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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18. 영광스러운 변모

[그리스도의 생애] - 18. 영광스러운 변모


주님의 생애에 있어서 세 가지 중대한 사건이 산에서 이뤄진다. 그러나 진복팔단을 실천에 옮기는 자들은 세상으로부터 십자가를 받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산위에서는 십자가 뒤에 숨어 있는 영광을 보여 주셨으며, 세 번째 산 위에서는 당신과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누릴 영광의 서곡인 죽음을 통해 당신 자신을 봉헌 하셨다.

두 번째 사건은 갈바리아 사건이 벌어지기 몇 주 전에 일어났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베드로는 바위라는 뜻이며 야고보는 첫 번째 사도-순교자가 될 것이며, 요한은 미래의 영광을 꿰뚫어 보는 계시록의 환시자가 될 것이다.
이 세 사람은 주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 같이 있었다. 세 사람은 모두 십자가에 대해 배우고 그릇된 메시아관을 바로 잡아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베드로는 맹렬히 십자가를 반대했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권력지향자들이었다. 세사람 모두 게쎄마니 동산에서 주님이 고뇌에 빠져 있을 때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주님의 갈바리아를 믿기 위해서는 그들은 십자가의 걸림돌 위에 빛나고 있는 영광을 보아야만 하였다.

주님은 산꼭대기에서 기도를 마치신 후 그들 앞에서 거룩한 변모를 하시자 주님의 신성의 영광이 입고 있던 옷 올 사이로 번쩍 빛났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빛나는 빛이라기보다는 안에서부터 발산하는 하느님의 아름다움이었다. 주님의 변모는 이 세상 사람 누구도 볼 수 없는 완전한 하느님의 발현이 아니었으며 주님의 몸이 영광스럽게 된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직 죽었다 부활하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광의 본질은 갖고 있었다. 주님이 태어난 말구유와 목수직업, 적들로부터 받은 온갖 오명들은 하나의 치욕이었다. 그렇다면 거기에 걸맞게 주님께서 태어나실 때 천사들이 불렀던 노래와 세례를 받았을 때 들린 아버지의 목소리처럼 이제 영광이 드러나야만 한다.

이제 주님은 갈바리아에 다가가시기에 새로운 영광이 주님을 에워싼다. 다시 목소리는 희생제사를 바치도록 주님께 사제복을 선사한다. 하느님의 성전인 주님께로부터 발산되는 영광은 외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 오신 주님" 의 내재적인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놀라운 점은 주님께로부터 순간적으로 영광이 발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때는 줄곧 영광이 억눌려있었다는 것이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후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그 모습을 가리기 위해 베일로 얼굴을 가렸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으로 당신 영광을 가리고 계셨다.

그러나 이 짧은 순간만큼은 주님께서 당신 인성을 거두시어 사람들이 당신 영광을 볼 수 있게 해주셨다. 빛나는 광채는 의로움의 아들을 모든 인간들에게 일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었다. 십자가가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주님의 영광도 더 커진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반대자들이 나타나고 선한 사람들이 십자가형을 받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탁월한 영광이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에서 먼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인간에 있어 육체는 영혼을 가두고 있는 일종의 우리와 같다. 그리스도에 있어서 육체는 하느님의 성전이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에덴의 동산에서 남녀는 벌거벗고 있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것은 죄를 짓기 전에는 영혼의 영광이 육체를 통해 빛났으며 그 영광이 하나의 옷이 되었다. 이곳 영광스러운 변모에서도 신성이 인성을 통해 빛나고 있다. 이러한 변모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이 없는 다른 모습을 띄는 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주님은 억지로 당신 안에 있는 신성을 감추셔야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난데없이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께서 멀지 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루가 9, 30-31)

구약이 신약과 만나게 되었다. 율법의 공표자인 모세와 예언자 중 으뜸인 엘리야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율법을 주시고 예언자들을 보내신 그리스도 자신의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모세와 엘리야와 그리스도께서 나눈 대화 주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과 영원한 하느님의 뜻을 성취한 중재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임무였다. 그들의 일이 다 끝났을 때 모세와 엘리야는 주님을 가리키며 성취된 구원을 보게 했다.

