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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14. 생명의 빵

[그리스도의 생애] - 14. 생명의 빵


한 해 동안에 두 가지 잔치가 벌어졌다. 하나는 요한 세례자가 설교한 헤로데의 궁전에서 열렸고, 또 하나의 잔치는 주님께서 야외에서 베푸신 것이었다. 주님께서 갈릴래아 바다를 건너 가셨는데 그것은 아마도 요한 세례자를 방금 죽인 헤로데의 화를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예수를 따라 갔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기적을 보았던 것이다. (요한 6, 2)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동기는 다소 애매하지만 이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점점 강하게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으로 물러가셨을 때 그들은 크게 실망했다. 복음의 전차는 이 전차를 모는 자들이 잠깐 쉴 수 있도록 잠시 멈췄다.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이었으며, 군중은 (여자와 어린이는 빼고) 오천 명으로 불어났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고 말씀하였다.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마르코 6, 31)

그들이 도착한 조그마한 마을은 바다를 건너 가파르나움에서 육마일쯤 떨어진 곳이었다. 해안가에 도착하여 주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군중들이 그곳에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병자를 함께 데리고 왔으며, 무엇보다도 굶주리고 있었다. 그들은 주님께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주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마술사나 병자를 고칠 수 있는 의사 정도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군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 (마르코 6, 34)

주님께서는 군중을 백오십 명씩 한 줄로 서게 하시고, 각 줄은 밑에 있는 줄보다 약간씩 높이 앉게 하셨다. 그들 한가운데 주님께서 서 계셨으며, 필립보를 시험하시며 이렇게 물으셨다.

예수께서는 큰 군중이 자기에게 몰려 있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요한 6, 5)

필립보는 군중을 먹이는데 이백 페니어치가 필요하다고 재빨리 계산했다. 예수께서는 "얼마의 돈이 필요하냐?" 고 묻지 않으시고 "어디서 빵을 구할 것이냐?" 고 물으셨다. 필립보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쳐주신 주님께서 빵을 대실 수가 있으시다고 대답했어야 했다. 안드레아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있는 소년을 가리켰다. 안드레아도 계산을 하며 물었다.

"여기 웬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요한 6, 9)

구약성서를 보면 하느님은 사소하고 하찮은 것을 이용하여 당신 목적을 성취하셨다. 파라오 딸의 마음을 빼앗은 아기 요람 위에 있던 창포나, 에집트에서 기적을 행한 모세의 양치는 지팡이나, 팔레스타인을 제압한 다윗의 돌팔매 끈같은 시시한 것들을 기꺼이 이용하여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신다. 여기서는 빵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최후만찬에서 보게 될 동작과 유사한 동작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마르코 6, 41)

밀알이 땅에서 서서히 많은 열매를 맺듯이, 빵과 물고기도 신적인 속성과 정을 거쳐 불어나서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 만약 주님께서 돈을 주셨더라면 아무도 배불리 먹지 못했을 것이다. 있는대로 최선을 다하면 하느님께서 나머지를 채워주신다. 주님께서는 남은 빵을 모으라고 명하셨다. 모두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인간의 계산에 의하면 항상 부족하지만, 하느님의 계산에 의하면 항상 남아 돌아간다.

군중들에게 베푼 기적의 효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다. 주님은 그러한 능력을 빵을 많게 하실 때 보여 주셨다. 이러한 기적을 보면서, 그들은 즉시 광야에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만나를 준 모세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모세는 자기가 그리스도나 메시아의 예표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들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 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신명기 18, 15)

만약 모세가 광야에서 빵을 줌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했다면 바로 이 사람이 모세가 가리키던 그분이 아니겠는가? 이분도 기적적으로 빵을 주셨기 때문이다. 로마인의 멍에를 벗겨서 그들을 자유롭게 해 줄 이 사람보다 더 훌륭한 왕이 누구겠는가? 여기에 해방자가 있으니 여호수아보다 더 위대하시고, 무기를 들고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는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있다.
폭군들을 대항해 일어서서 백성을 풀어 줄 다윗이나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왕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이미 주님을 예언자요 교사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제는 주님을 왕으로 선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을 다 읽으시는 주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세속적인 것인지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다. (요한 6, 15)

그들이 주님을 왕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분은 왕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동방박사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에 이렇게 물었다.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오 2, 2)

주님의 왕권은 십자가라는 신적인 "필연성"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지 대중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왕관을 거부하신 것이 이번으로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사탄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절하면 왕권을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였다. 나중에 주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고 하실 것이다. 그러나 군중은 주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주님은 거부하셨다. 주님은 왕좌에 "일으켜 세워질" 것이며 그 왕좌는 십자가이고 주님은 마음을 다스리실 것이다.

