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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15. 빵 왕이 되기를 거부하심

[그리스도의 생애] - 15. 빵 왕이 되기를 거부하심


성체성사에 대한 선포로 주님께서는 당신 생애 가운데 가장 큰 위기의 하나를 맞게 되셨다.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당신 몸과 피와 신성을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인하여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얻으셨던 것 중에 많은 것을 잃게 되셨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 뒤를 따랐다. 우선 군중들과 서민들, 다음으로는 엘리트들과 지성인들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 끝으로 당신 사도들이 당신을 따랐다.

그러나 이러한 고원한 영적인 교리는 그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것이었다. 성체성사의 선포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완전히 같아지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전체적인 진리 중 일부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전체를 받아들일 것인가를 각자 스스로 결정할 때 그리스도교안에 여러 가지 분파가 생겼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런 사태는 바로 주님 때문에 발생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은 대부분의 사람들로서는 너무도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으며, 주님의 교리는 너무도 숭고하였다. 만일 주님께서 약간만이라도 세속적인 생각을 갖고 계셨더라면, 그리고 당신 말씀을 비유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게만 해주셨더라면, 그리고 조금만 덜 명령적이었더라면, 주님께서는 훨씬 더 인기가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추종자들을 뒤흔들어 놓으셨다. 갈바리아산은 주님을 반대하는 격렬한 싸움터가 될 것이다. 지금이 바로 냉전의 시작이다. 갈바리아 산은 신체적인 십자가형이 될 것이며 이번은 사회적 십자가형이었다.

주님은 군중을 잃으셨다.
주님은 제자들 간에 분열을 일으키셨다.
주님은 사도단을 약화시키기까지 하였다.

주님은 군중을 잃으셨다. 군중이란 일반적으로 이적과 안전에만 관심이 있다. 주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셔서 그들의 눈을 깜짝 놀라게 하셨다. 주님께서 그들의 배를 채워 주셨을 때 주님은 그들의 사회 정의감을 만족시켜 주셨다. 그들은 바로 그런 유형의 왕을 원하였다. 즉 빵왕을 원했다. "종교란 인간에게 사회보장을 마련해 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는가?" 라고 그들은 묻는 것 같다. 군중은 주님을 강제로 왕으로 만들려고 했다. 사탄도 바로 이러한 것을 원했었다. 배를 채워주고, 돌을 빵으로 만들며, 번영을 약속하는 것, 이것이 대부분 인생과 삶의 목적이다.

그러나 주님은 풍요의 경제학에 바탕을 둔 왕권은 취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을 왕으로 만드는 것은 아버지의 일이지 그들의 일이 아니다. 주님의 왕권은 마음과 영혼을 지배하는 것이지 물질적인 것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그들이 주는 번쩍거리는 왕관과 주석 칼을 피하기 위해 혼자 산으로 피해 가셨다고 복음서는 이야기 하고 있다.

군중들은 구원에 얼마나 가까이 있었던가! 그들은 생명을 원하였고 주님은 생명을 주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생명을 이해하는 점에 있어서 차이가 났다. 사회적인 계획을 나열함으로써 추종자들을 얻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일까? 이것도 생명의 한 형태다. 아니면 생명의 빵과 동정녀들을 키워주는 포도주를 먹게 될 소수의 신앙인을 위해 배만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잃는 게 그리스도의 일일까?

그날부터서 주님은 군중들을 얻지 못하셨다. 스무달도 안되어서 빌라도가 "보라, 너희들의 왕이다" 고 말했을 때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박아라!" 하며 외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지 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잘못이다. 그리스도는 너무도 신적이시고, 영혼에 너무도 관심이 많으시며, 너무도 영적이셔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주님께서는 그 날 두 번째 집단, 즉 엘리트들-지성인들과 종교 지도자들-도 잃으셨다. 그들은 불타는 심지를 끄지 않는 양순하고 부드러운 개혁가로서의 주님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먹여 생명을 주는 것보다 더 심오하게 당신 자신의 생명을 주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복음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못마땅해하는 것을 알아 채시고 "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 (요한 6, 61)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보시고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 가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6, 67)

주님은 그들이 당신의 말씀, 당신 자신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주시겠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그들이 떠나도록 그냥 놔주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똑바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떠나도록 놔두셨다. 그들이 떠날 때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요한 6, 63)

물론 이 말씀은 그들의 신앙을 떠본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지 않는가?
주님은 그들이 무엇을 믿기를 바라시는가?
당신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인가?
당신의 모든 말씀은 절대 진리라는 것인가?
그들이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똑같은 신적인 생명을 굶주린 영혼에게 주실 수 있다는 것인가?
왜 이 생명의 빵이라는 말을 무시해 버리고 그것을 비유적인 표현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주님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셨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언젠가 그들은 군중들을 선동하여 주님께 반기를 들 것이다. 그들은 똑같은 이유로 주님을 떠나지는 않았지만 주님을 떠나야한다는 데는 동의하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쭉정이만 잃으신게 아니라 밀알까지 잃으셨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장 큰 슬픔-이것은 너무도 큰 슬픔이어서 천년 전에 주님의 마음을 괴롭히게 될 인간적인 분열의 하나로 예언되어 있었다-을 주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그것은 유다를 잃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유다가 왜 주님과 관계를 끊었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

유다가 예수님과 관계를 끊은 것은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때였다고 하고, 돈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고도 말한다. 탐욕이 그 이유였을 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복음서는 주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당신 살을 주시겠다고 선포하신 날 유다는 주님과 결별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긴 기사 중에 복음서는 누가 당신을 배반할지 주님께서는 다 알고 계셨음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당신이 알고 계신 유다를 가리키며 주님은 말씀하셨다.

이것은 가리옷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유다는 비록 열 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지만 나중에 예수를 배반할 자였다. (요한 6, 71)

천상의 빵을 약속하실 때 유다는 마음이 갈라졌으며, 최후만찬을 거행하는 밤에 성체를 주실 때 유다는 완전히 변절하여 배신한다.

이제 주님은 사실상 혼자 진군하신다. 오순절에 당신 영을 기다리는 자들은 120명밖에 안될 것이다. 주님은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모두 잃으셨다. 군중들이 떠나가는 것을 보셨으며, 엘리트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고,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마음을 품고 있음을 보셨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이 너무도 아끼었으며 이름까지 시몬에서 베드로 즉 바위로 바꾸어 주신 그를 돌아보며 이렇게 물으셨다.

그래서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보시고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 가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요한 6, 67-69)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 속에는 이미 십자가가 들어 있었다.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 배신자였던 것이다. 서로 갈라져 있던 엘리트들이 이제는 서로 일치하여 주님께 반대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손과 접촉했던 오천 명은 주님의 마음과 접촉하기를 거부하였다. "때"를 위해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15. 빵 왕이 되기를 거부하심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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