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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11. 진복팔단

[그리스도의 생애] - 11. 진복팔단


두 개의 산이 2막 극에서 1막과 2막으로 연결되어 있다. 두 산은 진복팔단의 산과 갈바리아산이다. 진복팔단을 설파하기 위해 첫 번째 산을 오르신 주님께서는 당신이 설교하신 바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두 번째 산을 오르셔야만 했다.
생각이 깊지 못한 사람들은 산상설교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정수" 라고 말한다. 그러나 누구나 진복팔단을 자신의 삶 속에 실천하게 되면, 세상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낮과 밤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듯이 산상설교와 십자가 형벌을 분리할 수 없다.
진복팔단을 가르치신 날,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망증서에 서명하신 것이다. 인간의 육체를 뚫고 들어가는 못과 망치 소리는 주님께서 행복하고 복된 삶을 가르쳐 주셨던 산중턱에서 되돌아 오는 산울림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주님의 길은 세상의 길과는 정반대다.

적을 만들고 사람들을 반목하게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은 세속의 정신에 도전하는 것이다. 각 시대에 정신이 있듯 세속에도 정신이 있다. 분석되지 않은 가정들이 세상 사람들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누구나 "인생은 한 번 뿐이다" 라거나 "가능한 한 인생을 실컷 즐겨라", "인생을 아무도 모른다", "성(性)이란 즐기기 위한 것이다" 는 등의 세속적인 표어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인기를 잃어 버리게 된다.

진복팔단에서 주님께서는 여덟 가지 얄팍한 세속적인 표어를 ㅡ"안정", "복수", "웃음", "인기", "손해 안보기", "성(性)", "무력" 그리고 "위로" ㅡ 택하시어 그것들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으신다.
"부자가 아니면 행복할 수가 없다" 고 말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마음으로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고 말씀하신다. "못된 짓은 결코 그냥 놔두지 말라" 고 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참는 자는 행복하다" 고 하신다.
"웃어라, 그러면 세상 사람들도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고 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다" 고 말씀하신다. "성적 본능은 타고난 것이기에 자유스럽게 그 본능을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욕구불만에 싸이게 될 것이다" 고 하는 자에게 주님은 "마음이 깨끗한 자는 행복하다" 고 말씀하신다.
"인기를 끌고 유명인사가 되도록 하라" 고 말하는 자에게 주님은 "나 때문에 사람들이 너를 욕하고 박해하며 얼토당토 않게 비방할 때 너는 행복하다" 고 말씀하신다. "평화시에 전쟁을 대비하라" 고 하는 자에게 주님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고 말씀하신다.

영화나 소설의 주제를 이루는 천박한 상투적 문구들을 주님은 조소하신다. 주님은 그들이 예배하는 것을 불태우고, 인간을 성의 노예로 전락시키지 않도록 잘못된 성적 본능을 정복하고, 행복이란 풍성한 물질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경제적인 획득을 자제하도록 제안하신다. 행복이란 자기표현과 방종, 즐기기, "내일 죽을 지 모르니 먹고 마시고 즐기라" 는 데 있다는 거짓된 진복팔단을 경멸하신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정신 이상과 불행, 헛된 희망, 두려운 걱정을 낳기 때문이다.

진복팔단의 충격에서 빠져 나가려고 하는 자들은 구세주께서는 우리 시대가 아닌 구시대에 태어나신 분이기에 그분 말씀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주님은 그분이 태어난 시대나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시대에 속한 자들이다. 마호멧은 그가 태어난 시대에 속하기 때문에 남자는 한꺼번에 네 명의 부인 외에도 첩들을 거느릴 수가 있다고 말했다. 마호멧은 우리 시대에도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차례대로 다스릴 수만 있으면 많은 아내를 거느려도 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시대에 속하지 않으신 것처럼 그분이 태어난 시대에도 속하지 않으신다. 한 시대와 결혼하는 것은 다음 시대에는 과부가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않으시기에 모든 시대의 모델이 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시던 사회 질서에 근거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복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마태오 5, 18)

