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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7. 니고데모와 뱀과 십자가

[그리스도의 생애] - 7. 니고데모와 뱀과 십자가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주님은 억지로 환영을 요구하지는 않으셨다. 지상의 성전은 사라져 버릴 것이며,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참 성전이신 예수께서는 영광중에 다시 부활하실 것이다. 우선 주님께서는 가르침과 기적을 통해서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입증해 보이시는데 주력하신다.

삼일 동안 주님께서는 복음서에 기록된 것보다도 더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복음서에 따르면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었다. 최고 평의회 의원 가운데 한 사람은 이 기적이 진정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러한 기적을 행한 그리스도와 함께 계시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하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요한 3, 1)

세속적인 기준으로만 판단해 볼 때 니고데모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서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외적인 의식을 엄밀히 지키는 바리사이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신심 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어둔 밤을 골라 주님께 말씀드리러 온 것을 보면 니고데모는 적어도 처음에는 겁을 먹었던 것 같다. 니고데모는 복음서에서 "밤에 등장하는 인물" 인 것같다. 니고데모를 만나게 되는 때는 항상 밤이다. 첫 번째 니고데모가 방문한 것은 밤이었으며, 나중에 최고 평의회의 일원으로서 어느 누구도 재판을 받지 않고 판결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주님을 변호한 것도 밤이었다. 성 금요일 밤, 십자가형이 있은 후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왔다.

그리고 언젠가 밤에 예수를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침향을 섞은 몰약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 (요한 16, 39)

사회적인 여러 장애 요소 때문에 그가 주님께 관심을 보이기가 어려웠겠지만, 과월절을 보내기 위해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주님을 만나러 왔다. 그는 그리스도를 인사차 찾아뵙지만, 이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니고데모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밤에 예수를 찾아 와서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니고데모는 기적을 보았음에도 기적을 행한 주님의 신성(神性)을 아직 고백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니고데모는 아직 유보상태에 있다. 그는 "우리" 라는 공식적 명칭 아래 자기 개인을 감추고 있다. 지성인들은 종종 개인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런 교활한 방법을 사용한다. 이 말은 뭔가 변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적이지 그들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밤중에 대화를 하면서 나중에 주님께서는 "교사" 가 되어 가지고 많은 예언을 모르고 있다고 꾸지람을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주님은 당신도 교사이심을 보여 주신다.

동이 트기 전까지 오랜 대화를 하시는 중에 주님은 당신이 단순한 교사만이 아니라 우선 무엇보다도 구세주이심을 천명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마음 속에 있는 인간적인 진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다시 사들여진 영혼의 재생이 필수적임을 단언하셨다. 니고데모는 주님을 스승이라고 부르며 대화를 시작했는데 대화가 끝날 때 쯤에 주님께서는 자신을 구세주로 선포하신다.
   
십자가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생애 중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 속에 반영되고 있다. 구약성서를 알고 있던 이 사람에게 오늘 밤처럼 십자가가 그렇게 선명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이 바리사이는 그리스도를 스승이나 랍비 정도로 생각했지만, 십자가형 ㅡ 그 당시까지만 해도 이것은 저주라고 생각했다 ㅡ 안에 치유가 있다는 것을 결국은 믿게 되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니고데모와 주님께서 토론을 벌이기 시작할 때 눈에 띄는 관념은 영적 생활이 육체적인 생활이나 지적인 생활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영적 생활과 육체적 생활의 차이는 수정과 살아있는 세포의 차이보다 훨씬 크다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신다. 영적 생활은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하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기심을 좀 더 버릴 수 있고 보다 관대한 사람이 된다. 그러려면 위로부터 다시 탄생하여야 한다. 세상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먼저 육(肉)으로부터 탄생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적인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해서 그러지 않고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육체적으로 태어나지 않고서는 육체적인 생활을 할 수 없듯이,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신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첫 번째 탄생을 통해서 우리는 부모님의 자녀가 되며 두 번째 탄생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자아 발전이 아니라 재탄생을 강조하고 있으며 우리가 처한 상태를 백팔십 도 변화시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너무도 차원 높은 이 말씀에 압도된 니고데모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였다. 그는 현재의 자기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현재와 다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니고데모는 노인을 다시 훌륭하게 만드는 것은 이해하였지만 완전히 새로운 사람을 창조한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요한 3, 4)

니고데모는 새로 태어난다고 하는 교리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니고데모는 직역주의자였기 때문에 "태어난다"는 정확한 용어를 의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어려움에 대해 대답해주신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요한 3, 5-7)

