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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29. 점점 강해지는 반감

[그리스도의 생애] - 29. 점점 강해지는 반감


주님께 대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성전지도자들의 반대와 미움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미움의 감정처럼, 마음속에서 밖으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마음 속에서만 주님을 미워했지만, 다음에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그러한 감정을 드러냈으며, 그리고 나서는 백성들에게 노골적으로 그러한 감정을 나타냈으며 마지막으로 그러한 미운 감정이 그리스도 자신에게 집중되었다.

가파르나움에서 중풍병자를 주님께 데려온 일이 있었을 때 그들 마음 속에 있던 악한 경향성이 드러났다. 즉시 기적을 행하는 대신, 주님은 그의 죄를 용서하셨다. 어떤 개인에 있어서나 꼭 개인적인 죄는 아니라 하더라도 병과 죽음과 악은 죄의 결과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먼저 병의 근본인 죄를 보시고 그것을 용서해주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코 2, 5)
이러한 기적은 그것을 행한 사람의 증거로 생각하는 대신 주님의 적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중얼거렸다. (마르코 2, 7)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행세를 한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였다. 구약성서는 하느님만이 그러한 권한을 행사하신다고 강조하였다. 하느님 홀로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당신의 인성을 통해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또 죄를 용서하고 계신다. 나중에는 주님께서 그러한 권한을 당신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물려주실 것이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 23)

그러나 이러한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바로 주님의 인성이 주님의 신성에 도구였던 것처럼 주님의 신성의 인간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생각은 아직 그들의 마음 속에만 자리잡고 있지만 인간이 어떤 생각도 하느님의 눈길은 피할 수 없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아 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는 것과 '일어나 네 요를 걷어가지고 걸어 가거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중풍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곧 요를 걷어 가지고 나갔다. 그러자 모두들 몹시 놀라서 "이런 일은 정말 처음 보는 일이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마르코 2, 8-12)

그들이 생각할 때는 주님은 하느님의 권한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였기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한 것이다. 죄를 사하는 당신의 권한에 대해 주님은 당신의 주장이 허구가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들은 자기들이 두 눈으로 본 것을 부인할 수 없었음에도 주님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백성들 가운데서는 점차로 커지고 있었으나 갈릴래아와 유대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 및 율법박사들 가운데서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기적은 믿지 않는 마음을 고쳐주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만일 마음이 꼬부라져있다면 이 세상의 어떤 증거도 그를 설득할 수 없으며, 주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율법학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비난을 퍼붓는 그들의 말 속에서 미움을 찾아 볼 수 있다. 주님께서 세리인 마태오를 사도로 부르셨을 때 그러한 일이 벌어졌다. 세리는 자기 나라를 정복한 로마 인을 위해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자기민족을 배신한 유대인이었다. 세리들은 마을에서 세금으로 일정액을 거두기로 약속하지만 그 금액을 초과해서 거둔 것은 모두 그가 갖는다. 자연히 이런 데서 온갖 부정이 유발되고, 세리는 시민들 가운데 가장 멸시를 받는 자가 되었다.

주님께서 책상에 앉아 세금을 걷고 있는 세리를 보셨을 때 마태오에게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나를 따르라." 고만 하셨다. 마태오는 즉시 그 말씀에 따랐다. 그렇게까지 반 애국적이었던 그가 나중에는 첫 번째 복음을 저술했고 가장 애국적인 시민이 되어 수없이 예언서를 인용하여 구세주를 낳은 이스라엘의 영광을 이야기하였다.

주님께서는 마태오 집에서 식사하는 초대를 받아들이셨다. 이일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그들의 편협한 의롭다는 생각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예수께서 마태오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세리와 죄인들도 많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자 그들은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마태오 9, 11)

주님께서는 스승이요, 교사로서 인정을 받으셨으나 지금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어울림으로써 당신의 명성을 위태롭게 하신다. 만일 나병환자들이 떼지어 있다면 주님께서 죄인들과 한데 어울리신 것은 주님도 죄인이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전에는 주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다 아셨고, 지금은 제자들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비난을 주님께 말씀드린 것 같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죄인들과는 다르게 그들 가운데 오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다. 외적인 희생으로 표현되는 엄격한 형식주의를 신봉하는 그들은 죄인들을 구해주는 진정한 희생을 무시하였다. 그들은 성서를 잘 안다고 으시댔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형식보다는 자비를 더 좋아하신다는 호세아서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참고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오 9, 12-13)

다시 한 번 주님께서 탄생하셨다고 하시지 않고 세상에 "오셨다" 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시간 속에서 존재하기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서 당신 자신이 아닌 인간이 되셨을뿐이라는 주장을 언제나 볼 수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새로운 도덕률을 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뭔가를 하시기 위해 오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자기가 죄로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영혼의 의사인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빛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소경은 결코 치유 할 수 없다.