산상설교의 핵심은 주님께서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하신 방법이다. 한 가지 표현은 "너희는 들었다" 이고 다른 한 가지는 짧고 강조적인 단어 "그러나" 이다. 주님께서 "너희는 들었다" 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 들어왔으며 지금도 도덕 개혁자들로부터 듣고 있는 것을 가리키신다.
모든 법전과 국법과 교훈은 본능과 이성간의 지역 풍습 및 지고한 관념간의 중간적인 척도들이다. "너희는 들었다" 고 말씀하실 때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부처의 팔정도(八正道)와 공자의 군자의 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적인 행복, 힌두교의 넓은 마음, 그리고 현대의 모든 인도주의자들을 포함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현대의 인도주의자들은 옛 법규들의 일부를 자기 나라 말로 옮겨서 그것을 새로운 생활양식이라고 한다. 이 모든 타협에 대해서 "너희는 들었다" 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모세가 그렇게 말했으며, 이방인 종족들이 그렇게 제안했으며, 원시민족들은 그 말을 존중했다. 그러나 엄청나고 두려운 '그러나' 라는 말씀이 뒤따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주님께서는 영혼을 들여다 보시고 생각을 간파하시며 죄를 짓고자하는 원의(願意)까지도 죄로 단정하신다. 만일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그러한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남의 것을 훔친 후에 손을 깨끗이 하려 하거나 남을 강탈한 후에 몸이 병에 안 걸리게 하는 따위의 건강법을 폐기하라." 주님께서는 마음 속을 꿰뚫어 보시고 죄를 짓고자 하는 의도까지 죄로 단정하신다. 주님께서는 악한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지 않으셨다. 악의 씨앗이 뿌려지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드러나지 않던 죄들이 정신병이나 노이로제, 강박관념으로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시초에 그러한 죄들을 뿌리 뽑아야 한다. 회개하라 ! 마음을 깨끗이 하라 ! 통계표에 오르거나 감옥에 가둘 수 있는 악은 교정하기에 너무 늦은 것이다.

남자가 여자와 결혼할 때는 그녀의 몸만이 아니라 영혼과도 결혼하는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단언하신다. 결혼이란 전 인격체와 결혼하는 것이다. 비록 육체에 대해 싫증이 났다하더라도 그녀의 몸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는 없다. 그녀의 영혼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들었다" 고 하시며 크게 꾸짖으셨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주님께서는 모든 퇴폐 문명의 허튼 소리들을 요약하신다. "'이혼하라. 하느님은 네가 불행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고 하는 말을 너희는 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러나' 가 뒤따른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면, 이것은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
또 그 버림 받은 여자와 결혼하면 그것도 간음하는 것이다." (마태오 5, 32)

육체를 잃어 버린다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영혼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영혼이야말로 육체가 줄 수 있는 전율보다 더 고귀한 것이며 우주 자체보다도 훨씬 가치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접촉감염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원하는 욕구에서 깨끗하게 지켜주실 것이다. 배신을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배신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된다" (마르코 10, 9)

어떤 사람도, 어떤 재판관도, 어떤 나라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풀 수 없다. !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죄는 환경에서 기인한다고 하셨다. 즉 B급 우유 때문에, 무도장이 적어서, 돈을 충분히 쓰지 않아서 죄가 생겼다고 하는 모든 사회적 이론들을 다루신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너희는 들었다" 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라고 하는 '그러나'가 뒤 따른다. 주님께서는 죄와 이기주의, 탐욕, 간음, 범죄, 절도, 뇌물수수, 정치적 부패, 이 모든 것들을 인간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단언하셨다.

죄란 우리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지 신체적인 구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할아버지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었다거나 할머니로부터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유전받았다는 구실로 육욕에 대해 변명할 수는 없다. 주님께서는 죄란 육체를 통하여 영혼에 전달되며, 육체는 의지로 움직여진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그릇된 자기 표현에 대해 싸우면서 주님께서는 스스로 정리할 것을 엄히 말씀하셨다. "잘라 내 버리라" 그리고 "빼내 버리라" 고 말씀하신다.

오른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 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또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손을 찍어 던져 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마태오 5, 29-30)

사람들은 육체가 썩거나 독이 퍼지지 않도록 다리나 팔을 자른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은 육체의 할례를 영혼의 할례로 바꾸었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기보다는 탐닉한 육욕의 뿌리를 뽑아 버리고 욕정을 갈갈이 잘라내도록 권고하신다.

