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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25.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생애] - 25.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주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천상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분이라고 선포하자 적들은 그분을 죽이려고 하였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당신은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하고 고통받는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 주님과 언쟁을 벌이거나 자기들끼리 다투었다.

신성과 고통받는 구세주라는 개념은 둘 다 다시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모욕적인 것이었다. 인간은 은밀히 자기 자신이 신이 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신성이 모욕이 되며, 씨앗이 새로운 생명으로 솟아나기도 전에 죽어야 하는 이유를 인간 자신은 모르기 때문에 고통이 모욕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의 형상과 습성을 취하시어 자신을 인간의 수준으로까지 낮추시자 걸려 넘어지는 장애물이 되셨다. 지성인들로서는 위대함이 그렇게 하잘 것 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 인자가 인간의 나약함과 심지어는 죄까지도 당신이 지시고 당신의 신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을 때 주님은 걸려 넘어지는 장애가 되셨다.

여러 차례 주님의 목숨을 노리는 시도가 있었으며, 특히 대명절 중에 그리고 언제나 주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선포하셨을 때에 주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첫 번째 시도는 나자렛에서 있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조국과 자기 고향 그리고 자신의 혈족이 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서 모두가 사랑을 받고 기억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바삐 나아가실 때 고향 사람들의 거부로 십자가로 나아가는 길이 가속되었다.

나자렛

언덕 기슭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조그마한 마을에 금요일의 석양 빛이 드리울 때 울려퍼지는 회당지기의 트럼펫 소리가 안식일의 시작을 알려주었다. 다음날 아침 주님은 소년시절과 청년 시절에 자주 들렀던 회당으로 가셨다. 당연히 주님께서 회당에 들어서셨을 때 가나안의 기적에 대한 소문과 하늘이 당신의 신성을 선포해 준 요르단의 기적에 대한 소문 때문에 이미 사람들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래아로 돌아 가셨다. 예수의 소문은 그 곳 모든 지방에 두루 퍼졌다. (루가 4, 14)

회당에서 주님은 이사야서를 받으셨다. 주님께서 낭독하신 특별한 예언은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에 관한 것이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 4, 18-19)

이 대목을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을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해방시켜 준 것에 관한 구약성서의 예언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셨다. 주님은 귀양살이 속에서 엮어진 이 성서 본문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셨다. 주님은 "가난한 자", "묶인 자", "눈먼 자" 의 의미를 바꿔 놓으셨다. "가난한" 자들은 은총이 없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지 못한 자를 말하고, "눈 먼" 자들이란 아직까지 빛을 보지 못한 자들을 말하고, "묶인 자들" 이란 아직 죄로부터 참 자유를 얻지 못한 자들을 말한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이 모든 것들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선포하셨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은총의 해를 선포하셨다. 모세법에 의하면 매 오십 년마다 특별한 은총과 회복의 해를 선포하게 하였다. 그 때는 모든 빚이 탕감되고, 생활이 어려워서 소유권이 이전되었던 가족 유산은 원래의 임자에게 환원되었으며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그것은 독점을 방지하는 신적인 배려였으며, 가정생활을 온전하게 보호해 주었다.

은총의 해란 주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당신이 선포하신 메시아로서의 출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은 성령과 더불어 기름부음을 받으시어 메시아로 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새로운 정신적인 부(富)와 새로운 정신적인 빛, 새로운 정신적인 자유가 생겨날 것이며 이 모든 것은 복음선포자요 치유자며 해방자이신 주님 안에 깃들어 있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주님께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깜짝 놀랄 만한 폭탄 선언이 터졌다.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4, 21)

주님은 그들이 로마 지배를 분쇄해 버릴 정치적 왕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주님은 군사적인 독재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을 선포하셨다. 이사야의 예언은 이런 식으로밖에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가 자기들 가운데서 성장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가 이사야가 예언한 하느님의 기름부은 자가 자기라고 선포하는 것을 듣고 놀란 것은 이해할만 하다. 이제 그들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즉 예수님을 예언의 성취자로 받아들이던가 아니면 배척하던가 하는 것이었다. 오래 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와, 천상 아버지께서 요르단 강에서 당신의 거룩한 아들로 선포한 분의 고향에 살고 있다는 특권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르코 6, 3)

