선원처럼 시므온은 난파를 예언하였다. 아직 아기의 입술에는 아버지의 쓴 잔이 닿지 않았지만 그의 어머니에게는 칼이 보였다.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면 다가오실수록 누구나 죄를 더 깊이 의식하게 되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자비를 구하여 평화를 얻든가 아니면 아직 죄를 끊어 버릴 마음의 준비자세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등을 돌리든가 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밀과 왕겨를 갈아놓으실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심판이 된다. 그러한 반응은 하느님을 대할 때 우리의 지적인 본성에서 나오는 온갖 반감을 드러내게하든가 아니면 우리의 이기적 본성을 쇄신시켜 부활시키든가 할 것이다.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혼란시키는 하느님"이라고 실제로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선이나 악을 분명히 택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신다. 그리스도를 일단 대하고 나면 우리는 빛과 어두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리스도 말고는 누구에게도 "관대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의 마음이 비옥한 땅인가 아니면 딱딱한 바위돌인지를 밝혀 주신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찾아오실 때마다 그 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갈라 놓으신다.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신과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이 무엇인지 알게된다.

만일 그리스도가 인도주의적인 교사에 지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므온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주님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일생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간편한 생활신조와는 너무도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태양이 왁스 위에 비출 때는 그것을 눅눅하게 녹이고 진흙 바닥을 비출 때는 그것을 말려 딱딱하게 만들 듯이 그리스도도 각 사람의 영혼에 따라 다르게 작용하신다. 물체를 비추는 태양은 있는 그대로지만 태양이 비추는 물체들은 천차만별이다.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는 선한 사람과 빛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되시겠지만 악한 사람들이나 어둠속에 살기를 바라는 자들에게는 어둠을 속속들이 밝히는 탄소등과 같은 분이 될 것이다.
씨앗은 똑같으나 토양이 다르며 각 토양은 씨앗에 대응하는 태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의지는 받아 들이거나 거부하는 각자의 자유로운 반응에 따라 제한을 받는다. 시므온의 말은 바로 그런 뜻이었다.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루가 2, 35)

요술 거울에 대한 어떤 동양의 우화에 의하면 이 거울을 착한 사람이 쳐다보면 깨끗하게 보이지만 악한 사람이 쳐다보면 거울이 더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울 임자는 언제나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시므온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에게 그리스도가 바로 이 거울과 같을 거라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의 품성에 따라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할 것이다. 빛이 인화지에 닿으면 지워지지 않는 화학적인 변화를 남겨놓게 된다. 시므온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비추는 이 아이의 빛이 각자에게 지워지지 않는 당신의 흔적을 남겨 놓으실 거라고 말하였다.

시므온은 이 아기가 사람들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할 거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만나는 모든 사람의 생각을 시험하실 것이다. 빌라도는 세인의 환심을 사려한다. 마음이 약해졌다. 헤로데는 조롱했고, 유다는 탐욕스럽게 사회보장에 관심을 두었으며, 니고데모는 밤에 살짝 빠져나와 빛을 발견하였으며, 세금 징수원들은 정직한 사람이 되고, 창녀들은 정결하게 되고, 부자 청년은 그리스도의 가난을 배척할 것이며, 탕자는 집에 돌아오고, 베드로는 회개하며, 사도 한 명은 자살할 것이다.

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리스도는 계속 거슬리는 표징이 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두 기둥이 서로 엇갈린 나무 위에서 죽는 게 당연하였다. 하느님의 뜻을 가리키는 수직 기둥이 가로질러 부정하고 있다. 할례식이 피흘림을 예고하듯이 정결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배척을 받는 표가 되리라고 말한 후 시므온은 그 어머니를 향해서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루가 2, 35)

마리아는 그리스도가 세상 사람들의 배척을 받으리란 예언을 들었으며,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받을 때 마리아는 가슴이 찔리는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기를 바랬듯이 마리아가 고통의 칼을 지니기를 바랬다. 그리스도가 고통의 사나이가 되기를 바랬으면 마리아가 고통의 어머니가 되기를 바랬을 것이다.
하느님은 항상 선한 사람에게 고통을 아끼시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아들을 아끼지 않았으며, 아들도 어머니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스도에게 수난이 있듯이 마리아에게는 선민의 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값을 기꺼이 치루지 않고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는 단순한 윤리교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지 않는 어머니는 그 막중한 역할을 맡을 만한 인물이 못될 것이다.

시므온은 칼집을 벗겨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섭리에 따라 그 칼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나중에 그리스도는 "나는 칼을 주러 왔다." 고 말할 것이다. 시므온은 마리아가 그녀의 아들이 반대의 표지로 매달려있고 그 아래 서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맛보고 있을 때 마음 속에 그러한 고통을 느끼게 될 거라고 말하였다.
육체적으로 그리스도와 가슴을 관통한 창은 신비적으로 마리아 자신의 가슴을 관통할 것이다. 그리스도 아기는 "구세주"라는 그의 이름이 말해주듯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오셨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2. 그리스도의 어린시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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