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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17. 주님의 자기 증언

[그리스도의 생애] - 17. 주님의 자기 증언


하느님께 가까이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인간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더 절실히 느끼게 된다. 밝은 태양빛 아래서보다는 촛불 밑에서 그림을 볼 때 그 결점이 적게 보이듯이, 하느님과 떨어져 있는 영혼은 하느님과 아주 가까이 있는 영혼보다 도덕적으로 더 완전하다고 믿는다. 세상의 각광과 유혹은 버리고 오랫동안 하느님의 얼굴 빛을 대한 자들은 가장 먼저 무거운 죄의 짐으로 억눌려 있는 자신을 인정하게 된다.

그토록 인간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성 바오로도 자신을 가리켜 "죄인중에 죄인" 이라고 했다. 성인들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죄를 스스로 깨닫게 되며 무거운 죄를 보고 낙담한다. 악인들은 자기와 같이 악한 무리들과 함께 있을 때 보다는 순진무구한 어린이 앞에서 죄책감을 더 느끼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부당한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러나 하느님과 하나라고 주장하신 주님께서는 죄가 있다거나 결점이 있다고 한번도 고백하신 적이 없다. 그것은 주님께서 도덕적으로 둔감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죄를 속속들이 꿰뚫어 보셨다. 세상에 누가 수많은 대중 앞에 대담히 서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너희 가운데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고 증명할 수 있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왜 나를 믿지 않느냐? (요한 8, 46)

주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셨지만 추호라도 죄가 있다는 의심은 받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라고 기도하게 하셨지만, 마지막 고통을 당하실 때에도 당신은 그런 기도를 하실 필요가 없었다. 주님께서는 당신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네 죄는 용서받았다." 그러나 용서를 청하신 적은 없다. "만일 나에게서 어떤 죄도 찾아낼 수 없다면 내가 진실됨을 믿어라" 라고 주님은 도전하셨다.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어두운 세상의 "빛" 이라고 주장하셧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 8, 12)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세상의 빛은 주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라는 점이다. 물리적으로 볼 때 세상을 비추는 것은 태양 하나뿐이듯이, 영적으로 세상의 유일한 빛은 당신 자신이라고 주장하셨다. 주님이 안계시면 모든 영혼은 어둠에 휩싸일 것이다. 방 안의 먼지는 빛이 들어와야 볼 수 있듯이 세상의 빛이신 그분이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비춰줄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알 수 없다. 착하다고만해서 자기가 세상의 빛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아무리 훌륭한 인간성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허물과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는 자기가 쓴 경전이 어둠 속에 헤매는 중생들을 인도하는데 유익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는 전혀 말한 적이 없다. 불교는 한 왕자가 존재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존재의 고뇌를 생각하며 처자식을 버리고 떠남으로써 세상에 대한 혐오감에서 시작됐다. 세상의 온갖 고통으로 시달리고 지친 부처는 도덕에 의존했다.

그러나 주님은 한번도 이러한 혐오감을 갖지 않으셨다. 주님이 빛이시라면 어둠 속에서 넘어져 다치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호멧은 임종하는 순간에 자신은 세상의 빛이 아니라고 인정했다.

"저는 두려워하며 간구하옵고 피난처를 구하며 약하고 자비가 필요하오니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간구하듯 당신께 간청하며 당신 앞에 제 죄를 고백하나이다."

공자 역시 어두운 죄에 너무도 압도되었기 대문에 자기가 세상의 빛이라는 주장은 결코 하지 않았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나는 덕을 완전하게 실천할 수 없었고, 내가 배울 바를 완전하게 표현하거나 추구하지 못했으며,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 줄 수 없었으니 이 모든 것이 다 내가 슬퍼하는 바다… 지식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숭고함의 요체를 실현에 옮길 수 없었다."

부처는 죽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 아난다에게 말했다. "오, 아난다야, 내가 너에게 가르치고 분명히 가르쳐준 교리와 법규들은 내가 너를 떠난 후에 너의 스승으로 삼을지니라."