"제사"라는 의식절차를 곧이 곧대로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넘어진 자들을 일으켜 세워주기 위해 주님께서 오신 것이다. 의사로서의 주님은 호기심으로 대드는 자나 죄를 부인하는 자 또는 죄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못되신다. 주님은 죄를 짊어진 사람이 되기 위해 오셨으며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라 죄인들만이 주님이 오심으로써 덕을 보게 될 것이다.

죄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처음 있는 일이다. 주님께서 교사가 되기 위해서만 오셨다면 노자처럼 당신의 도(道)를 쓰셨을 것이며, "익히고 실천하라" 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오셨으며 "몸 값" 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고자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을 불러 악을 없애게 하셨다.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가 5, 32)

주님께서 벙어리 귀신을 고쳐주셨을 때 반대가 더 노골화되었다. 이제는 이 반발심이 그들의 어두운 마음 속 폐쇄된 범위를 넘어서 백성들을 선동하여 주님을 반대하게 부추겼다. 이 기적을 본 군중들은 놀라 어안이 벙벙한채 이런 일은 일찍이 이스라엘에서 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 일로 자극을 받아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뱉게 되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저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 고 말하였다. (마태오 9, 34)

이러한 비난에 대한 답변으로 주님께서는 당신 신성의 능력으로 사탄을 몰아내셨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힘센 자가 차지하고 있는 집에 대한 비유를 이용하셨다. 집을 차지하고 있는 자보다 더 강한 자가 집에 들어와서 그 집의 모든 무기와 방어시설과 재산을 모두 차지해 버린다. 만일 주님께서 악마의 영역에 들어가시어 마귀들린 사람의 몸과 같은 집을 차지하신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힘과 다를 바 없는 강한 반 사탄의 능력이 드러난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들은 주님이 불결한 영을 가지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생수가 솟는 샘에 독을 풀어 놓고 갈증을 풀 우물이 그것밖에 없다면, 그들은 독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죄를 사해주시는 그 분을 모독한다면 어디서 용서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귀머거리가 귀머거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결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죄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아울러 죄의 용서도 필요없다고 하는 죄인들은 죄에서 구원하러오신 주님으로부터 영원히 스스로를 단절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들의 마지막 단계의 공격 대상은 주님 자신이다.

그 무렵,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잘라 먹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저것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다윗의 일행이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마태오 12, 1-3)

구약성서는 들판에서 곡식을 뜯어 먹는 것을 금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바리사이파들에 의하면,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이중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²탈무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어떤 여자가 밀껍질을 벗기기 위해 밀을 굴린다면 그것은 체질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밀알들을 부비면 그것은 도리깨질하는 것으로 보며, 옆에 달라붙은 것들을 깨끗이 뜯어내는 것은 알맹이를 골라내는 것이며, 밀이삭을 부수는 것은 밀을 빻는 것이며, 손으로 던져올려 까부는 것은 키질하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분개한 것은 성서의 계율을 어긴 것이 아니라 랍비의 계율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안식일을 모독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제 제자들이 한 일에 대해 노골적으로 주님을 공격한다.

주님의 답변은 세가지다. 첫째 주님은 예언서를 인용하시고 그 다음으로는 율법을 이용하시며 끝으로 예언서와 율법보다 더 위대하신 분, 곧 자신을 들어 답변하셨다. 주님께서 인용하신 두가지 사례 모두 의식의 세밀한 규정들이 보다 높은 상위 규범에 굴복하는 것들이었다. 주님은 사제 외에는 누구도 먹을 수 없는 제단에 차려 놓은 빵을 먹은 그들의 위대한 민족적 영웅 다윗을 예로 드셨다. 만일 신체적 필요성을 위해 단순한 의식에 관한 신적인 규정을 깨뜨려도 된다고 다윗에게 특혜를 준다면, 어찌 주님의 제자들에게 그것을 용인해줄 수 없겠는가? 다윗이 사울로부터 도망치다가 배고팠을 때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렇게 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는 하느님의 집에 들어 가서 그 일행과 함께 제단에 차려 놓은 빵을 먹지 않았느냐?
그것은 사제들밖에는 다윗도 그 일행도 먹을 수 없는 빵이었다. (마태오 12, 4)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생명의 위험이 의례적 규정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다윗은 단순히 배가 고파서 그 빵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임금을 모시고 있다고 간청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르고 있던 사도들은 더 위대한 분을 모시고 있으며 주님을 섬기는 것은 다윗이 지상의 왕을 섬기는 것보다 훨씬 중대한 일이었다.