니고데모의 설명은 적절하지 못했다. 그것은 육체적인 범위에만 적용될 뿐이었다.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어머니의 태 속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영적으로는 가능할 수 있다. 니고데모는 설명과 가르침을 기대하였지만 재창조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만 들었다. 하느님 나라는 새로운 창조로 제시된다. 사람이 어머니의 몸에서 나올 때는 하느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비교야 안되지만, 그것은 마치 책상이, 목수의 창조물인 것과 같다. 자연적인 순리에 따르면 그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현재의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부모의 본성을 나누어 갖고 있듯 신적인 은총에 의해서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이 만드는 것은 인간과 닮은 것이 아니지만 그가 낳은 자는 자기와 닮은 자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지만 그 그림은 화가의 본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이를 낳으면 아이는 어머니와 같은 본성을 갖는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제작이나 창조의 질서는 무엇보다도 출산과 재생 및 재탄생의 질서로써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다.
   
분명히 니고데모는 순전히 지적인 자세로 신앙을 접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놀라지 말라" 고 말씀하셨을 때 깜짝 놀랐다. 니고데모는 이러한 재출산의 결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못내 궁금하였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가 두 번째 탄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의 활동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잠시 후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신의 죽음을 통해 인류와 하느님 아버지께서 화해를 이루게 되듯이 설명의 작용에 의해 인류가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하셨다. 주님께서 암시하신 새로운 탄생은 감각기관으로는 알 수 없고 영혼에 미치는 효과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하나의 예를 들어 이러한 신비를 설명하였다. "너희는 바람이 왜 부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바람이 부는 법에 순응하여 그 힘을 유용하게 이용하고 있다. 성령도 바람과 마찬가지다. 바람의 원리에 순응하면 바람이 돛을 부풀려 배를 앞으로 미끄러져 나가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법에 순응하면 새로운 탄생을 알 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신비를 네가 머리로 이해하지 못한다 해서 이러한 법칙을 받아들이기를 미루지 말라."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요한 3, 8)

하느님의 성령은 자유로우시며 항상 자유롭게 행동하신다. 성령의 움직임은 어떤 인간적인 계산으로도 예측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언제 은총을 받는지, 그러한 은총이 우리 영혼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없으며, 죄를 혐오하기 때문에 은총을 받는지 아니면 보다 높은 선을 열망하기 때문에 은총을 받는지 누구도 모른다. 성령의 목소리는 영혼 안에서 메아리치며 성령이 베푸시는 평화와 성령이 쏟으시는 빛과 성령이 주시는 힘은 바로 영혼 속에 틀림없이 있다. 인간의 재생은 인간적인 눈으로는 직접 식별할 수가 없다.
   
니고데모는 비록 명석한 학자이긴 하였지만 그가 스승이라고 부르는 분으로부터 듣고 있는 지고한 교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당황하였다. 바리사이로서 니고데모의 관심은 인격적인 성성(聖性)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왕국의 영광에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니고데모는 다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요한 3, 9)

니고데모는 인간 안에 신적인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없으나 하느님 안에 있는 능력을 통하여 그러한 신적인 생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이 어떤 인간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가르침이라고 설명해주셨다. 따라서 바리사이인 니고데모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였다. 하여튼 하늘에 올라가 하늘의 비밀을 배워가지고 내려와 가르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늘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늘에서 내려 오신 분, 즉 하느님으로서 인간이 되신 분 뿐이며, 지금 그분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은 처음으로 자신을 사람의 아들 (Son of Man) 이라고 언급하신다. 동시에 주님은 당신이 사람의 아들 그 이상이신 분이라고 암시하신다. 주님은 천상 아버지의 외아들이시기도 하다. 실제로 주님은 당신의 신성과 인성을 주장하였다.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 간 일이 없다. (요한 3, 13)

주님께서 당신이 하늘로 다시 올라가신다거나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제자 중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 51)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요한 6, 38)

위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신다. 세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 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요한 3, 31)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니 말이 되는가?" (요한 6, 42)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 63)

주님께서 당신의 천상적인 영광이나 부활의 영광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십자가의 치욕을 빼먹지 않으셨다. 지금 니고데모에게 하신 것처럼 영광을 먼저 말씀하신 적도 가끔 있지만 그 때도 십자가형이 항상 그 영광의 조건이 되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천상의 삶과 지상의 삶을 다 사셨다.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 천상의 삶을 사셨고 사람의 아들로서 지상의 삶을 사셨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항상 함께 하시면서도 지상에 있는 인간을 위해 자신을 버리셨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인간의 구원을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달려 있다고 단언하셨다. 주님께서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가장 탁월한 십자가의 징표를 예로 드시며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 14-15)