이렇게 정치적인 왕권으로부터 도주한 것이 유다의 마음속에 의심을 불어넣게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를 처음에 배반자로 언급한 것은 이번의 기적과 바로 뒤에 이어진 주님의 연설과 관계된다. 주님께서는 사탄이 제의한 것과 같은 세속적인 통치권을 거부하셨기 때문에, 나중에 "우리에게는 카이사르외에 다른 왕은 없다" 는 말을 들을 각오를 하셔야만 했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아시기에 혼자 산으로 피하셨다. 어떤 부정한 손도 주님의 머리위에 가시관 외에 어떤 왕관도 씌우지 못할 것이다. 주님은 사도들이 값싼 인기에 "현혹" 되지 말아야 함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들을 강제로 배에 태워 5~6 마일쯤 떨어진 호수 반대쪽으로 가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가시지는 않았다.

아침 세 시와 여섯 시 사이에, 사도들이 비에 젖고 피곤해서 배에서 떨고 있을 때 폭풍이 일어났다. 이번이 그들이 사도로 불리운 후 호수에서 만나는 두 번째 폭풍이었다. 첫 번째 폭풍은 주님께서 지금보다 훨씬 일찍 방문하셨을 때 일어났다. 둘 다 밤에 일어났으며 격렬했다. 이 바다에서 생계를 꾸려왔던 사람들마저 놀랠 정도였다면 분명 대단한 폭풍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 것은 바다에서 일어난 폭풍만이 아니라 그들의 스승이 왕이 되기를 거부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들도 빵을 많게 하시고 그들을 폭풍이 이는 밤에 호수를 가로질러 보내신 그분의 능력을 의심했을 것이다. 빵을 많게 하실 수 있으시다면 폭풍을 왜 막지 못하실까?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셨다가 바다 가운데로 재빨리 돌아오신 것은 제자들이 생각할 때는 주님이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그들이 노와 씨름하고 있을 때 주님이 바다 위를 가로질러 그들에게 오시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무서워 어쩔 줄 몰랐다.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하시자 (요한 6, 20)

고독한 승무원들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고독하지 않았다. 주님의 생애를 통해 흐르고 있는 기쁨과 슬픔의 변함없는 리듬이 여기서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둠과 폭풍과 위험이 고조에 달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성난 파도의 하얀 정점에 당신 발을 딛고 오셨기 때문이다. 이때 당신 능력을 보여 주셨기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오 14, 33)

그들은 주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였다.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요한 세례자의 제자였으며, 그들은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또 이들중 일부는 악마가 주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했을 때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나타나엘은 주님을 이미 이렇게 불렀었다.

베드로가 주님을 맨 먼저 보고 주께서 배에 오르시기 전에 자기도 물 위를 걸어서 주님께 갈 수 있냐고 물은 것이 바로 이때였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오라고 하셨다. 그러나 잠시후에 베드로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베드로는 바람을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자연적인 난관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며, 스승의 능력을 믿지 않고 주님께로부터 눈을 뗏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 게 되었다.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질렀다. (마태오 14, 30)

베드로는 마침내 주님께 살려달라고 외쳤다.

예수께서는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오 14, 31)

주님은 먼저 구해주시고 그 다음에 부드럽게 꾸짖으신다. 그것도 얼굴에 미소를 띄시고 다정한 목소리로 꾸짖으셨을 것이다. 가엾은 베드로가 자기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스승을 의심한 것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주님께 빨리 가기 위해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베드로는 나중에는 주님을 위해 감옥에 갈 뿐만 아니라 죽을 각오도 돼있다고 맹세하기도 했다. 배 안에서는 용기에 넘쳤으나 물 위에서는 겁을 먹은 베드로는 그후 최후만찬석상에서는 대담했으나 재판하던 밤에는 비겁해졌다. 호수에서의 사건은 베드로가 또 한번 예수님을 저 버리는 예행연습이었다.