이렇듯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죄인 중의 하나로 취급되는" 최후의 순간을 주님은 잊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순간마저도 십자가가 천상 손님들과의 대화 주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죽음은 정복되고 죄는 속죄되었으며 무덤은 파괴되었다. 이 장면을 둘러싸고 있던 영광의 빛은 야곱이 요셉을 보자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고 한 말이나 시므온이 예수 아기를 보고 '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와 같은 기쁨이었다. 에스컬러스(Aeschylus)가 저술한 아가멤논에서는 트로이 전쟁에서 고향에 돌아온 한 병사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이제는 기꺼이 눈을 감았다고 말한다. 세익스피어는 험란한 항해를 마치고 돌아 온 오델로의 입을 통해 똑같은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이제 죽는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행복하리. 내 영혼 더없이 만족하기에 미지의 운명속에서 이와 견줄 다른 위안 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에는 성 바오로가 말한 대로, "그 앞에 기쁨이 놓여 있었기에 주님은 십자가를 견디셨다."

사도들이 특히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보았던 것은 주님의 얼굴과 옷이었다. 그 얼굴은 나중에 가시관으로 흘러내리는 피로 범벅이 될 것이며 그 옷은 헤로데가 멸시하며 입혀 준 조롱의 복장이 될 것이다. 지금 주님을 감싸고 있는 빛의 천은 언덕 위에서 옷을 벗기우실 때 벌거벗은 몸이 될 것이다.

사도들이 하늘의 현관처럼 보이는 곳에 서있을 동안에 구름이 그들을 그늘지었다.
이 소리를 듣고 제자들은 너무도 두려워서 땅에 엎드렸다. (마태오 17, 6)

하느님께서 구름을 일으키실 때는 구름은 인간이 감히 파기할 수 없는 계약을 나타내는 명백한 표시이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다. 거룩한 변모를 이루시는 지금 하늘은 다시 열리어 주님을 중재자의 자리에 앉혀주고 주님을 모세와 예언자와 구별시켜 주고 있다. 주님께 사명을 띄어보내는 것은 하늘이지 비뚤어진 인간의 의지가 아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는 예수님 자신을 위해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변모하신 언덕 위에서는 제자들을 위해 들려 왔다. 성자께서 고통을 당하셔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라는 고함소리를 사도들은 도저히 참고 듣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모세나 엘리야가 아니라 다른 교사들과 똑같이 돌아가시지만 예언자보다 더 위대하신 주님이시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변함없는 확고한 일치를 증거해주며, 아울러 하느님께서는 때가 되면 이스라엘로부터 한 사람 즉 사도들이 말을 들어야 될 주님을 일으켜 세우시리라는 모세의 말을 상기시켜 주었다.

사도들이 그들이 본 찬란한 모습을 보고 깨어났을 때 거의 언제나 그랬듯이 베드로가 대변인이 되어 말한다.
그 두 사람이 떠나려 할 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하고 예수께 말하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한 말이었다.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뒤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사라져 들어 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에 질려 버렸다. (루가 9, 33-34)

일주일 전에 베드로는 십자가 없는 영광의 길을 찾고자 하였다. 이제 베드로는 갈바리아 산을 제외해 버리고 진복팔단의 산이나 영광스런 변모의 산만을 인정하며 영광스러운 변모를 구원의 지름길로 생각했다. 이번이 베드로가 주님을 설득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일을 말리는 두 번째 시도였다. 갈바리아 산의 처형이 있기 전의 베드로는 극기와 희생이 없이 영광을 얻으려는 자들을 대표하는 자였다.
여기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가져오셨으며 천사들이 베들레헴에서 노래한 영광이 죄와의 투쟁이 없이도 인간들 사이에 머물 수 있다고 성급한 생각을 했다. 비둘기는 홍수가 끝난 후에야 땅에 발을 붙였던 것처럼 참된 평화는 십자가형을 받은 후에야 온다는 것을 베드로는 잊고 있었다.

어린아이와 같이 베드로는 지나가는 순간적인 영광을 붙잡아 영원히 누리려고 하였다. 구세주께서 보실 때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이면을 미리 반영해주는 사건이었지만, 베드로가 볼 때는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세속적인 메시아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베드로가 십자가없는 영광을 얻으려했기 때문에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주님께서 여기서는 "베드로가 두서없이 지껄이고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의 하찮은 인간성을 무시해 버리셨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는 알 게 될 것이다. 그 때 베드로는 이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알려 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강림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꾸며낸 신화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우리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영광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그분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는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으므로 하늘에서 들려 오는 그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이것으로 예언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속을 밝혀 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어떤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예언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느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전한 것입니다. (Ⅱ베드로 1, 16-20)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18. 영광스러운 변모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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