다음으로 주님께서는 "복수하라", "고발하라", "바보가 되지 말라" 고 하는 모든 사람의 말 속에 들어있는 복수와 미움과 폭력에 대해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다 알고 계셨으며 그에 대해 말씀하신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마태오 5, 38)

그리고 나서 두려운 '그러나' 가 나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마태오 5, 38-41)

왜 다른 쪽 뺨을 돌려야 하는가? 증오는 씨앗처럼 불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열 사람에게 연이어 미움과 폭력을 설교하고서 첫 번째 사람에게 두 번째 사람을 치게 하고 두 번째는 세 번째 사람을 치게 하면 증오가 열 사람 모두를 지배할 것이다. 이러한 미움을 중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 사람이 (예로서 다섯 번째 사람) 다른 쪽 뺨을 내미는 것이다. 그때 미움은 끝난다. 더 이상 미움은 퍼지지 않는다. 구세주를 위해서 폭력을 흡수해 버려라. 구세주께서는 죄를 흡수해 버리시고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원리는 무죄한 자가 죄인을 위해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적을 없애도록 하신다. 전혀 저항하지 않으면, 적은 우월한 도덕적인 힘에 의해 정복되기 때문이다. 일주일간 나를 괴롭힌 자를 일년간 참아 주는 것, 나를 욕한 사람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내는 것, 내 물건을 훔친 자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 나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나에게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거나 내가 자유를 반대한다는 더 심한 거짓말을 하는 자에게 결코 미움으로 갚지 않는 것,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러 오신 난해한 것들이며,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 시대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시대에도 쉽게 받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영웅들이나 위대한 사람, 성인, 세상의 소금이 될 거룩한 사람, 군중 속에 누룩과 같은 사람, 군중들의 엘리트, 세계를 변혁시킬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사랑스럽지 않은데 그들에게 사랑을 넣어 준다면 그들은 사랑스러운 자가 될 것이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당신 사랑을 넣어주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모든 사람이 사랑스러울 수 있겠는가?

산상설교는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가치들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세상은 산상설교의 가치에 따라 살려는 사람들을 누구나 십자가형에 처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가치를 설파하셨기에 죽으셔야만 했다. 갈바리아는 주님께서 산상설교에 대해 치루신 대가였다. 오로지 평범한 자들만이 살아 남는다. 검은 것은 검다하고 흰 것은 희다고 하는 사람들은 여타의 다른 이설(異說)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처형된다.

오로지 회색분자만이 살아남는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고 하신 주님께서 경제를 으뜸으로 생각하는 세상에 오신다면, 또 어떤 사람들은 집단이익을 위해 살고, 사람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산다고 하는 시장에 서 계신다면 어떻게 될까? 주님은 너무도 가난해서 평생토록 머리 누일 곳도 없으실 것이다. 어느 날 돈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돌아가실 것이다. 마지막 돌아가실 때는 너무도 가난한 나머지 입고 있던 옷마저 벗겨갔으며 태어날 때 남의 구유를 쓰셨듯이 장사지낼 때도 남의 무덤을 쓰게 될 것이다.

강자의 복음을 선포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권고하며 그리스도교 덕을 "약자" 의 덕이라고 비난하는 세상에 주님께서 오셔서 "참는 자는 행복하다" 고 말씀하신다. 그 결과로 어느 날 억센 야만인들이 당신 등을 채찍으로 내려 칠 것이며, 사람들이 낫을 들고 갈바리아 산 언덕의 풀을 깍고 악에 의한 최악의 것을 참는 자의 인내를 시험하기 위해 망치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지만, 그 인내는 극한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결국은 사랑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죄라는 개념을 병적인 것이라고 조롱하며 과거의 죄에 대한 보속을 죄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간주하는 세계에 주님이 오셔서 자기 죄에 대해 "슬퍼하는 자는 복되도다" 고 설교하시면, 주님은 두 눈을 가리운 채로 바보라고 놀리움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주님의 몸에 채찍을 가해 주님의 뼈까지 셀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분의 머리에 흘러내리게 할 것이며, 십자가에서 내려 오지 못하는 그분의 연약함을 보고 비웃을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를 부인하고 옳고 그름은 견해차이일 뿐이라고 말하여 덕과 악에 대해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상에 주님께서 오셔서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나다" 는 진리와 절대자를 목말라하는 자는 복되도다고 말씀하시면, 사람들은 그들이 말하는 넓은 마음으로 폭도들에게 주님과 바라빠 가운데 누굴 택할 것인지 선택권을 줄 것이며, 도둑들과 함께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하느님이란 강도떼와 다를 바가 없는 분으로 강도들과 함께 죽음을 같이 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한다.