주님께서는 당신 가르침을 하나도 글로 남겨 놓지 않으셨다. 주님의 교리는 주님 자신이었다. 이상과 역사가 모두 주님 안에 있다. 다른 모든 윤리적 스승들이 가르친 진리와 그들이 세상에 던져 준 빛은 그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밖에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신적인 지혜가 곧 자신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일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당신의 위격과 신적인 지혜를 하나로 보시며 주님께서는 보다 정확히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 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 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4, 6-7)

이것은 길이 없으면 갈 수 없고, 진리가 없으면 알 수 없으며, 생명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길은 추상적인 법전과 계명으로 나타날 때가 아니라 인격적인 것일 때 사랑스러운 것이 된다. 플라톤이 일찍이 말한 대로 "세상의 아버지는 찾기 힘들며, 찾았다 하더라도 서로 의사를 소통할 수 없다."
플라톤의 말에 주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 계시 되시지 않는 한 아버지는 찾기 어렵다고. 진리를 먼저 찾은 다음 그리스도를 발견하려고 하는 것은 초 심지에 불을 붙여 태양을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과학적 진실을 통해 우주를 지적으로 알 게 되고 역사적 사실을 통해 문명의 흥망과 시간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 하느님을 지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죄인들의 세상에 당신 뜻을 전하실 수 있는 유일하고 가능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마태오 11, 27)

생명은 아버지와의 영원한 통교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고 있다. 그리스도 전에 왔던 그들과 그 후에 오는 자들 그리고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을 제시하는 모든 사람들은 인류의 도적이요 강도라고 주님은 비유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다 도둑이며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 오면 안전할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요한 10, 7-10)

그리스도외에 누구도 당신의 인격을 평화와 영생을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문이라고 하셨다. 문은 구분의 상징이다. 문의 바깥 쪽은 세상이고 안쪽은 집이기 때문이다. 또한 문은 보호와 환대와 관계의 표지이다. 옛 트로이 도시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었듯이 주님께서는 당신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시라고 하셨다. 주님은 당신과 영혼들이 사랑의 환희 속에서 서로 만나는 밀회의 장소라고 자신을 부르셨다. "마음대로 가고 온다" 는 말은 명상적인 삶과 실제적인 삶의 일치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의 내적인 일치의 결합은 실제 세계에서 실천적인 순명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모든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판단하는 권리도 주장하셨다. 그 누구도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이 없다. 주님께서는 만민의 재판관으로서 다시 영광의 옥좌에 앉으시고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시며 각자의 행적에 따라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거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모든 사람들의 양심을 꿰뚫어 보고 은밀한 모든 동기를 알아내며 그에 대해 영원한 심판을 할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섬칫하다.

그러나 이러한 최후심판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아직 요원하며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최후심판의 상징이자 예행연습은 예루살렘의 파괴로서, 그리스도가 사시던 그 세대가 끝나기 전에 성취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세상 종말에 이루어질 최후의 파멸에 대한 서곡이 될 것이다. 세상의 종말이 이루어질 때 하느님 왕국은 영원하고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하늘에는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고 땅에서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 그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그가 뽑은 사람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불러 모을 것이다." (마태오 24, 30-31)

주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는 당신께서 활동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신 지역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와 제국을 다 심판하실 것이다. 두 번째 오실 때에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으로서 오실 것이다. 주님은 심판이 번개처럼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리라는 경고외에 달리 말씀하시지 않는다. 주님은 "고통의 인간" 으로 오셨으나 심판 때는 영광스럽게 오실 것이다. 주님의 고통받는 인간의 속성은 주님의 신원을 입증하기 위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부활하신 후 주님은 당신의 상처를 여전히 지니고 계셨다. 천사들이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며 모든 민족은 두 부류로 나눠질 것이다. 즉 양과 염소의 무리로 나눠질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가르셨듯이 심판 때에도 그들을 가르실 것이다.