그들은 어느 면으로 하느님을 믿었지만 이웃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시고 같은 가게에서 망치를 들고 일하시는 하느님을 믿지는 않았다. 나타나엘의 말투 속에서도 똑같은 오만한 생각을 찾을 수 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 이러한 생각이 주님이 자라던 마을과 당신 백성들 가운데서 당신을 거스리는 편견이 되었다. 주님은 물론 목수의 아들이긴 하지만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 목수의 아들이시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스스로 인성을 취하시고 마을의 목수로서 천하게 살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존경을 얻지 못하셨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보고 놀라셨다." 복음서에서는 두 번 주님께서 "경탄하셨다." 는 말과 "놀라셨다" 는 말이 나온다. 한번은 이교도의 신앙을 보고서 경탄하셨고 또 한번은 자기 고향사람들의 신앙을 보고서 놀라셨다. 주님은 고향 사람들로부터 약간의 연민의 정과, 당신을 받아들이려는 어느 정도의 마음이 있으리라 기대하셨을지도 모른다. 주님께서 놀라신 것은 그만큼 고통이 크셨다는 뜻이며 그들의 죄 또한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마르코 6, 4)

주님은 그들의 자존심이 손상을 입었으며 당신 백성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른 데로 당신 구원을 가지고 가시겠다는 것을 그들이 깊이 깨닫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똑같은 대우를 받았던 구약 예언자들과 같은 범주 속에 두셨다. 주님께서는 구약 성서에서 두 가지 예를 인용하셨다. 두 가지 예 모두 당신의 복음이 취할 방향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것은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스라엘 땅에 대기근이 덮치고 삼년간 가뭄이 들었던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과부들이 있었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 과부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이교도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파견되었다. 또 다른 예를 드시면서 주님은 엘리야 때에 나병환자들이 많이 있었으나 시리아 사람 나만 외에는 병이 나은 자가 없다고 하신다. 나만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나만은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나중에야 믿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이교도들이었기에 하느님 왕국의 은총과 축복은 민족이 아니라 신앙에 따라 내린다는 것을 주님께서 암시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빚지신게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주님의 자비는 당신 백성이 거부하면 다른 백성에게 내려질 것이다. 하늘이 주님을 통하여 그들을 찾아 왔다는 위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은 세속적인 마음을 가지고 정치적 왕국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당신 고향사람들을 일깨워 주셨다. 주님의 고향은 한 혈통이나 한 민족의 구원이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을 널리 선포하는 무대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크게 화가났다. 우선 주님께서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거룩한 자의 자격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을 가져왔다고 주장하셨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처음에는 유대인을 위하였던 구원을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방인에게로 넘어 갈 것이라는 경고 때문이었다.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성인들을 항상 알아 보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배척하시고 그리스도가 되셨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을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폭력은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준비단계였다.

나자렛은 언덕받이에 있다. 나자렛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24m 높이 정도의 바위성벽이 있고 이 성벽 밑으로 90m 쯤 아래에 에스드랠론 평지가 있었다. 전승에 의하면 바로 이 장소에서 주님을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루가 4, 30)

아직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시간은 되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파견을 받았으며 당신이 하느님이시라고 선포하실 때마다 당하시는 일련의 폭력 속에서 일분 일분 십자가는 다가 오고 있었다.

베사이다

또 한번 주님의 목숨을 노리는 사건은 베사이다에서 불구자를 치유해주신 후였다. 예루살렘에 있는 이 못에는 수 많은 병자와 슬퍼하는 자, 수척한 자, 몸을 쓰지 못하는 자들이 병이 낫기를 바라면서 모여들었다. 한 불쌍한 사람은 삼십팔 년이나 몸을 쓰지 못했다. 주님께서 그를 보시자 이렇게 물으셨다.

예수께서 그 사람이 거기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아주 오래 된 병자라는 것을 아시고는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요한 5, 6)

힘 없는 그 사람이 주님의 능력을 믿는다고 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걸어 가거라" 하시자 (요한 5, 8)

이러한 명령과 함께 능력을 부어주셨다. 누구나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려고 할 때마다 직무에 맞는 능력이 그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성 아오스딩은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께서 명하시는 것을 주시고 원하시는 것을 명하소서." 병이 낫자마자 그 사람은 성전으로 갔다. 그 날 늦게 주님은 그를 성전에서 보았다. 그때 그는 자기를 고쳐 준 사람은 예수라고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서서히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지도자가 병이 나은 그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나를 고쳐 주신 분이 나더러 요를 걷어 들고 걸어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이렇게 대꾸하자 (요한 5, 11)

그리고 그들은 "안식일 날 이런 일을 저지른" 예수에 대해 반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을 고쳐주셨지만 특히 안식일은 은총의 날이었으며 안식일에 여섯 가지 기적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님께서는 이날 악령을 쫓아내셨으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고, 절름발이 여인을 곧게 펴주셨고, 수종에 걸린 사람을 고쳐주셨으며, 소경의 눈을 열어 주셨다.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 준 사실들을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말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백성의 유익함과 비교해 볼 때 성스러운 물건들이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환기시키셨다. 나중에는 율법에 의거하여 안식일보다 지성소의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게 해주셨다. 이 말씀의 의미는 지성소보다도 더 거룩하신 분이 그들 가운데 서 계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시 한번 주님은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경우에는 이렇게 물으셨다.