민수기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반항조로 투덜거릴 때 독사들로 시달리는 벌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회개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로 뱀을 만들어 하나의 표지로서 똑바로 세울 것이며 뱀에게 물렸던 모든 사람들이 그 표지를 바라보면 다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과거에 뱀이 높이 세워졌듯이 이제는 당신 자신이 들어 올려질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구리뱀이 뱀의 모습은 지녔지만 독은 없었듯이, 주님께서도 십자가 기둥에 매달리실 때 죄인처럼 보이지만 죄가 없으시다. 구리뱀을 쳐다 본 모든 사람들이 뱀에 물렸다가 다 나았듯이,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은 악이라는 뱀에 물렸다가 다 치유될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의 아들로 나타나는 것만으로는 인간을 구원하는 데 충분치가 않다. 그렇게 되면 주님은 위대한 스승이요 훌륭한 귀감이 되실지언정 구세주가 되시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의 육체를 지니고 죄에서 인간을 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주님께는 더 중요한 일이었다. 성현들이 자신의 삶을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듯이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실 것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증오와 육욕과 시기심의 독은 현명한 충고와 사회적 개혁으로는 치유할 수가 없다. 죄의 값은 죽음이므로 죄를 보상하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만 이뤄진다. 고대 희생제사에서는 희생제물과 함께 전가된 죄를 상징적으로 불로 태웠듯이, 십자가 상에선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하여 세상의 죄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제로서 똑바로 서 계실 것이며 또한 희생제물처럼 엎드려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치켜 올려진 표지 가운데 가장 위대한 두 개의 표지는 똑바로 일으켜 세워진 뱀과 높이 매달리신 구세주다. 그러나 이 두 표지는 하늘과 땅 차이다. 한 사건의 현장은 사막이며 청중은 수천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또 다른 사건의 현장은 우주요 청중은 전 인류였다. 한 사건에 의해서는 육체적인 치유가 이뤄졌지만 이내 죽음에 의해 다시 무효화되어 버렸고, 또 다른 사건에 의해서는 영혼이 치유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그러나 한 사건은 다른 사건의 예표였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죽음을 당하는 것은 자원해서 당하는 것이지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어서 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돌아가신 유일한 이유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 16)

한 노인이 당신의 기적으로 온 세상을 놀라게 하신 천상 스승을 만나 뵈러 온 이 밤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 생명은 베들레헴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영원으로부터 하느님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고 파견되셨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훌륭한 교사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은 오래 살아서 자신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고 지혜와 체험을 얻는 것이다. 죽음은 위대한 스승에게는 항상 비극이다.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게 되었을 때 그의 가르침은 그것으로 영원히 끝났다. 부처와 그의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에 대해 죽음은 장애물이었다. 노자가 죽음으로써 도(道)라든지 적극적인 자립독행에 반대되는 "무위"와 같은 그의 가르침도 끝났다.

소크라테스는 죄란 무지에서 나오기 때문에 앎에 의해서 선하고 완벽한 세계가 이룩된다고 가르쳤다. 동양의 성현들이 관심을 갖고 있던 것은 운명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얽매어 있는 인간이었다. 따라서 부처도 주장하기를 욕망을 없애면 평화를 얻는다고 가르쳤다. 80세에 부처가 죽었을 때 그는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준 계율을 따르라고 지시했다. 공자는 군주와 신하, 아버지와 아들, 형제들, 남편과 아내, 친구와 친구 관계를 서로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완전한 국가를 형성하는 도덕적 체계를 만들려다 그가 죽음으로써 끝나고 말았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와 말씀하시는 중에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신다. 그나마 가장 놀라운 가르침은 아무도 당신이 살아계신 동안에는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당신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그러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서 고금을 통해 그 어떤 성현도 자신의 가르침을 명백히 밝히기 위해 죽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한 위대한 스승이 있으니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고 사람들을 자신에게 끌어 모으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교리나 가르침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높이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 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무 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 게 될 것이다" (요한 8, 28)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은 자기의 가르침이 아니고 자신의 인격이라고 하신다. 그분을 죽음에 부친 후에야 그분이 진리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연속적인 실패의 종말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성공이며 지상에서 수행해야 할 사명의 절정이다.
   
따라서 부처와 그리스도의 석상이나 그림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부처는 언제나 앉아 있는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고 있으며 몸 쪽으로 손을 포개고 있다. 앉아계신 그리스도는 없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일으켜 세워져 있으며 우러러 보게 되어 있다. 그의 인격과 죽음이 그의 가르침의 핵심이자 영혼이다. 십자가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핵심을 차지한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7. 니고데모와 뱀과 십자가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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