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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27. 단순한 교사 이상이신 분

[그리스도의 생애] - 27. 단순한 교사 이상이신 분


위대한 교사들은 제자들을 가르치지만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로 삼게 한 교사가 하나라도 있었던가?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이 세상 어느 교사도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 내다 볼 수 없으며, 죽음이 자기가 가르치러 온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혜로웠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 철학도들에게 자기가 독미나리 쥬스로 죽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독미나리 쥬스를 마시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사도들에게 맨 먼저 가르치는 근본으로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잘 보지 못하는 것은 이런 사실을 너무도 쉽게 잊어 버리기 때문이며, 현재는 사도들 자신들도 이런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주님께서 하나의 위대한 스승으로서 가르치셨을 때에도 사도들에게 십자가의 그림자를 드리워주셨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당하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불리우셨다. 이제 사도들은 주님과 하나가 되었기에 주님께서는 그들이 당할 운명에 대해 경고하셨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마태오 10, 16)

사도들은 인간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경계해야 한다. 주님께서 빵을 많게 하셨을 때 군중들은 그 기적을 하느님의 신성의 표시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즉시 주님을 경제적인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기적을 행하셨을 때 사도들의 기적에 대한 생각도 얄팍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썼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 그것은 사람들을 너무나 잘 아실 뿐만 아니라 누구에 대해서도 사람의 말은 들어 보실 필요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었다. (요한 2, 24-25)

사도들은 주님을 영혼의 빛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을 채워주는 이적을 행하는 자로 받아들이려 하였다. 주님은 사람들이 단순히 볼 만한 구경거리에 현혹되어 당신을 쉽게 믿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인기가 5일 이내에 당신께 적대감으로 바뀔 것을 알고 계셨기에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를 법정에 넘겨 주고 회당에서 매질할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을 조심하여라. (마태오 10, 17)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대해 줄 것인가에 대해 허황된 바램이 없으셨기에 포도줄기에 붙어있는 가지와 같이 당신과 가장 친밀한 자들에 대해서도 주님은 허황된 기대를 갖고 있지 않으셨다. 어떤 현인이나 신비가도, 부처나 공자까지도 자신의 가르침이 인간의 적대감에 불을 놓아 자신이 무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더 더욱 중대한 것은 세상의 어느 교사도 자신의 제자들이 자기를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자기와 똑같은 운명을 당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평범함은 미움을 유발시키지 않는다.

동물들은 보통 같은 종류는 죽이지 않으며, 인간도 평범한 관계에 있을 때는 그렇다. 그러나 인간은 물질과 당신 사이에 있는 황금의 척도이기에 둘 다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인간은 식물을 뿌리채 뽑아 버리고 자기보다 천한 동물들을 학살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보다 우월한 것은 무엇이나 미워하고 죽일 수도 있다. 만일 오만한 인간이 하느님을 도전자로 생각하면 하느님을 부인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어 힘없는 자가 되시면 인간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위한 대우주적인 십자가형을 생생하게 표현하셨듯이 제자들을 위한 소우주적인 십자가형을 주저없이 말씀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세속적인 것은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속 정신은 하느님께 관한 것을 반대하고 욕하고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박는다. 주님께서는 인류를 위해 지불하는 몸값 때문에 두 개의 다른 법정에 서신다. 두 개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사이에 채찍질을 당하신다. 사도들과 수세기를 통해 계승되는 그의 모든 후계자들도 더 이상 나은 대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너희를 법정에 넘겨 주고 회당에서 매질할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을 조심하여라.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마태오 10, 17-18)