주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 위선자들아, 너희 가운데 누가 안식일이라고 하여 자기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 내어 물을 먹이지 않느냐?" (루가 13, 15)

그러나 그들은 병자가 나았음으로 하느님께 감사하거나,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았음으로 예언녀 안나처럼 기뻐하기는커녕, 안식일에 침대를 가지고 간다고 항의를 하였다.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했다고 주님을 죽이려고 하자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5, 17)

하느님께서 창조 사업을 멈추시고 일곱째 날 쉬신 것은 사실이지만 당신의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일곱째 날이 꼭 필요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은 노동으로 피곤하기 때문에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보내며 쉬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현재의 율법하에서 노동은 벌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세주이신 하느님께서는 창조활동을 멈추시고 쉬셨지만 피조물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시는 섭리활동은 멈추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다. 성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했다.

"일곱째 날 당신 일을 멈추셨던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일하시는가?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배우라.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일하시는가? 아버지는 창조된 모든 것을 돌보시고 하나가 되게 하신다. 떠오르는 태양과 제 궤도를 달리는 달과, 호수, 샘, 강, 비 그리고 씨앗과 우리 육체와 비이성적인 존재의 육체 안에서 이뤄지는 자연의 순리, 그리고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기타 모든 것들을 보면서 아버지의 쉬지 않는 활동을 배우라."

하느님이 우주 안에서 활동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주에 대해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와 사물의 자연스런 발달은 자명한 것도 아니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느님과 무관한 것도 아니고 하느님께 반대되는 것도 아니다. 처음 창조를 하시고 나서 하느님은 활동을 멈추신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 일이 있기 때문에 형체가 없는 물질 위를 움직이시던 성령께서는 이제 인간들 가운에서 작용하기 시작하셨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스승이신 주님은 이보다 더한 것을 말씀하셨으며 주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주님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알았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유일한 관계를 갖고 계시고 하나이심을 천명하셨다. 아버지께서 영적인 영역에서 활동하고 계신다면 주님도 마찬가지다.
만물이 "말씀의 능력으로" 창조되었다면 이제 "말씀은 사람이 되셨다." 아버지께서 안식일에 피조물을 어려움이 없도록 잘 돌봐주셨다면, 안식일에 자비를 베푸는 것은 아들의 권리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무조건 아버지와 절대적으로 동등하다고 주장하셨다. 아버지의 일과 주님의 일은 똑같다. 주님의 신적인 친자성에 대한 철저한 의식이 당신의 인성을 온통 뒤흔들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신적인 친자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복음서는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더욱 단단히 결심을 굳혔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 예수께서 안식일법을 어기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시며 자기를 하느님과 같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요한 5, 18)

적대감은 주님이 신적인 권한을 주장함에 정비례하여 증가하였다. 그들은 기적을 무시하고 주님을 없애는 확고한 계획을 세웠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시는 것은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신성과 이 세상에 오신 숭고한 목적 때문이었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알리는 증거가 될 것이며 부활은 주님의 신성을 밝혀주는 증거가 될 것이다. 십자가는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주님의 생애의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지만 인간을 위한 속죄의 몸값으로 자신을 바치시려는 의도에서 볼 때는 당신 생애의 시작에 놓여있다.

예루살렘

주님을 죽이려는 또 한번의 시도는 초막절 명절 때 예루살렘에서 있었다. 주님은 어떻게 그 많은 것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저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렇듯 아는 것이 많을까?" 하고 기이하게 여겼다. (요한 7, 15)

주님의 지식에 대해서는 인간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한 지식의 은밀한 원천은 주님과 하느님과의 유일한 관계였으며 주님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내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가르침이다." (요한 7, 16)

주님의 의도는 너무도 분명하다. 그분은 인간의 모습을 한 하느님이라고 주장하신 것이다. 그들의 반응은 물리적인 것이었다. 주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주님께서는 조용히 물으셨다.