"내 이웃은 지옥이다." 고 말하며, '나에게 반대하는 모든 것은 무(無)다'라거나, '오로지 중요한 것은 나다' 라거나, 내 뜻이 지상의 법칙이고 내가 결정한 것은 옳으며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내 자신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상에 주님께서 오셔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 말씀하신다면 주님은 조금도 자비를 받지 못하시리라는 것을 아시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주님의 몸에서 다섯 줄기의 피가 흐르게 할 것이며, 주님의 목마른 입속에 식초와 쓸개즙을 부어 줄 것이고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너무도 무자비하게 주님의 성스러운 가슴을 창으로 찌를 것이다.

인간을 성(性)의 관점에서 보고, 순결을 불감증으로, 정결을 좌절된 성으로, 절제를 비정상으로, 죽을 때까지의 부부의 결합을 권태로 생각하며 결혼이란 성생활이 지속하는 한만 계속된다고 주장하며 하느님께서 매신 것은 아무나 풀 수 있고 하느님께서 봉하신 것도 아무나 뜯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세상에 주님께서 오셔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고 말씀하신다면, 벌거벗기운 채 십자가에 달리시어 순결은 비정상적인 것이며 동정녀는 신경병환자들이며 육욕이 옳은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미친 듯이 떠들어 대는 사람들과 천사들의 구경거리가 되실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온갖 속임수와 계략을 이용해야 하며 겉으로는 평화의 비둘기로 가장하며 안으로는 폭탄을 가득 품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 세상에 주님께서 오시어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거나 "평화를 심기 위해 악을 뿌리 뽑는 자들은 행복하다" 고 말씀하신다면, 주님께서는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장 어리석은 전쟁을 치르고 있음을, 즉 하느님의 아들을 거스르는 전쟁을 하고 있음을 보시며 쇠와 나무와 쓸개즙으로 폭력을 쓰며, 싸움에 진 자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지 않도록 주님의 무덤에 감시병을 배치하는 어리석은 전쟁을 보실 것이다.

인기와 실익(實益)을 위해서는 평생토록 아첨하며 사람들의 환심을 사야 한다고 믿고 있는 세상에 주님께서 오시어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늬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면,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친구가 하나도 없을 것이며 폭도들은 당신을 죽이라고 외치며 당신 몸은 진홍색 넝마조각처럼 축 느러진 채로 언덕 위에 버려진 추방자가 되실 것이다.

진복팔단은 이것만 따로 취급할 수는 없다. 진복팔단은 이상이 아니며 갈바리아산의 십자가와 떼놓을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요 실재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형에 처하라는 것이다.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눈을 빼내고 팔을 잘라내며, 정열이 밖에서 만족을 구하고자 할 때 속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우리를 죽이려는 자들을 용서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며, 자유의 조건으로써 마음 속에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과 진실을 가지고 있을 때까지 자유를 떠들지 말 것과, 세속에 살면서 거기에 물들지 말 것과 자아본위 정신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정당한 쾌락까지도 때때로 부인할 것 등의 모든 것들은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옛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진복팔단을 설교하신 말씀을 듣는 자들은 십자가 위에 매달리며, 저속한 삶에 대해 죽음으로써 보다 높은 차원에서 행복을 찾으며, 세속이 성스럽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세상 사람들이 이상(理想)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성스러운 것으로 존중하도록 초대를 받았다. 천국은 행복이다. 그러나 인간이 두 개의 천국, 즉 아래에 있는 대용품의 천국과 위에 있는 진짜 천국을 다 누리기에는 너무도 벅차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진복팔단에 이어 즉시 네 가지 "불행선언"을 덧붙이셨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루가 6, 24-26)

스승께서 부자와 배부른 자와 웃고 지내는 자와 인기있는 자들에게 "불행선언"을 선포하셨을 때 십자가형은 멀리 있을 수가 없었다. 진실은 산상설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골고타 언덕 위에서 산상설교를 그대로 실천하신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만일 네 가지 불행선언에 정반대되는 자들, 즉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 슬퍼하는 자, 멸시받는 자들 때문에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이상 네 가지 불행선언은 도덕적인 단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진복팔단을 외친 산 위에서는 주님께서 극기의 십자가에 자신을 내던지라고 명하시며, 갈바리아 산위에서는 바로 그 십자가를 몸소 껴안으셨다. 3년이 지난 후에야 십자가의 그림자가 해골 산에 드리우겠지만, 주님께서 "행복의 길"을 설파하시던 날 이미 십자가의 그림자는 주님의 마음에 드리워져 있었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11. 진복팔단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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