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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9. 주님의 죽음에 대한 첫 번째 공식적인 발표

[그리스도의 생애] - 9. 주님의 죽음에 대한 첫 번째 공식적인 발표


보통 사람들의 인생 기록부는 간단한 두 마디로 표현된다. 즉 언제 태어났으며 언제 죽었냐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 가운데 유일한 한 분의 삶만이 죽음이 탄생의 원인이었기에 죽음이 먼저였다.

브라우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성은 점차로 기쁨이 되고 점점 더 기쁨이 크게 되어 마침내는 기쁨이 충만해지면서 돌연히 인류를 위해 고통을 받고자하는 열망으로 변하는 이것이야말로 신성(神聖)의 진정한 표시요 봉인이 아니겠는가"
비록 주님은 죽으러 오셨지만 죽음 자체를 위해 오신 것은 아니었다. 그 반대 급부인 영광과 승리 그리고 고양(高陽)이라는 말이 같이 한다. 주님의 인성이 비하될 때마다 신성이 빛을 발한다. 이러한 본질적인 관계가 주님의 삶을 통해 쭉 흐르고 있다.
주님이 마구간에서 비천한 여종에게서 태어나셨을 때 천상의 천사들이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구유 안에서 소와 나귀의 벗이 되셨을 때 찬란한 별이 왕이신 그분께 이방인들을 인도하였다. 광야에서 배고픔에 시달리고 유혹을 받으셨을 때 천사들이 그분께 시중들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가 흘러 나온 것은 천상 아버지께서 그에게 컵을 건네 주셨기 때문이었다. 때가 되어 잡히셨을 때 인간을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고자 아니하셨더라면 12군단의 천사들이 그분을 빼냈을 것이다. 그분이 자신을 낮추시어 죄인으로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로부터 울려 오는 목소리가 정화의식이 전혀 필요없는 영원한 아들의 영광을 선포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분을 배척하며 낭떠러지로 밀어 뜨리려 할 때 신적인 능력을 보이시어 전혀 해를 입지 않으신 채로 그들 사이를 뚫고 걸어 나가셨다.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태양은 부끄러워 그 낯을 가리었고 피조물이 그 창조주에게 행한 일을 보고 땅은 치를 떨며 요동하였다. 그분이 무덤에 묻히셨을 때 천사들이 그분의 부활을 전하였다.

그리스도의 삶이 유별나게 된 것은 당신의 고통과 죽음을 바탕으로 하늘과 땅에 당신 왕국을 세우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악이 행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을 흡수해버림으로써 악을 쳐 이긴 주님의 승리는 주님께 인류를 대표하며 대신하는 성격을 부여해 주었다. 주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당신은 "악인 중의 하나"로 취급받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 악을 쳐 이긴 주님의 승리는 주님과 똑같이 자신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삶 구석구석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말씀하실 수는 없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인 사도들까지 그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죽으러 오셨다는 사실을 처음 공개적으로 선포하게 된 것은 바리사이인들이 주님과 단식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바리사이인들은 주님이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신다고 제자들에게 비난했다.
세례자 요한의 단식행위에 동조하며 바리사이인들은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주님과 그 제자들은 먹고 있다고 비난했다. 신심깊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하였다. 그것은 이 날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요한 세례자가 단식하던 식으로 당신 제자들과 단식하지는 않으셨다. 이를 구실삼아 나중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주님이 탐식가요 술꾼이라고 비난했다. 당신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답변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언뜻 보기보다는 훨씬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잔칫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다." (마르코 2, 19)

주님은 자신을 "신랑"이라고 하신다. 구약을 잘 알고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에 익숙해 있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언제나 신랑과 신부의 관계였다. 7세기 전에 예언자 호세아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었다.

바알이란 말을 그의 입에서 씻어 버려 다시는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리라. (호세아 2, 19)

그밖에 이사야 예언도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신부와 신랑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너의 창주조께서 너의 남편이 아니시냐?
그 이름 만군의 야훼시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의 구세주 아니시냐?
그분은 전세계의 하느님이라 불리신다. (이사야 54, 5)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은 그분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 들었다. 즉 그분은 하느님이시고 주님이시며 이스라엘은 그분의 배필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구약의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시며 하느님과 똑같은 권리와 특권을 주장하셨다. 주님께서는 왕자의 혼인잔치의 비유와 당신께서 신랑으로 오시는 열동녀의 비유에서도 당신을 신랑으로 표현하셨다.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보았을 때도 그리스도를 구약에서 말하는 신랑으로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요한 3, 29)

요한은 결혼식에서 유일한 신랑의 친구였으며 "들러리"였고 메시아의 선구자였다. 그리스도 자신은 인간이 아니시면서 베들레헴에서 인간 본성을 취하심으로 사실상 온 인류와 결혼하셨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이 신랑이시다. 죄가 정복되고 신랑이 새로 태어난 인류, 즉 교회를 당신 신부로 맞아들일 때까지 요한은 혼인잔치를 준비할 것이다. 바오로는 나중에 자기가 고린토교회에 대해 세례자 요한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염려하시는 것처럼 나도 염려하는 나머지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순결한 처녀인 여러분을 오직 한 남편 그리스도에게 바치려고 정혼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Ⅱ고린토 11, 2)

신부인 옛 이스라엘이 새 이스라엘, 즉 교회가 되었으며, 마지막 날에는 신랑과 신부의 영광스러운 혼인잔치가 하늘에서 벌어질 것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되었다.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고, 하느님의 허락으로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게 되었다. (묵시록 19, 7)

(여기서 깨끗한 모시옷은 하느님 백성의 의로운 행실을 뜻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주님의 제자들이 슬프지 않기 때문에 단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은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걷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은 행복하였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는 한 그들은 즐거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그러한 삶이 계속 이어질 수는 없었다. 주님은 죽으러 오셨다. 십자가와 영광의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그 때 주님은 이어서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을 하게 될 것이다. (마르코 2, 20)

신랑은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다. 신랑은 악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출정할 것이며 신부에게도 출정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신랑이 쓰러질 때 그들은 잔치의 즐거움을 버리고 슬프고 침울한 단식을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당신 죽음에 대한 첫 번째 공식 선포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답변하신 주된 목적은 단식행위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랑의 제거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서 주님은 당신 죽음이 팔자 소관이 아니라 당신 사명의 핵심임을 암시 하셨다.

주님께서는 혼인잔치의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십자가의 심연을 내려다 보시며 거기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보셨다. 십자가의 그림자는 결코 그분을 떠난 적이 없으며 신랑으로서 기뻐하실 때 조차도 그러하였다. 성금요일과 부활절이 여기서도 한데 결합되어 있으나 순서는 반대로 되어 있다. 바로 기쁨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자신을 신부로 처음 선포하셨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9. 주님의 죽음에 대한 첫 번째 공식적인 발표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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