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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16. 순결과 소유

[그리스도의 생애] - 16. 순결과 소유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주님의 목표는 기적과 가르침과 예언의 성취를 통하여 외부의 압력과 고통받는 종인 당신께 대한 인간의 자연적인 반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사도들을 당신과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들이 주님께 헌신하며 주님을 메시아와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면서도, 십자가형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 뒤에 부활이 있다고 말하셨음에도 위축되었다.

사도들은 꼬마인디아들과 같이 모두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했다. 주님의 죽음이 그들을 어둠속으로 몰아넣은 것은 그들이 십자가의 걸림돌에 대해 얼마나 준비가 안되어 있었던가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주님께서 당신 십자가에 대해 더 자주 말씀하시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이 별로 듣지 못한 것은 그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았거나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는 할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요한 16, 12)

당신의 필생의 사업을 떠맡을 수 있도록 그들의 영혼을 준비시키고 당신 왕국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조건을 지시해 주기 위해 구세주께서는 여러 가지 주제들 가운데 정결과 가난에 대해 특별히 상세한 설명을 가하셨다. 절제되지 않은 성(性)은 욕정이 되고, 절제되지 않은 소유욕은 탐욕이 된다.

정 결

이 주제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냐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주님께 물으러 왔을 때 제기되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질문을 한 것은 유대 신학의 두 학파인 힐렐(Hillel)학파와 샤나이(Shannai) 학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한 학파는 사소한 이유만 있어도 이혼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또 한 학파는 이혼을 승인하기 위해서는 큰 죄를 지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그 당시에는 이혼이 매우 보편화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유대를 지배하던 로마인들은 공개적으로 야비하게 이혼하는 풍습이 있었다. 게다가 로마 식민지의 지배파인 헤로데는 자기 동생의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으며 요한 세례자를 죽였다.

이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구세주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태초부터 남편과 아내에 대해 견지돼 오던 것을 재천명하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오 19, 6)

이 문제에 대해 주님의 충분한 설명을 들은 제자들은 - 베드로를 포함해서 그 중 일부는 결혼한 자들이었다 - 정반대의 극단으로 가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마태오 19, 11)

여기서 주님께서는 일부 결혼생활에는 성실치 못한 점들이 있기 때문에 극기를 통해서 그러한 불성실을 상쇄해 줄 다른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답변하신다. 세상이 육체의 쾌락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정당한 육체의 쾌락까지도 포기하는 자들이 있어야 한다. 세상이 비뚤어진 길로 재산을 모으려고 할 때는 자발적으로 청빈을 실천하는 자들이 있어야 한다. 교만한 자들이 있을 때는 자기의 권리마저 주장하지 않고 겸손으로 교만한 행위들을 보상해주는 자들이 있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 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 들여라." (마태오 19, 11-12)

독신생활은 현명한 처사라고 권고하시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요구하시지는 않는다. 나중에 베드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아내를 떠난다. 주님께서 독신생활을 권고하실 때 제자들은 그 말씀이 자기들에게 해당된다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그렇게 되면 결혼할 사람이 없을거라는 이유를 들며 주님의 심한 말씀에 반대했다. 주님의 답변을 보면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당신 왕국을 위해 어느 정도의 희생을 요구하실지는 깨닫지 못했다.

단체를 세우신 주님께서는 성적 본능의 욕구를 알고 계셨지만, 독신생활을 할 소수인들의 자리를 마련해 두셨다. 어떤 이들은 고자로 태어난 자들도 있고, 어떤 이들은 오리게네스와 같이 자기 스스로를 고자로 만든 잘못을 저지른 자들도 있지만, 세 번째 유형은 신체적인 행위로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극기와 희생을 통해 정신적인 기쁨을 위해 육체적 쾌락을 포기하는 자들이다. 주님께서 하늘 나라를 위해 고자된 자들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자들을 가리킨다. 나중에 성 바오로는 이러한 교리를 들고 이렇게 썼다.

