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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28. 이교도와 십자가

[그리스도의 생애] - 28. 이교도와 십자가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민족, 만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이것이 주님의 궁극적 목표였지만, 우선 당신의 복음을 유대인에게만 한정시키고자 하셨다. 후에 주님의 사명은 전세계적인 것이 되며 이교도의 세계를 복음의 대상으로 삼으셨다.

예수께서 이 열 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 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가라. (마태오 10, 5-6)

사도들에게 하신 첫 번째 지시는 이교도들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이교도들은 "외방 선교지역" 으로 통하게 되었다. 당분간은 사마리아인들도 제외가 된다. 그들은 유대인과 앗시리아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스라엘 집안에 한정해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제자들에게 분명히 지시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 해당하는 열 두 사도를 주님께서 선택하신 사실이 뒷받침 해주고 있다. 이러한 명령이 머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로마의 백부장인 꼬르넬리우스에게 세례를 줄 때 망설였다 그렇게 세례를 주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명백한 선언을 요구하였다.

사도들에게는 첫 번째 명령이었지만 주님은 이교도들과 여러차례 접촉을 하셨다. 주님은 이교도를 위해 기적까지도 행하셨다. 이러한 기적이 언제 주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전세계적인 것으로 확장하실런지에 대한 질문에 완전한 답변을 주고 있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단서를 마련해 주고 있다.

주님께서 이교도들, 즉 외방 선교자와 세 번 접촉하신 것 중 첫 번째는 로마 백부장이었으며, 두 번째는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이었으며, 세 번째는 게라센 지방에서 마귀들린 젊은이였다. 이 세 가지 기적에는 모두 공통된 요소들이 많이 있다.

처음 두 기적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졌다. 아마도 그 백부장은 가파르나움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수비대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태생이 이교도였을 것이 확실하다. 그는 베드로가 세례를 준 백부장 꼬르넬리우스와 에디오피아 여왕의 궁전에 사는 환관처럼 최소한 정서적으로 야훼를 섬기는 마음이 있었다. 이 로마 장교는 오랫동안 유대나라에 살고 있었기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갈라놓는 강력한 장벽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종이 병이 들어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주님께 직접 나아가지 않고,

백인대장이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유대인의 원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집에 오셔서 자기 종을 살려 주십사 하고 간청하게 하였다. (루가 7, 3)

주님께서는 이 기적을 별로 행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다. 루가는 중개자들이 예수께 와서 간곡히 부탁드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와서 간곡히 부탁 드리기를 "그 백인대장은 도와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루가 7, 4)

주님께서 종에게로 가고 계실 때, 백인대장은 사람들을 보내 그렇게 일부러 오실 필요까지는 없다는 전갈을 보냈다.
성 아오스딩은 나중에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시기에 자신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마음 속에 들어가시기에 황당한 자로 간주되었다."

이교도 백인대장은 주님의 능력을 부하들을 지배하는 자신의 권한에 비유하였다. 그는 자기 명령에 따르는 백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장교였지만 주님은 참된 카이사르요 왕이며 당신 명령에 복종하는 천사들을 거느린 최고 지위의 총사령관이시다. 분명 그러시다면 주님은 기적을 행하러 집에 들어 오실 필요가 없으실 것이다. 이 이교도는 주님께 계신 곳에서 명령을 내리시라고 제안한다. 백인대장이 요청한 대로 멀리 떨어진데서 기적을 행하였다. 이 이교도의 신앙을 생각하시고 외방선교지에서 보게 될 신앙을 예기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지금의 고향 땅과 비교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심부름 왔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종은 이미 깨끗이 나아 있었다. (루가 7, 10)

주님께로부터 신앙에 대해 이처럼 칭찬을 받은 이 첫 번째 이교도는 세상에 널리 버려있으면서 결국은 구원을 통해 하나가 될 "하느님의 자녀들" 중 하나였다.

주님께서 이교도에게 행하신 두 번째 기적은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것이었다. 백인대장에게 기적을 행하기를 꺼려하신다는 것은 암시적이었을 뿐이지만 여기서는 분명하게 거절하신다. 그것은 여인의 신앙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기적은 띠로와 시돈 근처에서 이루어졌다. 새 크리소스토무스와 다른 주석가들은 실제로 주님께서 외방전도지역으로 후에 알려진 지방의 경계를 넘어가셨다고 생각하였다. 그 여인은 가나안 지방출신으로 시로-페니키아 혈통이라고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그녀는 유대인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그녀가 "악령으로 미치도록 고통당하고 있는"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했을 때 주님은,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 오고 있으니 돌려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마태오 15, 23)

사도들은 그 여인을 위해 기적을 행하도록 부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기적인 안락한 마음으로 귀찮게 시달림을 받지 않고 혼자 가만히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가 계속 간청을 하며 주님을 경배하자 주님께서는 심하게 들리는 말씀으로 그녀의 믿음을 시험해 보셨다.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며 거절하셨다. (마태오 15, 26)

