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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26. 하느님 화살통에 들어 있는 가장 강력한 화살

[그리스도의 생애] - 26. 하느님 화살통에 들어 있는 가장 강력한 화살


주님은 결코 자신을 위해 기적을 행하시지는 않으셨지만 당신의 위격에 대한 증거로써 기적을 행하셨다. 기적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일을 인간들 가운데서 실현시키는 특수 사명을 띠고 계심을 보여주는 표징이었다.
구약시대에도 예언자의 말을 확증해 주는 기적을 요구하였다. 아하즈가 예언자의 말을 뒷받침해주는 표징을 하느님께 부탁하지 않은 것은 그에게 믿음이 없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그럼에도 예언자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시는 메시아의 표징을 주셨다.

주님의 기적은 구원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졌다. 기적은 단순히 능력을 보여 주는 것만이 아니라 죄로부터 인간을 구해주는 표징이었다.
따라서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악마의 폭정으로부터 구원해주는 기적이 있으며, 물리적인 차원에서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죄, 즉 열병, 중풍, 나병, 눈이 멈, 죽음과 같은 것으로부터의 구원과 바다를 가라앉히고 바람을 복종하게 만드는 자연의 구원과 같은 기적이 있다.
수없이 많은 대략적인 기적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마태오 복음에 20개의 기적이 언급되고 있고 루가 복음에 20개, 마르코 복음에서 18개, 요한 복음서에 7개의 기적이 언급되고 있다. 구세주께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많은 기적들이 "주님은 병자와 눈먼 자와 절름발이를 고쳐주셨다." 와 같이 집합적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서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요한 21, 25)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당신이 메시아시요,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주장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훨씬 더 나은 증언이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성취하라고 맡겨 주신 일인데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증거가 된다. (요한 5, 36)

오관으로 볼 수 있는 명백한 증거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믿지 않은 것에 대해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일러 주지 않았던들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 죄를 변명할 길이 없게 되었다. (요한 15, 22)

기적은 신앙을 갖게 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누군가가 매일 죽음에서 부활한다 하더라도 믿지 않으려는 사람은 있다. 어떤 기적도 완벽한 믿음을 심어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성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의지가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렇게 인정했다.

"그대로 내 버려 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 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 하며 의논하였다. (요한 11, 48)

그러나 기적은 인정하면서도 기적을 행한 주님은 믿지 않았다. 주님의 공생활이 이제 막 끝나려 할 때 조사가 다 끝났다.  예수께서 그렇게도 많은 기적을 사람들 앞에서 행하셨건만 그들은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요한 12, 37)

그들이 쉽게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이사야는 수 세기 전에 내다보았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또 다른 증거는 이 자리에 복음서 기사 속에 예언을 삽입하고 있다. 이사야 예언서는 신약성서를 통털어 여섯 번 언급되고 있는데, 언제나 신앙이 결핍되어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예언이 성취될 수 있도록 백성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이 예언의 성취였다. 요한이 이사야서에서 따온 인용문은 이러하였다.

그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주여, 우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으며 주께서 보여 주신 능력을 누가 깨달았습니까?" (요한 12, 38)

이 구절은 이사야서 53장 1절이며 주님의 고통에 관한 예언을 담고 있다. 하느님께서 미래의 일을 다 아신다해도 죄인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결코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죄가 나타나고 불신앙이 드러날 때 그 원인을 분석할 수 있다. 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어 버린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입장을 인준하실 것이다. 불신앙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시며 주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셨다.

그러나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세상 끝날에 그를 단죄할 것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어떻게 말하라고 친히 명령하시는 대로 말하였다. (요한 12, 48-49)

최후의 날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 자의적으로 심판하시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영광스러운 자비로운 말들이 심판하는 권한을 갖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께 대한 태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이러한 예고는 주님이 하느님에 의해 파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주님의 인성은 시간속에서 존재하기 시작했으며 당신의 신성보다는 차원이나 지위가 더 낮은 것이었다. 주님은 아버지와 신성을 같이 누리고 계셨기 때문에 인성을 지니신 주님을 거부하는 것은 주님을 보내신 아버지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주님께서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지만, 주님의 화살통속에는 당신이 그들의 구세주이심을 납득시켜 줄 화살이 하나 남아 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2, 32)