나는 여러분이 근심 걱정을 모르고 살기를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에 마음을 쓰게 되어 (Ⅰ고린토 7, 32-33)

결혼은 영예로운 것이다. 주님은 한번도 결혼이 영적 감각이나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파괴 한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독신생활이나 동정생활을 할 때는 주님을 각별한 연인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청 빈

성이 인류를 계속 번식시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본능인 것처럼 자아를 연장하기 위한 재물욕도 자연법이 인정하는 자연스런 권리다. 인간은 내부적으로는 자기 영혼을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 내적인 이유는 "내가 존재한다" 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외적인 자유는 "내가 소유하고 있다" 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지나친 육욕은 욕정을 낳는다. 제자리에 있지 않는 사물이 오물인 것처럼 욕정은 제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재물욕이 방향을 잘못 잡을 때는 탐욕과 욕심 그리고 자본주의적 침략이 된다.

지나친 탐욕과 이기심을 보속하고 보상하며 보상하기 위해서 주님은 사도들에게 다시 한번 자기 희생을 가르치신다. 처음에 정결에 대해서 가르칠 때는 결혼에 대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고나서였으며, 두 번째 가르침은 어떤 젊은이의 질문을 받고 나서였다.
주님은 이 젊은이를 제자로 얻으실 기회가 있었지만, 십자가에 대해 언급하시자 그는 떠나 버렸다. 젊은이는 상도 받고 싶어했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엄청났다. 찾아온 젊은이는 부자였으며 회당의 관리였다. 얼마나 주님과 함께하고 싶었던지 그는 뛰어와서 주님 발 밑에 무릎을 꿇었다. 젊은이의 올바름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주님께 이렇게 물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마태오 19, 16)

니고데모와는 달리 그는 밤중에 찾아오지 않았지만, 스승의 위대함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였다. 젊은이는 영생을 얻는데 자기가 그렇게 멀리 있지 않으며 약간의 가르침과 교화만 있으면 된다고 믿었다. 구세주께서는 사람들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언제나 아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하신다. 젊은이가 그릇된 선(善)개념에 안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신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마르코 10, 18)

주님은 선하다고 불리우시는 것에는 반대하시지 않지만,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취급받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신다. 젊은이는 주님을 위대한 스승이라고 불렀으나 인간으로서 그렇다는 것이고, 그가 선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아직 인간적인 차원의 선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주님께서 그냥 한 인간이셨더라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이런 칭호는 주님께 맞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답변 속에는 당신의 신성을 인정하시는 말씀이 감춰져 있다. 하느님 홀로 선하시기 때문이다. 사실상 주님은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고 그 젊은이가 외치도록 권하시고 있다.

젊은이는 어려서 십계명을 지켜 왔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러자 주님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사랑하셨다.
그 젊은이가 "저는 그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다시 묻자 (마태오 19, 20)

하고 젊은이가 묻자,
주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

예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하셨다.
(마태오 19, 21)

결혼에 대해 질문을 받으셨을 때 결혼에 대해 비난하지 않았듯이 재산에 대해서도 전혀 비난하는 말씀이 없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보다 더 완전한 것이 있다. 누구든 아내를 떠날 수 있듯이 재물도 떠날 수 있다. 십자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가장 아끼던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손에 있는 보물로 만족할 것을 요구한다. 주님은 왜 그러한 희생을 요구하시느냐고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세리 자케오에게 재산의 절반은 갖도록 허락해주셨으며, 십자가형이 있은 후 아리마테아의 요셉은 부자였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아나니아의 재산은 그의 것이었고, 베타니아의 부자 친구 집에서 주님은 식사하셨다. 그러나 여기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은 젊은이었다. 주님께서 구원을 얻기 위한 평범한 길, 즉 계명을 지키는 일을 제시해 주셨을 때 젊은이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뭔가 더 완전한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에게 완덕의 길, 즉 버리는 길을 제시하자,

그러나 그 젊은이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풀이 죽어 떠나 갔다. (마태오 19, 22)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는 평범한 길과 영웅적인 길이 있다. 평범한 길은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영웅적인 길을 버리는 것, 스스로 가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젊은이의 열의는 사라져 버렸으며, 재산을 지키는 대신 그에게 십자가를 주실 분을 잃어 버렸다. 젊은이는 재산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슬픔에 차" 떠나갔다고 한다.