다음 날 주님을 가파르나움에서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아직도 주님을 왕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곳에 오신 경위를 묻는 백성들의 질문에 대해 주님은 종교가 양식만을 해결해 주는 것이라 생각하는 자들에게 질책하는 답변을 하셨다.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요한 6, 26)

그들은 기적을 주님의 신성의 표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찾고 있었다. 욥은 주님을 얻었을 때만이 아니라 주님을 잃었을 때도 주님을 보았다. 그러나 군중들은 예수님을 영혼의 굶주림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라 배의 굶주림을 채워주는 수단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흥분은 종교가 아니다. 만일 종교가 흥분이라면, 부활주일의 "알렐루야" 는 성금요일의 "십자가에 못박아라" 라는 외침소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 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에게 그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6, 27)

주님께서는 두 종류의 빵을 그들 앞에 제시하였다. 즉 하나는 썩어 없어질 빵이고 또 하나는 영원히 살 게 하며 없어지지 않는 빵이다. 주님께서는 당근을 들고 있는 주인을 따라가는 나귀처럼 당신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세속적인 생각을 버리고 영원한 음식을 얻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권능을 주시고 봉인하신 천상의 빵을 찾으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동양의 빵은 흔히 빵 만든 자의 이름이나 상표가 찍혀 있다. 사실 "빵 굽는 자" 라는 탈무드의 단어는 "인장" 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 미사때 쓰는 제병에 인장(어린양이나 십자가와 같은 것) 이 찍혀 있듯이, 그들이 찾아야 될 빵도 그의 아버지, 곧 자기 자신이 인정한 빵이라고 주님께서는 암시하신다.

군중들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권능을 주셨다는, 더 신빙성있는 증거를 요구하였다. 주님께서 빵을 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대단한 것이 못되었다. 아무튼 모세도 하늘에서 빵을 주지 않았던가? 그들은 이렇게 따졌다. 주님이 모세보다 더 위대하다는 증거가 뭐냐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을 모세와 비교하고 주님이 주신 빵과 광야의 만나를 비교함으로써 전날의 기적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주님은 군중을 한번밖에 배불리 먹여 주시지 않았지만 모세는 사십년 동안 먹여 주었다. 광야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빵을 "만나"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이것이 뭐냐?"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만나를 업신 여기던 때에는 그것을 "가벼운 빵" 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선물을 하찮게 보았다. 주님께서 이러한 도전에 응하셨다. 모세에게서 받은 만나는 천상의 빵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 온 것도 아니고, 더구나 만나는 잠시 동안 한 민족만을 먹여 주었을 뿐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더 중요한 것은, 만나를 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주님의 아버지셨다는 것이다. 끝으로 주님께서 주실 빵은 영원히 살 게할 것이다. 참된 빵은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부탁했다.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복되신 주님께서 자신을 상징하기 위해 구약성서의 예를 드신 것이 이번으로 세 번째였다. 첫 번째 경우는 주님께서 자신을 야곱이 보았던 사다리에 비유하신 때였으며 이로써 자신을 하늘과 땅을 이어 주는 중개자로 계시해 주셨다. 니고데모와 말씀하실 때 주님은 죄에 찌들고 오염된 세상의 치유자인 구리뱀에 자신을 비유하셨다. 이제 주님은 광야의 만나를 언급하시면서 당신이 참된 빵이시며 만나는 당신에 대한 예표일뿐이라고 주장하셨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 8,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다 도둑이며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 오면 안전할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요한 10, 7-9)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요한 10, 11-14)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 11, 25)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 6)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요한 11, 25)

주님은 이렇게 자신을 세 번씩 불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이 때 유대인들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못마땅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 나는 생명의 빵이다 /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6, 35.41.48.51)

다시 주님은 십자가의 그림자를 암시하신다. 빵은 쪼개지 않으면 안된다.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주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먹을 수 있도록 희생제물이 되셔야만 한다. 세상 사람들을 죄와 노예살이에서 구하시여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당신 자신의 살을 기꺼이 바치신 것이 이 빵이다.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서로 따졌다.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요한 6, 52-54)

