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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8. 세상의 구세주

[그리스도의 생애] - 8. 세상의 구세주


주님께서는 성전을 정화시키시고 예루살렘에서 기적을 행하시며, 죄의 뱀에게 물린 자를 위해서 죽으러 오셨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기를 배척한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의 갈릴래아"로 들어가셨다.
남쪽에 있는 유대에서 북쪽 갈릴래아로 통하는 길은 보통 페레아를 관통하였다. 유대인들은 이 길을 택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성전은 만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모든 민족과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그분의 소명이었다.

그곳으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거쳐야만 하였다.(요한 4, 4)

복음서는 주님의 죽음과 구속을 "필수" 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다. 사마리아에서 일어났던 일은 주님께서 인류를 대신해서 목숨을 바치셔야 한다는 것과 관계있다.
유대와 갈릴래아를 갈라놓고 있는 것은 반이방인 혼혈 종족인 사마리아인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앙숙관계였다.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이 수세기 전 노예로 전락되었을 때 형성된 혼혈 종족이었다. 아시리아인들이 자기 민족의 일부를 이스라엘인들과 섞여 살게 함으로써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냈다.
사마리아를 지배한 첫 번째 식민지배자들은 우상을 들여왔지만 나중에는 사이비 유대종교를 도입해왔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과 일부 예언서는 인정했지만 그밖의 모든 역사서는 그들이 경멸하던 유대인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가리짐산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사마리아인" 이란 말을 입밖에도 내지 않을 정도로 그들에 대한 미움이 대단했다. 따라서 율법학자가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우회적인 표현을 썼다. 또 한편 유대교인들이 퍼부을 수 있는 가장 모욕적인 언사는 상대방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들은 한번 주님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렀으나 주님은 그런 비난을 안중에도 두지 않으셨다. 나중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어떤 사마리아인" 으로 제시하면서 세상에 오셔서 당신이 받으신 숱한 모욕과 멸시를 암시하셨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피하지 않으셨다.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는 천상옥좌에 오르시는 길에 "생소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을 통과하셔야 한다. 주님께서는 지고한 사랑에 의해 이러한 일을 감수하셨다. 때는 정오였으며 주님께서는 "여행으로 피곤하셨다." 그래서 야곱의 우물가에 앉으셨으나 이러한 허여하심과 더불어 당신의 전지(全知)하심이 드러난다. 주님께서는 한 여인의 마음을 읽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일을 하시느라 피곤하셨지만 결코 일을 싫증내지는 않으셨다. 주님께서 회개시키신 가장 훌륭한 회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 페니키아 여인과 이 사마리아 여인이며 둘 다 주님께서 피곤할 때 회개시키신 자들이다. 아버지의 일을 하시기에 가장 부적절하게 보일 때 주님께서는 가장 효과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셨다. 성바오로는 전도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었지만 일부 죄수들은 회개시켰으며 감옥에서 서간을 썼다. 항상 뜻만 있으면 기회는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마침 그 때에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다. (요한 4, 7)

동양에서 여인이 대낮에 물을 길으러 온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상례에 벗어난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잠시 후에 밝혀질 것이다. 세속적인 눈으로 볼 때 여인이 물항아리를 가지고 우물로 가는 것은 극히 우연한 일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은 일상적인 평범한 하느님의 섭리의 하나로서 한 영혼의 수수께끼를 풀어주었다. 그녀는 그토록 큰 은혜를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주님께서 그곳에 가 계셨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빌지도 않던 자의 청까지도 나는 들어 주었고, 나를 찾지도 않던 자 또한 만나 주었다.
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민족에게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해 주었다.(이사야 65, 1)

주님께서 자케오를 발견하신 것이지 자케오가 주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바오로도 주님을 찾고 있지 않을 때 주님께서 그를 찾으셨다. 주님께서는 나중에 신성의 흡입력을 강조하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내게 오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내가 살릴 것이다.(요한 6, 44)

물항아리를 채우자 그녀는 벌써 주님을 피해 갈려고 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볼 때 사마리아인에게서 볼 수 없는 유대인의 신체적 특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물가에 앉아 있는 이 낯선 사람이 자기에게 부탁을 하며 말을 걸어 오는 것이 아닌가?