사도들은 아직 박해를 받지 않았으며 주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성령 강림이 있기 전에는 별로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있기 전에는 별로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나중에 당신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 닥칠 일에 대해서도 거의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 하물며 그들에게 닥칠 일에 대해서야 생각인들 했겠는가? 이러한 세상의 미움은 위장되어 있다고 주님은 경고하신다. 제자들은 사법상의 죄목으로 고발될 것이다. 즉 법정에 끌려 와 허위재판을 받으며 "제국주의" 나 "국민을 호도한다" 는 죄목으로 고발될 것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정의감의 본능이 너무도 깊이 뿌리 내려 있기에 엄청난 불의를 저지르면서도 악한들은 정의의 망토를 걸친다. 독선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박해하는 것은 별 것이 아니나 주님께 했던 것처럼 그 제자들에게 법적으로 반대세력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핍박하는 것이 더 큰 박해다. 그들이 법정이라는 정의로 가면을 쓰고 위장을 하지만 미워하는 실제 이유는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악이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요한 3, 19-21)

세속적인 사람들은 처음부터 빛이신 주님을 의식적으로 미워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빛이 우리 눈에 자연스러운 것처럼 진리는 정신에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이 영혼을 비추며 그들이 죄를 드러나게 하실 때 은행강도가 경찰이 비추는 탐조등을 싫어하듯이 그들도 그 빛을 싫어한다. 주님께서 가져오신 진리를 사람들은 헌신을 요구하는 것으로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은 진리를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악한 행동으로 그들의 본성을 타락시켰기 때문에 주님의 진리가 그들의 양심을 불안케하였으며, 그들은 진리를 경멸하였다. 그들의 일상생활 습관과 부정직한 행위들, 비열한 열정들이 빛에 대한 격렬한 반발심을 유발시켰다. 병자들 가운데는 의사가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시킬까봐 진찰을 받으려 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제자를 원하는 교사가 아니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은 먼저 양심을 뒤흔들어 놓으시고 나서 그것을 정화시키는 구세주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양심을 일깨우는 분을 미워한다. 빛은 선의를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유쾌한 것이 못된다. 선의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이 좋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착하게 살기를 바란다. 주님은 당신의 현존이 관능성과 탐욕과 정욕에 대해 위협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어두운 동굴에서 몇 년간 살다보면 그의 눈이 태양 빛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무도 태양이 빛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누구나 커튼을 내려 햇빛을 막을 수는 있다.

이어서 주님은 계속 박해를 받으면서 제자들에게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대답할지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정서(正書)한 성명서나 원고를 준비할 필요가 없다. 주님은 당신 성령을 통해 그들에게 말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잡혀 갔을 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형제끼리 서로 잡아 넘겨 죽게 할 것이며, 아비도 또한 제 자식을 그렇게 하고 자식도 제 부모를 고발하여 죽게할 것이다. (마태오 10, 19-21)

어떻게 배반할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당신과 아주 가까운 자가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예고하시면서, 주님은 배반자를 자기 가족 가운데 있으며 형제가 형제를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를 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마태오 10, 22)

팔레스타인 땅에서 계약의 궤를 본국으로 운반해 온 암소들은 희생제물로 하느님께 봉헌되었다. 그러한 봉헌이 하느님과 일치한 보상인 것처럼 보였다. 성 바오로는 이렇게 표현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필립비 1, 29)

주님의 생애를 보면 갈바리아의 "시간" 이 있으면 반드시 승리의 "날" 이 있었듯이 제자들의 패배도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오 10, 22)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루가 21, 18)

영혼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흔들리지 않고 지배한다는 뜻으로 그것은 내적인 평화의 열쇠이며 자신을 두렵게하고 불행하고 실망하게 만드는 수많은 동요와는 구별된다. 영혼을 소유할 때에야 다른 것을 즐길 수 있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뜻은 역경과 시련과 박해를 당할 때 인내해야 함을 뜻한다. 십자가상에서 세 시간이 지나간 후에 주님께서는 당신 영혼을 차지하시어 천상 아버지께 다시 돌려드렸다.