주님께서 언급하신 아이들이란 물론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개" 란 말은 경멸을 뜻하며 종종 유대인들은 이교도들에게 이런 말을 썼다.
로마 백인대장이 외견상 주님께서 지체하심을 견뎌냈듯이 이 여인은 아연실색케 하는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완벽한 신앙의 자세로 이렇게 답변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만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마태오 15, 27)

이 여인은 주님께 이렇게 말한 것이다. "저는 이러한 칭호를 받아들이며 그에 따른 대우도 달 게 받겠습니다. 개도 주인이 먹여 살리니까요. 개들은 이스라엘 자식을 위해 차려 놓은 성찬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개들도 먹을 양식을 얻습니다. 그것도 주인의 식탁에서 받습니다." 그녀는 비록 지위는 낮지만 주인 집에 속해있다고 간청하였다. 주님께서 그녀에게 부쳐준 바로 그 이름에 의해 그녀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이름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녀는 그 이름에 걸맞는 모든 것을 부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신앙으로 이겼고 주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마태오 15, 28)

옛날 요셉이 잠깐동안 형제들을 심하게 대했던 것처럼 구세주께서도 오랫동안 멸시하는척 하지 않으셨다. 멀리서 그녀의 딸을 고쳐주셨다.

세 번째 주님께서 이교도를 만나신 것은 게라센 지방에 들어 가셨을 때였다. 불결한 영을 지닌 사람이 주님을 만나러 무덤에서 나왔다. 이 사건이 벌어진 곳은 압도적으로 이방인 지역인 데카폴리스였다. 요세푸스 역사학자는 게리사가 그리스 도시라고 강하게 암시하였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양돈가였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유대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더 확실히 말해주는 것같다. 그들이 모세 율법에 도전하는 유대인들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교도 지방에서 주님께서 바람과 파도와 인간의 육체를 방해하는 세력보다 훨씬 악랄한 세력과 알력을 직접 대하시게 되었다는 사실에 상당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내적인 인간에게 혼란과 무질서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 폭풍우보다 훨씬 맹렬하고 더 무서운 뭔가가 여기에 도사리고 있다. 백인대장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에게는 온전한 신앙이 있었지만, 이 청년에게는 악마의 지배밖에는 없었다. 다른 두 이교도는 마음으로부터 구세주께 존경을 드리는 말을 하였지만, 청년으로 하여금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게 한 것은 타락한 젊은 사람 이방인의 영이었다.

그는 예수를 보자 그 앞에 엎드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크게 소리질렀다. (루가 8, 28)

주님께서 청년을 악령으로부터 풀어주시고 대신 악령을 돼지 안에 들어가게 해주셨을 때 마을 사람들은 주님께 자기 동네를 떠나라고 말했다. 가장 악한 모습을 띤 자본주의의 영은 그들로 하여금 어떤 영혼을 하느님과 다시 우정을 맺게 하는 것이 몇 마리 돼지를 잃은 것과 비교해 볼 때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끼게 만들었다. 존경을 받을 만한 게라세네 사람들이 주님께 떠나라고 말했지만, 죄인들인 사마리아 인들은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머무시기를 바랬었다.

외방 선교지와 관련된 이러한 세 가지 사건은 구원을 먼저 이방인에게 이뤄져야하고 주님께서는 당분간 당신의 가르침을 이스라엘 양에게만 국한시켜야 한다는 하느님의 계획에 예외적인 것이었다.

이교도들과의 간헐적인 접촉은 전세계적인 복음화의 원칙을 세우기에 충분하지는 않았다. 또 한편 주님께서 당신 백성이 거부한다는 이유 때문에 나중을 생각해서 이방인에게 눈길을 돌리셨다는 식으로 볼 수는 없다. 주님께서는 언젠가는 당신 백성의 지도자와 군중들을 모두 잃게 될 때가 오리라는 것을 항상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이런 일은 빵을 많게 한 기적이 있은 후에 일어났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로 주님께서는 유대인 가운데서 자신을 따르는 상류층이나 대중들 모두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선은 외방전도지역을 제외하고 당신 백성을 가르치는데 몰두하셨다.

구세주께서는 이교도들과 세 번 접촉하신 것을 가지고 사도들에게 이스라엘을 벗어나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이방인과 주님께서 오신 이유 사이에는 분명하고 내재적인 연관성이 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강하게 암시하고 제시하는 그런 때에도 이방인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세 가지 기적을 통한 접촉 말고도, 이교도들이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 세 가지 다른 기회가 있었다. 이러한 기회들은 각기 주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어느 정도 관계를 갖고 있다.