군중들은 "당신이 미치지 않았소?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단 말이오?" 하였다. (요한 7, 20)

나중에 또 한번의 시도가 있었다. 그들이 분개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 하신 말씀이었다. 주님께서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시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그들이 유다백성의 시조의 자손들임을 주장함으로써 자신과 이교도들을 구별하였다. 사실 그대로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며 아브라함과의 유대관계는 할례를 통해 그들의 육체가 입증해 주었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아브라함의 혈연관계를 부인하지는 않으셨지만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 또 다른 친절한 관계를 주장하셨다.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참된 부성적인 관계는 있을 수 없다.

구세주로서는 아브라함을 경시하고 싶은 의사는 전혀 없었다. 아브라함에 대한 기억을 유대인들은 너무도 존중하였기에 이 지상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에 끼기만해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거라고 믿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자기 종족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메시아의 약속이 그의 백성에게 이어져 내려오는 통로며 수원(水源)이다.
아브라함은 그가 온 세상의 축복의 도구가 되리라는 위대한 약속을 받기도 하였다. 그가 노인이었을 때 그 약속은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별이 빛나는 밤에 천막 밖으로 불려 나와 하늘의 별처럼 그의 후손들도 번성하리라는 말을 들었다.

또한 아브라함은 나중에 자기의 외아들이며 약속이 이루어질 유일한 도구인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가 희생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받았다. 명령은 분명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을 막 이행하려고 하였을 때 하느님께서 그의 아들을 살려 주시고 양을 마련해 주셨다. 바로 그날 아브라함은 이사악이 아닌 다른 아들이며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신 그분을 실제로 얼핏 보았을런지도 모른다. 그분은 세상의 죄와 구원을 위해 천상 아버지에 의해 봉헌되실 것이다. 크리소스토무스가 말한 대로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위에 나무를 얹어 놓고 이사악을 바치려고 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았다."

지도자들이 그들은 아브라함의 합법적인 후손이기에 그들의 영적인 혈통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영적인 혈통이 하느님께 기원을 두고 있다면 그들은 당신의 메시지를 배척하지도 않고 죽이려 들려고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당신을 인정하고 사랑할 것이라고 답변하셨다.

예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 와 있으니 만일 하느님께서 너희의 아버지시라면 너희는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보내서 왔다." (요한 8, 42)

그때 그들은 예수께 물었다.

"그래 당신이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요한 8, 53)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당신이 아직 쉰 살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하고 따지고 들었다. (요한 8, 57)

주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 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당신이 아직 쉰 살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하고 따지고 들었다.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하고 대답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돌을 집어 예수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피하여 성전을 떠나 가셨다. (요한 8, 56-59)

아브라함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올 날"이 오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학수고대 하였다고 암시하셨다. 주님께서 "나의 탄생" 이라고 하시지 않은 점을 주목하라. 그들이 주님께 아직 오십도 안되었다고 대들었을 때 그것은 주님의 나이보다는 현실적으로 주님이 아브라함을 보셨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의미하였다. 그들은 주님을 단순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이 사용하신 똑같은 말씀을 사용하신다. "나는 있는 자"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있었다." 라고 하시지 않고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나는 존재하고 있다." 고 하셨다. 주님은 자신이 아브라함보다 단순히 우월하다고 하시지 않고 영원으로부터 존재한다고 하셨다. 조금 전에 주님은 아브라함이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흘끗 바라보았을 때 아브라함은 환희에 엄쳐 육화하신 주님의 생애를 보고 매료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아브라함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에 존재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셨으며 창조되신 분이 아니라 창조되지 않으신 분이며, 영원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며 이미 완전하신 분이시기에 더 완전하게 되시지 않는 분이시다. 아브라함이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었으나 하느님의아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는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 이전에 탄생하셨다고 하시지 않고 결코 탄생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주님은 옛 이스라엘의 "나다" 라는 분이시며 과거나 미래가 없는 "나다" 라는 분이시다. 즉 시작도 마침도 없는 영원한 "지금" 인 "나다" 라는 분이신 것이다.