마침 그 때에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다. (요한 4, 7)

주님께서는 은혜를 베풀고자 하실 때마다 뭔가를 먼저 부탁하신다. 먼저 꾸지람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탁을 하신다. 주님의 첫 번째 말씀은 "달라!"였다. 항상 인간적인 것을 먼저 비워야만이 신적인 것으로 채울 수 있다. 주님께서 신성을 비우시고 인성을 채우셨듯이, 여인의 최대 관심사였던 물이 죄없는 분과 죄인간의 공통분모가 되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 "당신은 유대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하고 말하였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요한 4, 9)

두 사람의 오랜 대화를 통해 영성적 발전이 이뤄짐으로써 결국 그녀는 그리스도 구세주를 알 게 되었다. 처음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을 평범한 한 종족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비웃었다. 처음에는 주님이 그냥 "한 유대인"으로 보일 뿐 이었다. 주님의 답변 속에는 당신은 원래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녀는 주님께서 자기의 도움이 필요한 줄로 잘못 생각하였으나 사실은 그녀가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 10-11)

주님께서는 물이라는 상징으로 자신을 표현하셨지만, 나중에 사람들이 빵을 요구하였을 때는 빵의 형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선물로 제시하셨지만 이 여인은 주님을 여행으로 지쳐빠진 다른 종족의 한 남자로밖에 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겉 모습을 뚫고 내부에 감추어져 있는 신성을 꿰뚫어보지 못했다. 그녀가 본 것은 유대인일 뿐이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었으며, 지친 사람을 보았을 뿐 지친 영혼의 안식처를 보지 못했으며, 목마른 순례객 정도로 보았을 뿐 세상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분을 보지 못했다. 너무도 육적으로만 사는 자들은 그 벌로 결코 영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여인은 점점 주님을 존경하게 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 여자는 "선생님, 우물이 이렇게 깊은 데다 선생님께서는 두레박도 없으시면서 어디서 그 샘솟는 물을 떠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이 우물물은 우리 조상 야곱이 마셨고 그 자손들과 가축까지도 마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우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더 훌륭하시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요한 4, 11-12)

이제 주님을 "유대인" 이 아니라 "당신" 이라고 부른다. 이 여인은 주님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주님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자기 백성의 전통을 무시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었다. 주님은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라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랑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 올라 영원히 살 게 할 것이다." 하셨다.(요한 4, 13-14)

여기서 주님의 인생철학을 볼 수 있다. 육체와 정신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은 한 가지 결함을 갖고 있다. 즉 영원히 만족시켜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현재의 욕망을 잠재워 줄 뿐 결코 없어지게는 못한다.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계속 살아난다. 세상이 주는 물은 다시 땅으로 되돌아 가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수는 초자연적인 충동이며 천국에까지 나아가게 해준다.
   
주님께서 부서진 세상의 물탱크를 치우시고 훨씬 나은 것을 제공하신다. 주님께서는 세속적인 흐름을 비난하거나 금하시지 않으시고, 인간적인 행복의 샘만을 찾는다면 결코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육체에 필요한 물이라는 비유를 통해 암시되는 은총과 천상적인 힘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그녀는 본능적인 쾌감이라는 더러운 웅덩이에서 갈증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말씀을 듣고 그 여자는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하고 청하였다.(요한 4, 15)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유대인" 이나 "당신" 이 아니고 "선생님" 이시다. 아직도 그녀는 뭐가 뭔지 모르고 있다. 주님의 약속에 의하면 다시는 구차하게 우물로 물을 뜨러 올 필요가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주님께서는 지고한 영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시는데, 이 여인은 관능적인 차원에서 말한다. 이 여인의 영혼의 창문은 너무도 더러워서 물질적인 우주 안에 내포되어 있는 영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주님께서는 그녀가 영적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함을 보시고 왜 당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정곡을 찔러 말씀하신다. 즉 그녀의 생활이 무질서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시며 그녀의 양심을 건드리신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다.(요한 4, 16)

주님께서는 그녀의 수치심과 죄의식을 불러 일으키고자 하셨다. "가서…오라. 가서 네가 살고 있는 삶을 그대로 직면하라. 와서 생명수를 받아라" 여인이 대답하였다.

그 여자가 남편이 없다고 대답하자(요한 4, 17)

이 말은 어디까지나 정직하고 진실한 고백이었지만, 아직 충분치는 않았다. 그녀는 생명수를 부탁했지만 먼저 우물을 파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깊숙한 그녀의 영혼 속에는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만한 가능성이 놓여 있지만, 죄라는 단단한 바위와 여러 층으로 쌓여있는 잘못들, 진흙처럼 굳어있는 습관들, 머리 속에 쌓여있는 정욕적인 생각들 때문에 은총의 물은 흐를 수가 없다. 생명수를 받기 전에 이 모든 장애물들을 파내야만 한다. 구원을 얻기 전에 죄를 고백해야 한다. 양심을 먼저 일깨워야 한다. 노련한 대가답게 주님은 그녀의 부정한 인생의 편력을 전부 들추어내시며, 전광 석화(電光石火)와 같이 그녀의 양심을 죄의식으로 꽁꽁 묶으신다.
   