그중 첫 번째는 주님께서 탄생하실 때였다. 목동들은 고향 전교를 나타내고, 동방박사들은 외방전교를 나타낸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 주님의 곁에 모여 있다. 그러나 이방인이 찾아 온 것은 주님의 목숨을 노리는 첫 번째 암살계획과 동시에 일어 났다. 하느님의 배가 물 위에 뜨자마자 헤로데 왕은 두 살 아래 사내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함으로써 바로 가라앉히려고 하였다. 그리고 베들레헴에 나타난 별에 관한 예언에 대해서 헤로데에게 물어본 것은 이방인이었다.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아기 예수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이방인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되는 두 번째 계기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의 주선으로 그리스인들이 주님을 만나뵙고자 하였을 때였다. 이때에는 주님께서 유대 성서에 나오는 예언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셨다. ( 그것이 이방인들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주님께서는 그 대신에 자연질서의 법칙, 즉 씨앗의 법칙을 이용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 24)

이방인들 가운데서 온 동방박사들이 구유에 누워계시는 지혜를 발견하였듯이 이방인들 틈에서 온 현자들이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이 돋아난다는 희생의 법칙을 배웠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가면 가실수록 (여기서는 십자가를 지시는데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이교도들이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된다. 이방인들이 처음으로 주님의 추종자들 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후예들의 방문을 맞아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하신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요한 12, 23)

이방인들이 당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 세 번째 계기는 당신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실 때였다. 주님께서는 로마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셨으며 로마 총독의 부인이 꿈자리가 사나왔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간청했다. 주님이 죽으러 가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치레네의 시몬은 어쩔 수 없이 주님의 십자가를 도와 지고 가야했다. 주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현장에는 최소한 백명의 로마 병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인대장이라면 최소한 그 정도 숫자의 병사를 지휘했기 때문이다. 주님이 돌아가시던 순간처럼 많은 이방인들과 이교도들이 주님 주위에 몰려 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당신의 기적으로도 사람들에게 당신의 신성을 납득시키지 못하자 그 순간을 고대하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최후의 논거로 제시하셨다. 이제 인자가 높이 들어 올려졌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끌어들이기 시작하셨다. 주님께서는 유대민족과 갈릴래아 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당신의 생명을 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던 바로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덧붙이셨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 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 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 (요한 10, 16)

그리스도의 죽음이 전 세계를 위한 하느님 왕국의 실현이다. 갈바리아 산에 이를 때까지 사람들은 설교를 통해 가르침을 받았다. 갈바리아 산 이후로는 부활과 승천을 통해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다. 보편성의 윤리가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로막는 장벽을 무너뜨리고 구약성서에서 회개하게 암시되어 온 메시아의 보편적 사명을 드러나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명을 보편화 시키기 위해서는 골고타가 필요했다. 외방 전교지역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열매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야 전교사명이 주어졌으니 이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마태오 28, 19)

이제 주님께서 오시기 전부터 살고 있거나 주님께서 최후의 영광을 받으실 때까지 살게될 자들로서 이교도들은 이제 정당한 영광을 받으실 때까지 살게될 자들로서 이교도들은 이제 정당한 지위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날이 올 것이다. 즉,

심판 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회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마태오 12, 41)

솔로몬 시대에 살던 이방인들과 특히 세바의 여왕이 이방인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따르지 않았다고 비난하며 이스라엘에게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신앙심 깊은 여인을 배출한 띠로와 시돈 해안지역이 한 때 신적인 어부 집단을 키워준 가파르나움보다 더 관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 날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마태오 11, 22)

모든 악의 대명사와 같이 여겨지던 소돔도 처음에 혼자서만 계시를 받았던 이스라엘보다 훨씬 자비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너 가파르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성싶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베푼 기적들을 소돔에서 보였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 (마태오 11, 23)

미래에는 모든 이방인들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덕을 입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 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 놓듯이 그들을 갈라" (마태오 25, 31-32)

주님께서 단순히 설교가요, 교사셨더라면 외방선교지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전 세계에 걸쳐서 신앙이 전파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교사들이 전하는 복음은 어느 특정 민족에 속하는 서사시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 해당되는 구원이다. 갈바리아 산의 죽음이 있은 이후로 전교지는 이 세상의 왕이 이방인을 정당하게 차지하시게 되었다. 신약과 구약의 원칙적인 차이는 범위에 관한 것이다. 구약은 철저히 한 민족에게 국한되었지만 갈바리아 산에서 흘린 신약의 피는 유대인과 다른 민족을 갈라놓는 벽을 무너뜨렸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시간과 장소와 능력이라는 세가지 점에 있어서 보편적이었다. 시간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의 효력은 한 세대나 한 번 베푸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미리 정하셨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해서 그분을 세상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Ⅰ베드로 1, 20)

공간적으로도 보편성을 띄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은 어느 한 민족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당신은 두루마리를 받으실 자격이 있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은 죽임을 당하셨고 당신의 피로 값을 치러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 내셔서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 (요한묵시록 5, 9)

끝으로 능력에 있어서도 보편성이 있다. 주님의 구속으로 사할 수 없는 죄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요한 1, 7)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명을 전세계적인 것으로 만드신 것은 십자가상에서였다. 전교사들이 십자가와 가깝게 살면 살수록 모든 민족들에 대한 주님의 사명을 더 빨리 성취할 것이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28. 이교도와 십자가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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