주님은 당신을 "나는 착한 목자다" 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 염소 떼와 당신 양떼를 가르심으로서 착한 목자임을 증명해 주실 것이다.
양들은 주님께 알뜰하게 시중을 드렸다고 칭찬을 받을 것이다. 무의식적인 봉사라 하더라도 다 주님께 봉사한 것이었다고 칭찬을 들을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있다.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놀란 사람은 사회 사업가들로서, "언제 우리가 당신이 굶주린 것을 보았습니까?" 하고 묻게되는 경우와 같을 것이다. 다른 한편 악한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주의 이름으로 이웃에게 베풀어 주기를 거부했을 때 그것이 주님을 거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 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 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 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 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 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 그들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임금은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 갈 것이다." (마태오 25, 31-46)

주님의 말씀은 자선행위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위대한 자비심과 동정심은 주님께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 행위에는 행위자가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주님께서는 동정심을 나타내는 모든 친절한 행위를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셨다. 모든 친절한 행위들은 묵시적으로나 명시적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이뤄지며, 친절을 거부하는 행위도 묵시적이거나 명시적이거나 주님의 이름으로 이뤄진 것이다. 마호멧은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자기 이름으로 베풀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 이름으로 할 것을 조건으로 하셨으며, 만약 단순한 인간으로서 그러한 조건을 제시하셨더라면 아주 어리석은 짓이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전지하신 의지만이 언제가 자선이고 언제가 자화자찬의 행위인지를 결정하는 모든 자선행위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동기를 판단하실 수 있으시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주장하신 바를 너무도 결정적으로 이행하실 것이기에 그 파문은 영원할 것이다. 구세주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이 재판관이시기도 하다고 말씀하셨다. 같은 분이 심판자이시자 구원자이신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섭리의 조화인가.

주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여러 차례 주장하셨음을 고려해 볼 때 - 그 예로서 부모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고, 박해를 받을 때에도 주님을 믿으며, 주님과 일치하고 있는 우리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육체를 희생할 각오가 되있어야 한다는 주장 - 주님을 단순히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겸손하지 않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겸손이라는 것은 자신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실제의 자기보다 자신을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겸손한 것이 아니라, 허세부리는 바보이다. 어떤 사람이 양심과 역사와 사회와 세계를 지배하는 특권을 주장하면서 어떻게자기가 "마음이 양순하고 겸손하다" 고 또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님이 인간이면서 또한 하느님이시라면 주님의 말씀은 옳은 것이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서 당신이 주장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면 그분의 고귀한 일부 말씀들은 착한 사람의 정신이 아니라 루치펠의 정신을 나타내는 과장된 자기아첨의 분출외에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진실을 포기해 버리신다면 자아포기의 법을 선포해보았자 그분께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심지어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것도 만일 그것이 과대망상과 사악한 자만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믿지 못할 일이며 케케묵은 과거지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님은 진실한 교사라고도 불릴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한 교사라면 누구도 자기의 가르침을 하늘에 계신 위대하신 하느님의 이름과 지위와 동등한 것으로 오해하지 않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이 오류투성이의 불성실한 분이시라는 가정을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주님은 말 그대로 진실을 말씀하셨으므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든가 양자간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통해 지상에서 기적과 자비로운 일을 행하셨음을 믿는 것이 인류 역사상 그러한 일이 이루어진 가장 찬란한 순간에 대해 도덕적인 눈을 감아 버리고 실망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 주장하신 바를 그대로 따라 할만큼 착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만약 누군가 그렇게 주장한다면 교만하고 불경스러운 자일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자자기 주장한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주님은 크리스챤이라고 하는 당신의 도덕적인 추종자들보다 훨씬 낫기는커녕 그들 중 가장 악한 자들보다도 훨씬 못한자가 되셨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해서 그렇게 새빨간 거짓말쟁이, 남을 경멸하는 허풍장이를 모델로 삼을 수 있었을지 설명하기보다는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 자기가 신이라고 한 말을 믿는 것이 더 쉽다. 바로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이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광기를 애도하거나 주님의 인격을 흠숭하던가 들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윤리문화의 교수였다는 가정에 근거하여 선택할 수는 없다.
오히려 체스터톤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목수의 견습공이 어슬렁거리며 마치 어깨 넘어로 보는 사람처럼 태연히 그리고 아주 무심하게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나는 있었다'라고 말하자 풀이 마르고 새들이 공중에서 떨어져 죽기를 고대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자신의 신(神)을 섬기고 있으며 전쟁과 죽음에 대해 무딘 로마인 하사관은 주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동안 정답을 알 게 되었으며 그의 이성과 양심이 이 진리를 인정하였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지진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하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마태오 27, 54)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17. 주님의 자기 증언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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