십자가는 너무도 매혹적인 것이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끌어모을 것이다. 주님의 왕국은 이 세상 전체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죽음은 당신이 일생동안 해도 못 할 일을 성취하였다. 왜냐하면 주님의 죽음에는 인간적인 영웅심이나 헌신보다 더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죽음에 승복한 때문이 아니라 적나라하게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희생을 통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 갈바리아 산 위에서 주님은 다른 모든 사람처럼 죽으심으로써 스스로 인간이심을 증명하실 것이며, 또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죽으심으로써 스스로 하느님이심을 입증해 보이실 것이다. 20년 후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에 대해 설교 합니다." 신성만이 인간을 사로 잡을 수 있으며 가장 숭고한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은 우리가 살도록 우리 죄를 대신해 주님께서 죽으신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모든 사람을 주님 당신께로 이끄시는 것은 사람을 매료시키는 사랑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인 십자가는 이제 세상의 악을 응징하는 심판이 되었다.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 (요한 12, 31)

재판관이 죄수에게 판결을 내리듯이, 주님의 십자가는 세상에 판결을 내린다. 주님은 마음 속으로 단(Dan)에서 베르사베(Bersabee)까지 펼쳐지는 좁은 땅덩어리의 경계를 초월하여 멀리 내다보시면서 모든 사람은 십자가에 대한 태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재차 선언하셨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죄가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았을 뿐만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받아들이게 해준 사랑 때문이었다. 최후 심판은 각자가 성금요일에 대해 내리는 판단을 그대로 재가해주는 식이 될 것이다.

십자가로 인하여 사람들을 지배하던 "이 세상의 왕자" 인 사탄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게 되었다. 십자가는 마침내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해줄 것이나 율법과 도덕은 죄를 깨닫게 해줄 수 없을 것이다. 십자가는 죄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것이다. 즉 그것은 육체를 지니신 하느님의 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그분은 사람들이 높이 매단 분이시며 인간을 전구(轉求)하시기 위해 하늘까지 매달리신 분이시다.
인간이 주님을 위해 세운 왕좌는 죄악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음과 적대감을 보여 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보여 줄 것이다. 주님의 통치는 천상 높은 곳으로부터 이루어질 것이며 천상에서 주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당신께로 끌어들일 것이며 "모든 이의 주님" 이 되실 것이다. 주님께서 그 날 하시는 말씀을 - 악은 마침내 당신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정복될 것이다 - 성 바오로가 되풀이해서 말하였다.

또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달갑지 않은 조항이 들어 있는 우리의 빚문서를 무효화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권세와 세력의 천신들을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 시키시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끌고 개선의 행진을 하셨습니다. (골로사이 2, 14-15)

비록 사람들이 당신의 기적을 믿지 않았지만 주님은 여전히 당신의 화살통에 가장 강력한 화살을 남겨 두셨다. 그것은 땅에서 높이 들어 올려지는 것이었다. 들어올리는 것은 갈바리아 산이었지만 모든 사람을 당신께 끌어 들이는 것은 부활과 승천 때문이었다. 죽은 구세주는 아무도 매료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을 지상으로부터 높이 들어 올린 십자가와 당신을 하늘로 들어 올린 승천을 통해 주님은 모든 세속적이며 육체적이며 민족적인 유대관계로부터 해방되시어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통치권을 발휘하실 수 있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면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자석이 되어 모든 나라와 언어와 민족들을 당신께로 끌어들일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은 한번도 없으며, 오히려 당신이 지으신 땅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당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이 땅에서 포악하게 들어 올려지심으로써 사람들을 당신께 끌어 모으실 것이다.