이 시점에서 주님은 사도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죽으러 오셨기 때문에 사도들도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명확히 말씀하셨다. 세상이 주님께 십자가를 주었다면 제자들도 십자가를 예상해야만 된다. 세상 사람들이 주님에게 마귀가 들렸다고 말했다면, 제자들도 "마귀" 라고 불릴 것을 예상해야 할 것이다.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다. 제자가 스승만해지고 종이 주인만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 집 주인을 가리켜 베엘제불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그 집 식구들에게야 무슨 욕인들 못하겠느냐?" (마태오 10, 24-25)

그러나 박해하는 세력은 사도들의 영혼을 절대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주님자신의 부활이 그런 사실을 입증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지금 미리 사도들에게 보증을 하신다. 육체는 영혼의 동의 없이도 상처를 입을 수 있으나 영혼은 자신의 동의 없이는 상처를 입을 수 없다. 오직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인간적인 생명이 아니라 신적인 생명 곧 하느님을 잃는 것이다.

그리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마태오 10, 28)

제자들이 당한 부당한 학대를 변론해 줄 것이며, 숨겨진 모든 것들이 밝혀질 것이다. 참새들을 돌봐주시고 우리의 머리카락을 세어두신 하느님의 자비는 그들을 지켜보시고 섭리로 돌봐주신다. 주님은 사도들에게 "숨어사는 제자들" 이 되지 말고, 타협하지 말며, 너무도 지나치게 "자유롭게" 주님의 신성을 고백하지 않도록 경고하셨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십자가를 보여주시며 보다 대담하게 칼의 비유를 드신다. 주님은 외부로부터의 평화 조성자가 되지 않으실 것이며 제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이 주님을 설교할 때는 적대감을 불러 일으켜 신이신 주님의 모든 적들이 칼을 뽑아들 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왓다." (마태오 10, 32-34)

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즉 외부에서 파고 들어와 목숨을 빼앗는 칼이 있는가 하면, 내부에서 파고들어와 정화시키는 칼이 있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적들에게 칼을 뽑게 만든다는 것이다. 야고보가 칼에 대한 이 말씀을 들었으며 나중에는 헤로데가 칼로 그를 죽였을 때 이 말씀을 입증하였다.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시몬 베드로는 '칼을 드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십자가를 드는 자는 칼로 망한다." 는 말로 표현하였다. 십자가는 반대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사도들은 주님을 받아들이는 자는 그 가족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고 미리 경고를 받았다. 복음은 주님을 받아들이는 자들과 주님을 거부하는 자들간의 분쟁을 야기시킨다. 회개하지 않은 어머니는 회개한 딸을 미워할 것이고 회개하지 않은 아버지는 회개한 아들을 미워할 것이다. 따라서 가장 가슴 아픈 적은 자기 가족 중에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모든 것을 손실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생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육체적 생명과 정신적 생명이 그것이다.

테르뚤리아노는 로마 인들이 초대 그리스도 인들을 죽음에 처했을 때 이교도들은 "목숨을 구하라. 목숨을 버리지 말아라." 고 항상 간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시고 다시 취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생물학적으로 잃은 것을 영적으로 얻게된 것이다. 주님께 희생으로 바친 것은 결코 잃어 버린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요약하여 말씀하신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태오 10, 39)

사도들은 자기 땅을 차지하고 많은 자기 백성들을 십자가에 매다는 로마 인들을 종종 보았다. 주님께서는 죄수들이 못박히기 전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관습에 대해 언급하셨다. 십자가가 주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첫째 이유라는 것이 다시 한 번 분명해지고 있으며,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십자가로 초대하신다. 세상이 시작할 때부터 살해된 어린 양으로서 주님 스스로 속죄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으셨더라면, 제자들에게 그러한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권고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나중에 가서야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들도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될 때 주님께서 그 날 말씀하신 의도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오순절 직후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위에 당신 성령을 보내셨을 때, 십자가형에 대한 완전한 의미를 베드로는 깨닫게 되었으며 그가 들은 주님의 갈바리아 산에 대한 사전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여러분의 손에 넘어간 이 예수를 여러분은 악인들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되살리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세력에 사로 잡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 23-24)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서 벌어진 우연한 사고가 결코 아니었으며, 사도들과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에 있어서도 십자가는 결코 우연의 사고가 아닐 것이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27. 단순한 교사 이상이신 분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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