주님께서는 대답하신다.

예수께서는 "……남편이 없다는 말은 숨김없는 말이다."(요한 4, 17)

주님께서는 여인의 정직한 고백을 칭찬하신다. 돌팔이 영혼의 의사였더라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호되게 꾸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와는 반대로 "그 말이 사실이다." 고 하셨다. 그러나 계속이어 말씀하신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4, 18)

그녀가 함께 살고 있는 남자는 그녀의 남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너무도 타락한 나머지 다른 때와는 달리 법적인 혼인절차를 밟지 않았다.
   
이 여인은 주님께서 자기 개인문제를 "간섭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님께서는 그녀의 품행과 행실을 캐고 있으며 자기의 생활태도 때문에 주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고 암시하는 것 같았다. 종교가 행동의 개혁을 요구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왔었던 것처럼 그녀도 같은 행동을 취한다. 곧 화제를 바꾸었다. 그녀는 종교를 토론거리로 삼고자 했을 뿐 결단을 내리는 문제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주님께서는 토론을 도덕적인 질서, 곧 그녀가 개인적으로 하느님과 양심 앞에서 살아왔던 생활양식을 다루는 쪽으로 몰고 가셨다. 그녀는 도덕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해 먼저 아첨스런 말을 하다가 교묘한 문제를 끄집어 낸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과연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요한 4, 19)

처음에는 "유대인"이라고 했다가 그 다음에는 "당신" 이라고 하고 나중에는 "선생님" 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예언자" 라고 부른다. 그녀는 신앙문제를 순전히 지적인 차원으로 끌어 내리면서 자신의 도덕생활과는 연관을 지으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덧붙여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렸는데 선생님네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4, 20)

여인은 낚시 바늘에서 빠져 나가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케케묵은 종교분쟁을 끄집어내서 난처한 국면을 모면하려고 한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고 사마리아인들은 가리짐 산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녀는 교묘한 문제를 끄집어냄으로써 자신의 양심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영혼의 수치스러움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요한 4, 21-24)

사소한 지역적인 분쟁은 이내 사라질 거라고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논쟁은 필요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므온이 예언한 것처럼 주님께서는 이방인의 빛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유대인의 정당성을 강조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오기 때문이다.(요한 4, 22)

하느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신 메시아는 정녕 유대인에게서 나오시지 사마리아인에게서 나오시지 않는다. "구원" 이라는 말은 구세주와 같은 말이다. 시므온도 아기 예수를 안고서 자기 눈으로 "구원"을 보았다고 외쳤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구원을 세상에 전해주는 매개체와 같다. 이스라엘은 수세기 동안 물을 주어 기른 나무와 같이 이제는 메시아와 구세주라는 완전한 꽃을 피워냈다.
   
주님의 말씀은 가엾은 이 죄인을 그녀가 헤어나올 수 없는 더 깊은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며, 그녀로서는 이해하기에 벅찬 진리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신 단 한 마디, 아버지를 올바로 섬길 때가 오리라는 말씀은 그녀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는 있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들도 메시아를 어느 정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대답했다.

그 여자가 "저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저희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시겠지요" 하자 (요한 4, 25)

그녀는 아직 주님을 "메시아" 라는 칭호로 부르지는 않았지만 곧 인정하게 될 것이다. 사마리아인들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축성된 자를 보내시리라는 것을 알 만큼은 구약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정치적인 왕으로 왜곡되게 믿고 있었듯이, 사마리아인들도 메시아를 한낱 예언자로밖에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발언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는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4, 26)

이제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제 예배를 드릴 곳은 예루살렘이나 가리짐산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다.
바로 이 때 제자들이 마을에서 돌아왔으며 여인은 우물을 떠났다. 그러나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물동이를 두고 가 버렸다. 물은 아무 때나 길러 올 수 있을 것이다. 충동적으로 그녀는 마을로 급히 뛰어가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나의 지난 일을 다 알아 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가서 봅시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알렸다.(요한 4, 29)