주님은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으로서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내주기 위해서 곧 죽기 위해 내려오신 분으로 나타내셨다. 오로지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이 영원히 살 게 해주는 이 빵의 영광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여기서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즉 "준다" 는 단어는 희생적인 행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들의 살과 피는 주님께서 돌아가실 때 서로 분리되지만 영생의 원천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내 살" 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당신의 인성을 의미하신다. "말씀이 살이 되셨다" 는 말은 말씀 곧 아들이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인성을 취하셨다는 뜻과 같다. 그러나 바로 인성이 신적인 위격과 영원히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살을 받아 먹는 자에게 영생을 주실 수가 있으시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당신 살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사용된 그리스어는 "온 인류"를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은 유월절 시기이기에 주님의 말씀은 더욱 날카로워진다. 비록 유대인들은 피를 경건하게 생각하였지만, 그때는 어린 양들을 예루살렘으로 몰고 가고 있었으며 예루살렘에서는 사방으로 양들의 피를 뿌리게 될 것이다.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시겠다는 말씀의 이상한 느낌이 과월절의 배경 때문에 감소되었다. 주님의 말씀은 동물인 어린 양의 그림자는 지나가고 그 대신에 참된 하느님의 어린 양께서 그 자리를 차지하신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빠스카 양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었듯이, 이제는 참된 하느님의 어린 양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게 될 것이다.

"빵집" 이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동물들이 먹이를 먹는 구유통에 뉘이셨던 주님께서는 이제 당신과는 비교도 안되는 미천한 존재인 인간을 위해 생명의 빵이 되실 것이다. 자연계에 사는 모든 것들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먹음을 통하여 하위 단계의 것은 고등 단계의 것으로 변모된다. 즉 화학적인 것은 식물로, 식물은 동물로 동물은 인간으로 화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변할까? 인간을 신성(神聖)의 공유자로 만들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주님을 먹음으로써 인간은 고양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인 주님은 당신의 아버지의 힘으로 살으셨듯이 그들은 당신의 힘으로 살 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 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요한 6, 58)

만나를 먹는다는 것은 너무도 육체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너무도 영적인 것이 아닌가! 어린이가 어머니가 주는 자양분을 먹으며 사는 것보다 주님의 힘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친밀한 삶이다. 어떤 어머니나 자기 적을 물리고 있는 아이에게 "먹어라, 이는 내 몸이고 내 피다." 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비유는 거기서 끝난다.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는 둘 다 똑같은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인간의 관계에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이며 하늘과 땅의 관계이다.

어떤 어머니도 자녀의 음식이 되기 전에 죽어서 보다 영광스러운 인생을 취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당신의 목숨을 "바쳐야" 하고 그런 다음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빵이 되신다고 말씀하셨다. 동물의 먹이가 되는 식물은 또 다른 행성에 살고 있지 않으며 인간의 먹이가 되는 동물들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생명" 이 되셔야 한다면, 그리스도는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으로서 사람들 사이에 거주하시면서 지상의 빵이 육체의 생명이 되듯이 영혼에 생명을 주셔야만 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의 생각은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서로 따졌다. (요한 6, 52)

누구나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주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몽매한 상태로 내 버려두지 않고 곧 그들의 생각을 고쳐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 이 살을 준다고 하셨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주님께서 봉헌하시는 속죄의 희생을 가리킨다. 신자들은 돌아가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하늘에 계신 영광된 그리스도를 음식으로 받아 먹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의 영광된 살과 피는 영생을 얻게 해 줄 것이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물질적인 것을 먹음으로써 영적으로 죽었듯이 생명의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영적으로 다시 살 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너무도 직선적이며 너무도 많은 그릇된 오해를 깨끗이 풀어 주셨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누구나 성체란 (주께서 주시는 몸과 피) 하나의 표상이나 상징에 불과하다거나 성체의 효과는 성체를 영하는 자의 주관적인 마음의 자세에 달려 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당신 말씀을 오해할 때면 언제나 그 오해를 바로 잡아 주는 것이 주님의 교육방법이었다.

니고데모가 "다시 태어난다"는 말을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했을 때에도 바로 고쳐 주셨다. 그러나 당신 말씀을 똑바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 말씀에 트집을 잡을 때는 언제나 같은 말씀을 되풀이 하셨다. 이번의 훈화에 있어서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피와 몸에 대한 말씀을 다섯 차례나 반복하셨다. 이러한 말씀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야 비로서 그 의미가 완전히 밝혀진다. 마지막 유언을 말씀하실 때 주님께서는 임종시에 어느 누구도 남겨 놓을 수 없었던 것, 즉 당신의 몸과 피, 영혼, 신성을 세상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남겨 두셨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14. 생명의 빵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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