그런 다음 주님은 안식일 규정을 어긴데 대한 비난에 대해 더욱 직선적으로 답하신다. 주님을 고발한 자들은 안식일에 성전에서 일하고 있었다. 제사를 준비하고 등불을 켰지만 그러한 일들은 성전을 돌보는 일에 속했기 때문에 그들은 안식일을 어기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안식일에 밀밭 가운데 아무런 영광스러운 모습도 보이시지 않은 채 성전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 여기 서 계신다.

잘 들어라.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마태오 12, 6)

이러한 심오한 말씀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로 들렸으나, 이 말씀은 예수께서 처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키셨을 때 당신 몸은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시므로 성전이라고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말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 안에 육체를 지니고 계신다. 주님의 인성 안에 가려 계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 어디서도 하느님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도들은 의례적 국정을 어겼다하더라도 그들은 성전 곧 하느님 자신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죄가 없었다.

모두 일곱 번 안식일을 어겼다고 그들이 주님을 고발했다. 주께서는 오그라진 손을 가진 사람을 고쳐 주신 후 이렇게 말씀하시자 가파르나움 회당에 있던 그들이 아연해진 적이 있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그 불구자에게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다른 손과 같이 성해졌다. (마태오 12, 12-13)

이제 반대는 끝났다. 처음에는 미워하는 마음에서 출발하여 제자들에게 따지게 되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사람들이 듣는데서 신을 모독했다고 비난하고 마지막에는 주님께 직접 대들었다. 가파르나움에서 기적이 일어난 후 주님께 대답할 말이 없자,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러가서 어떻게 예수를 없애 버릴까하고 모의하였다. (마태오 12, 14)

주님은 그들의 논쟁에서 뒤로 물러 나셨다. 아직 그들을 심판 할 때가 아니었다. 마태오는 이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양순한 성품을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 예언서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였다.

"그는 상한 갈대도 꺽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 드디어 그는 정의를 승리로 이끌어 가리니 이방인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태오 12, 20-21)

가끔 목동들이 피리로 부는 꺽어진 갈대보다 더 약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꺼져가는 초의 심지처럼 힘없는 것도 없다. 그러나 주님은 너무도 인자하신 분이어서 이렇게 약한 것이라도 결코 짓이기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은 당신께 대한 극히 사소한 열망도 무시하지 않으시고, 어떤 영혼도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연기 나는 심지는 더 이상 방을 비출 수 없지만 어떤 영혼도 불쾌한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부러진 갈대는 고쳐질 수 있으며, 연기나는 심지는 밖에 있는 능력과 은총으로 다시 불이 켜질 수 있다.

복음서는 그러한 갈등과 미움과 슬픔 속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이 공격을 해오는 때보다 주님의 인내심과 인자하심, 자제심을 보여주기 위해 더 적절한 때를 고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집단이었지만, 훨씬 힘센 적을 맡았기 때문에 서로 하나가 되어 이번에는 다소 정중하게 이렇게 주님께 부탁했다.

그 때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 몇이 예수께 "선생님,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하고 말하자 (마태오 12, 38)

그들은 처음의 기적같은 것은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특별한 기적을 바랐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절개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 (마태오 12, 39)

어떤 번역은 "간음한" 세대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간음죄는 하느님께 대한 영적인 불충실성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주님은 진리를 볼 수 있는 필수적 조건으로서 도덕적 행위의 중요성을 단언하셨다. 주님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의 신앙과 실천적 행위와 솔로몬의 지혜를 들었던 세바 여왕의 열성과 신앙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회개할 줄 모르는 태도와 얼어붙은 마음과 비교해 말씀하셨다. 솔로몬을 만나러 온 사람은 여왕이었지만 그녀는 오로지 지혜를 찾고자하는 마음에서 먼 길을 여행하였다. 따라서 그녀는 진리를 멸시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거슬러 일어나 심판할 것이다.