젊은이가 떠나자 주님은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 보시며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마르코 10, 23-25)

그리고 당신께서 완덕의 길로 부르신 자들을 둘러보시며 이 일을 예로 들어 가난의 덕에 대해 말씀하셨다. 누군들 결혼할 수 있겠느냐며 놀랐던 제자들은 이제는 누군들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놀란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물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마르코 10, 26)

제자중 한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도록 되어 있는 자루에서 훔치기까지 한 자였다. 제자들은 최소한 묵시적으로 부를 하늘의 축복으로 생각하던 자들이었으며, 근대에 와서도 경제적인 번성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느님이 축복하셨기 때문에 부자들은 상석에 앉고, 하느님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한자들은 말석에 앉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제 부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방해가 된다는 말씀은 또 다른 형태의 "십자가의 걸림돌" 이다.

사도들은 대단하지는 않더라도 자기 배와 그물을 포기했지만, 아직도 탐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느꼈다. 그들의 양심을 찌르는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최후만찬을 거행하는 밤에 모두가 "접니까?" 하고 물었듯이, 제자들은 구원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너무 엄하게 자신을 판단하고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고 구원에 대한 그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오 19, 26)

낙타는 바늘 구멍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도 그렇게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언제나 가능하시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다시 사도들의 대변자가 되어 재산을 버리는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추가설명을 요구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해 준비해두신 위대한 상급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바다에서의 생업을 버렸기 때문에 베드로는 물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마태오 19, 27)

사도들은 부자 젊은이가 버려야 했던 것만큼 많이 버리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버렸느냐가 아니라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이란 무엇을 주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버렸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를 택한 사람은 오로지 그리스도 때문에 택해야지 어떤 보상을 생각하며 택해서는 안된다. 일편단심 주님을 따르기로 확고히 결단을 내린 후에야 주님은 보상에 대해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권고하시더니 이제는 십자가의 필연적인 결과인 영광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나를 따랐으니 새 세상이 와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마태오 19, 26)

주님은 사도들에게 위대한 새 삶, 즉 신적인 새 사물의 질서를 기대하라고 말씀하신다. 지상에서 십자가를 지실 사람의 아들은 천상에서 영광을 누리실 것이다.
사도들은 이러한 새 세계의 초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야곱의 열 두 아들을 바탕으로 이룩되었듯이 주님의 새로운 세계도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열 두 사도들 위에 세워질 것이다. 이 새로운 나라에서는 새 세계의 선조인 이들에게 특별한 영광을 줄 것이다. 지금 이들과 함께 있는 요한은 나중에 이렇게 기록한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 두 주춧돌이 있었는데 그 주춧돌에는 어린양의 열 두 사도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묵시록 21, 14)

재산을 버린 자들을 위해 준비된 보상의 개념을 상세히 설명 해주시며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마르코 10, 29-31)

보상에 대한 설명 속에 갑자기 끼어든 "박해"라는 말은 손해가 아니라 이익으로 이해되고 있다.
백배의 보상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받는다기보다는 박해 때문에 받게 된다.
죽을 때까지 충실한 사람들은 생명의 왕관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고통은 다가오는 기쁨에는 비할 바가 못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승께서는 제자들이 갖고자 원하는 것들을 버리라고 사도들에게 말씀하신다.
배를 버렸으니 무엇을 받게되느냐고 베드로가 물었을 때, 베드로는 배 즉 교회의 키잡이가 될 거라는 답변을 이미 들은 바 있다. 주님께서 축복에 대해 말씀하시고 "박해" 때문에 상당히 번민하시던 날을 베드로는 잊을 수 없었다.
나중에 베드로는 기쁨과 박해 속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이 여러분에게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Ⅰ베드로 4, 14)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16. 순결과 소유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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