이제 주님께 새로운 칭호가 붙여졌다. 이제 주님은 그리스도시다. 그녀는 주님이 하느님의 예배에 관한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행실을 모두 말씀해 주셨으며, 심지어는 자기가 숨기고 있는 것까지 다 알고 계신다고 말했다. 태양은 떠오르자마자 빛을 발하며 불은 붙여지자마자 태우듯이 은총은 영혼이 협력하자마자 활동을 시작한다. 그녀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이방인 선교사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누구나 그녀가 밝히기를 꺼려할 거라고 생각하던 바를 말했다. 그녀는 물을 뜨러 왔다가 참된 샘을 발견하고는 사도들이 그물을 팽개치고 떠났 듯이 물동이를 버려둔 채 떠났다. 이번에는 주님께서도 배고픈 것을 잊으셨다. 그래서 사도들이 음식 들기를 재촉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이 모르는 음식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마리아 여인이 남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해준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아마도 마을의 여인네들이 그녀를 따돌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오에 물을 길으러 왔다. 다른 여인들은 시원한 아침이나 저녁 때 물을 길으러 왔다. 여인네들이 자기를 따돌렸기 때문에 남자들에게 일차적으로 소식을 전했다. 다음과 같은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그녀의 말이 마을에서 먹혀들어간 것이 확실하다.

그 동네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여자가 자기의 지난 일을 예수께서 다 알아 맞히셨다고 한 증언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요한 4, 39)

그녀는 "내가 한 말은 믿어야 한다" 고 말하지 않고 '와서 직접 보라' 고 말했다. 자세히 조사해 보고 편견을 버리라. 그녀의 진지한 태도를 보고 남자들은 믿게 되었다. 몇 시간 후에 그녀는 우물가로 달려갔으며 남자들이 줄을 이어 그녀를 따랐다. 그러나 이번에 그녀가 우물가로 간 것은 다른 목적 때문이었다. 이제는 구원을 얻고자 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찾아 와 자기들과 함께 묵으시기를 간청하므로 거기에서 이틀 동안 묵으셨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요한 4, 40-41)

주님을 본 후에 그들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우리는 당신의 말만 믿고 믿었지만 이제는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4, 42)

주님을 가리켜 "세상의 구세주"라고 표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녀의 영적인 성장은 이제 완전하게 되었다. 그녀는 먼저 그리스도를 "유대인" 으로 보았고 그 다음에는 "남자" 로 그리고는 "선생님" 그리고 "예언자" 그리고 "메시아" 그리고 마침내 "세상의 구세주" 그리고 "죄로부터 구해주는 구세주" 로 이해하게 되었다.

회개는 어느 정도 급속히 이루어졌지만, 주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야 비로소 완전한 회개가 이루어졌다. 물리적인 기적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병이 나은 것도 아니고 장님이 눈을 뜬 것도 아니다. 기적은 죄많은 영혼 안에서 이루어졌다. 죄에서 해방되자 가장 영광스러운 칭호를 불렀다. 십자가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분 즉 "세상의 구세주"를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십자가는 그분께서 못박히시기 오래 전부터 그분의 삶 구석 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다.
   
이 여인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죄가 없다고 부인했지만, 공포, 불안, 두려움, 불행, 공허감 등과 같이 죄에서 나오는 모든 결과를 겪고 있었다. 원인을 부인하기 때문에 그들은 치유될 수가 없었다. 굶주리는 자가 배고픔을 부인하면 누가 빵을 갖다 주겠는가? 만약 죄인이 죄와 잘못을 부인한다면 누가 그들의 구세주가 될 수 있겠는가? 우쭐하고 자만심 많은 바리사이인들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루가 5, 31)

두 부류의 사람들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 즉 하느님을 발견한자들과 하느님을 목말라하고 갈망하며 찾으면서 구하는 자들이다. 죄를 많이 지은 자들이 오만한 지성인들보다 하느님께 더 가까이 온다. 교만은 사람을 우쭐거리게 하고 거만하게 만들지만, 죄많은 사람들은 의기소침하고 풀이 죽어있으며 허탈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그들은 하느님을 받아들일 여지를 갖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 없는 "성인" 보다는 사랑하는 죄인을 더 좋아하신다. 사랑은 가르칠 수 있지만 교만한 사람은 배우지 못한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자신이 비참하고 불행한 죄인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평화와 기쁨과 구원에 훨씬 가까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 속에 밝은 은총을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있다.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어두운 은총을 가지고 있다. 즉 ㅡ 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고 하느님의 부재하심을 느끼고 있다. 처음에는 하느님의 부재를 느꼈던 사마리아 여인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를 "구세주" 라고 절대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자들에게 읽어 줄 책을 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당신 몸 속에 피를 갖고 오시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완전히 탕감해 주기 위해 당신 피를 쏟으려고 하셨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8. 세상의 구세주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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