"심판 날이 오면 남쪽 나라의 여왕도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솔로몬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마태오 12, 42)

주님께서는 이방민족들이 귀기울여 말씀을 듣고 땅끝에서 지혜의 탐구자를 끌어들였던 유대민족의 위대한 예언자보다 당신이 더 우월하다고 스스로 주장하셨다. 이방인 신도들이 주님을 보고도 복음을 거부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참된 지성인들만 솔로몬보다 더 위대하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러 일어설 뿐만 아니라 또한,

심판 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회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마태오 12, 41)

니느웨 사람들은 이교도들이었으며 그들이 요나의 말씀을 듣고 회개를 하였다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위대한 분의 설교를 듣고 당연히 회개해야 되지 않겠는가? 니느웨 사람들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인간이 되신 하느님께 말씀 드릴 수 있는 특권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주님을 거부한다는 것은 다가오는 심판의 전조가 되고 있다. 그들이 기적을 요구할 때의 마음가짐은 비뚤어져 있었다. 왜냐하면 설사 주님께서 그들이 요구하는 기적을 행하셨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믿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적을 요구한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단죄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주님이 그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기적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예언자 요나의 기적이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절개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 요나가 큰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삼 주야를 지냈던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땅 속에서 삼 주야를 보낼 것이다." (마태오 12, 39-40)

다시 한 번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 위에 십자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주님께서는 삼 일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나시겠다고 간접적으로 시사하셨다. 요나가 뱃사람들로부터 당했던 것처럼 주님도 같은 일을 당하실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젊은 요나는 바다 속에 던져졌으나 주님은 무덤속에 던져질 것이다. 요나는 삼 일째 되는 날 바다 속에서 빠져나와 회개를 외치는 임무를 수행하였듯이, 주님께서도 부활하시어 성령을 파견하는 당신 사명을 완수하시고 죄를 씻어주며 회개를 외치실 것이다.

요나의 기적은 그가 하느님의 위임을 받은 예언자라는 증거였으며 그가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외칠 수 있는 권한을 뒷받침 해주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활은 주님의 활동을 정당화 시켜주는 뒷받침이 된다. 모욕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영광의 기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어떤 기적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심판 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회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마태오 12, 41)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면, 왜 그들은 요나가 가리키는 분, 즉 주님께 회개하지 않을까? 그들은 주님을 단죄하기 위해 기적을 요구했다. 그에 대해 주님은 그들을 단죄하는 기적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기적을 요구했지만, 주님은 땅 속에서 기적을 보여주셨다. 그들은 사람을 놀래주는 기적을 원했지만, 주님은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기적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자기들만을 위한 기적을 원했지만, 주님은 당신이 부활하신 후 당신 복음이 전파될 이방인의 땅에서 기적을 보여 주셨다.

나자렛에서 아는 마을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려 했을 때 주님은 당신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리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이방인들에게서 따온 구약성서의 예를 두 가지 들으셨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주님께서는 이방인의 예를 세가지 더 드셨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구원은 유대인 것" 이기 때문에 이방인 세계가 주님의 진리와 생명을 받아들이기 전에, 유대인들이 먼저 주님을 배척해야만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이 지상에 내려오신 이유임을 그들 앞에 명백히 제시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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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탈무드 : 탈무드는 이집트에서 노예상태로 신음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한 모세(Mose) 오경(五經)인 토라(Torah)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등을 히브리어로 '토라' 라 하고 흔히 율법이라 함)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은 유대민족이 후손들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치고 유대민족의 전통을 전승하기 위해서 구전되던 교훈들이 정리된 책이다.

로마에게 멸망당한 후 유대민족은 현재의 이스라엘을 건국할 때까지 약 2천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서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제2차 세계 대전중에는 나치에 의해서 6백만 명이라는 유대인이 강제수용소에서 학살당했다. 이러한 오랜동안의 고난속에서도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준 것이 바로 「탈무드」이다. 유대인들은 정신적인 영양분을 이 책에서 섭취했으며 생활의 규범이기도 했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29. 점점 강해지는 반감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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