지도자들은 주님께서 자기가 하느님이라고 하신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돌을 집어 예수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피하여 성전을 떠나 가셨다. (요한 8, 59)

이제 주님을 숭배하느냐 아니면 돌로 쳐죽이느냐는 양자택일밖에 없으며 그들은 후자를 택했다. 성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전 마당에 돌맹이들이 널려 있었을 것이다. 전에는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동일하다고 하셨을 때 주님을 죽이려고 했었지만, 이제는 주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고 아브라함이 예언을 통해 하느님의 영원한 존재를 누리고 계시는 주님을 고대하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주님을 돌로 쳐죽이려고 한다.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몸을 피하셨다는 표현은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 뭔가를 결코 개입시킨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피하는 것은 주님의 진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 주님을 찾는 자들에게 주님을 볼 수 없게 만듦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전에 한번 주님은 똑같은 사람들에게 똑같은 일을 하신 적이 있었다. 주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주님께서 몸소 목숨을 내놓기 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적들의 틈에서 빠져 나가셨다. 그들이 주님을 돌로 쳐 죽이려던 곳은 성전이었다. 신적인 성전에 돌맹이질을 하였으므로 언젠가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성전에는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날이 올 것이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후에 주님께서는 옛 성전의 마지막 유적지인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을 찾아가셨다. 그 때는 봉헌절 축제가 벌어지고 잇었으며, 과월절을 앞둔 마지막 대축제였었다. 봉헌절 축제는 유대 마카베우스가 제정한 것으로 시리아인들이 모독하였던 성전의 정화를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축제는 8일간 지속되었다. 요한은 복음서에 그 때가 겨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기후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겨울이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주님의 적들은 항상 그랬듯이 주님 주위에 모여들어 이렇게 물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둘러 싸고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죄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 하고 말하였다. (요한 10, 24)

주님께서는 공개적으로 당신의 메시아성을 공표하셨으며 활동과 기적으로 그 사실을 확증해 주셨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아관과 하느님의 메시아관은 서로 달랐다. 그들이 바라고 있던 메시아는 로마의 멍에를 부숴뜨리고 백성들을 해방시키며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 도시를 정화하고 로마 병사들의 막사와 로마 권력과 로마 화폐와 빌라도와 같은 로마 행정관들을 제거하실 것인지 매우 궁금했다. 유대 마카베우스가 그렇게 하였으며 그래서 이 축제를 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성전이 시리아인의 불경으로부터 정화 되었다면 예루살렘 도시를 로마의 신성 모독으로부터 정화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만일 주님이 정치적인 메시아시라면 공개적으로 선포하게 만들자.

주님께서는 메시아성을 이해하려면 몇가지 도덕적인 조건이 필요하다고 이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셨지만 기적으로는 의지를 강요할 수도 없고 집착의 자유를 분쇄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는 메시아가 누구인지 공개적으로 명백히 알려주실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요한 10, 30)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겨 세상에 보내 주셨다.
너희는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요한 10, 36)

그리스어에서 "하나" 라는 단어는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 하나의 본성을 의미한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은 하느님의 본성에 있어 하나이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하느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파견된 메시아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수세기동안 예언이 쇠퇴해지면서 그들의 희망도 정치적 해방자를 찾는 쪽으로 퇴락하였다. 그들은 신이 그들 가운데 실제로 머물러 계시기를 구하지 않았다.

비록 그리스도의 인성이나 인자라는 점에 있어서 아버지가 그보다 훨씬 위대하시지만 그리스도 메시아가 아버지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당신은 인성이 형성되기 전에 존재하고 계셨으며, 아버지께로부터 나와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성을 취하고 있었으나 신격체로서 신성에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며, "고통받는 종" 으로 나타나는 주님의 인성은 시작이 있다고 주님은 다시 단언 하셨다.

주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단언하시자 그들은

이 때에 유대인들은 다시 돌을 집어 예수께 던지려고 하였다. (요한 10, 31)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좋은 일들을 많이 보여 주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이 못마땅해서 돌을 들어 치려는 것이냐?"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0, 32)

그들은 하느님께서 치욕스럽게 인간의 형태를 취하시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인간이 자신을 신격화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돌로 쳐죽이려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들은 "당신이 좋은 일을 했는데 우리가 왜 돌을 들겠소? 당신이 하느님을 모독했으니까 그러는 것이오. 당신은 한갖 사람이면서 하느님 행세를 하고 있지 않소?" 하고 대들었다. (요한 10, 33)

주님은 인간이 신이 될 수는 없지만 신은 신성을 잃지 않고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대답하신다.

그 때에 유대인들이 다시금 예수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몸을 피하셨다. (요한 10, 39)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는 돌로 쳐죽이는 벌을 받는다. 그러나 돌멩이를 손에 들고 주님을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은 주님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잡기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아주 힘들었다. 때가 되어 주님께서 스스로 그들에게 자신을 넘겨주시게 될 때 그들은 모두 먼저 뒤로 자빠질 것이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25.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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