"들어 올려지다" 는 똑같은 단어가 주님의 승천에도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은 주님께서 일단 하늘로 들어올려지면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과 "모든 사람들"을 당신께로 끌어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의 매력은 성금요일에 볼 수 있는 십자가의 치욕이 아니라 부활절과 승천에서 볼 수 있는 십자가의 사랑과 승리다.
어떤 종교는 무력으로 사람들을 끌어 들이지만 주님은 사랑의 힘으로 끌어들인다. 사람을 이끄는 매력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시다. 주님의 가르침은 주님의 위격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지, 주님이 당신의 가르치심 때문에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이 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이 것이 바로 주님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의 비결이다. 블레이크(Blake)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당신을 위해 죽지 않은 분을 당신은 사랑하겠는가?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은 분을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겠는가?"
만일 주님께서 죄로부터 구원하는 목적외에 다른 목적으로 오셨더라면, 십자가 대신에 존경을 받는 위대한 스승으로서 산위에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세워질 것이다. 만일 십자가가 궁극적으로 영광과 승리가 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주님께서 가리키는 치욕적인 시간을 외면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다면 존경은 받으셨을지 모르되 구세주로 존경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십자가만이 하느님께서는 완전히 거룩하시기에 죄를 미워하신다는 것을 보여 줄 수가 있으며, 또한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마치 당신이 죄가 있으신 것처럼 죄인을 위해 죽으심을 보여 주셨다.

이 점에 대해 군중들은 주님께 이상한 질문을 한다.

그 때에 군중이 "우리는 율법서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사시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려야 한다고 하시니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의 아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요한 12, 34)

구약성서를 안다는 자들이 메시아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놀라다니 이상한 일이다. 그들이 이사야서에서 그러한 내용을 분명히 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서에서도 인자가 무참하게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읽었을 것이다. 그들의 반대의견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분은 영원히 계실 분이신데 어떻게 죽으실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위로 들어 올려진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주님께서는 당신이 그리스도요, 메시아라고 주장하신 것도 명백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베드로가 신적인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그들도 영광스러운 메시아와 고통받는 메시아를 이해하지 못했다. 메시아는 영원히 사신다고 그들이 한 말은 옳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마리아에게 주님이 야곱 집안을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라고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시아는 죄를 속죄하는 희생물이 되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이 되신다는 관념이 구약성서 전반에 흐르고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을 보여 주시며 당신의 속죄의 은혜를 입도록 상기시켜 주심으로써 그들의 조롱에 대응하셨다. 어떤 교사들은 영혼 속에 빛을 밝혀 주었을 수도 있으며, 또 어떤 교사들은 어른거리는 양초일지도 모르지만 모든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조명을 받는다. 왜냐하면 주님은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 빛은 그들 가운데 그렇게 오래 계시지 않을 것이다. 세계를 비추는 것은 유일한 태양이다. 만일 세상의 유일한 빛이신 그분을 없애 버린다면 어둠이 그들을 엄습할 것이다. 영적으로 눈이 먼 것은 육체적으로 눈이 먼 것보다 더 고약하다. 이성의 빛이 감각의 빛의 완성이듯이 주님은 스스로를 빛이라고 하셨으며 이 빛에 의해 이성은 깨우침을 받고 완전하게 된다. 주님과 함께 믿음속에서 생활하는 자들을 주님은 빛의 자녀라고 부르셨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빛이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잠시뿐이니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 가라. 그리하면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할 것이다. 어둠 속을 걸어 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러니 빛이 있는 동안에 빛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되어라." (요한 12, 35-36)

주님께서 일부러 시간을 들여 당신의 희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을 바로잡아주시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이미 구약의 예언과 당신의 기적과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주님은 그들의 시선을 갈바리아 산에서 자신의 양심을 들여다 보는데 집중시키신다.
측은한 마음과 사랑으로 주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그들 가운데 계시는 동안 당신의 빛을 믿으라고 초대하신다. 이 말씀이 주님께서 대중들에게 하신 마지막이자 작별의 말씀이었으며 그것은 어둠 속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 말씀이자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분을 받아들이라는 초대말씀인 것이다.

"그러니 빛이 있는 동안에 빛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되어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피하여 몸을 숨기셨다. (요한 12, 36)

성주간의 화요일 저녁에 주님은 성전을 떠나셨다. 그 다음날,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이른 아침부터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성전에 몰려 들었다. (루가 21, 38)
그러나 주님은 나타나지 않으셨다.
태양은 일식에 들어 가고 있었으며 세상은 밤과 같았다.
주님의 때가 다가 온 것이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26. 하느님 화살통에 들어 있는 가장 강력한 화살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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