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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35. 죽을 자로 지목된 왕의 아들

[그리스도의 생애] - 35. 죽을 자로 지목된 왕의 아들


주님께서 돌아가시는 주간 화요일에 마지막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구약의 예언을 한데 묶어주며 칠십 이 시간내에 당신에게 벌어질 일을 가리키고 있다. 성전 지도자들은 주님께 당신의 권한에 대해 질문했다. 그들의 주장은 그들이 백성의 대표자요, 보호자이기에 백성들이 그릇된 길로 인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며 그들이 어떤 지도자요, 안내자인지를 보여 주신다.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 하나 만들어 울타리를 둘러 치고는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마르코 12, 1)

예수님의 말씀들 듣고 있던 자들도 이사야서 5장 첫 몇 절을 읽고서 이미 알고 있듯이, 포도원을 만든 사람은 하느님 자신이시다. 하느님께서 포도원 주위에 둘러치신 울타리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들로부터 이스라엘을 따로 구분하여 하느님께서 각별한 사랑으로 당신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이스라엘을 돌보실 수 있게 하는 울타리다. 바위를 움푹 들어가게 해서 만든 포도즙을 짜는 확은 성전예배나 제사와 어느 정도 관련을 갖고 있다. 포도원을 망보고 지키기 위한 탑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특별히 깨어 지키심을 상징한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그것을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 갔다." (마르코 12, 1)

이 말은 이교도들의 영향에서 철저히 보호되고 있는 당신 백성에 대한 책임의 위임을 뜻한다. 이러한 위임은 우르 땅에서 불려나온 아브라함과, 참된 하느님을 섬기는 계명과 계율을 백성들에게 준 모세로부터 시작한다. 하느님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의 종 예언자들을 거듭거듭 너희에게 보내어 제발 마음을 고쳐 먹고 못된 길을 버리며 생활태도를 고치라고 하였다. 다른 신들을 받들어 섬기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야 선조 때부터 대대로 살라고 내어 준 이 땅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내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듣지 않았다. (예레미야 35, 15)

그 이후로 이스라엘 포도밭은 그들이 받은 축복에 걸맞는 충실함의 열매와 사랑을 하느님께 당연히 드렸어야 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이 열매를 거두기 위해 연속해서 세명의 하인을 보냈으나 모두 포도밭 일꾼들로부터 학대를 받았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나 예언자들이 당한 고통은 히브리서 11장에 잘 설명되어 있다. 나중에 순교자 성스테파노가 백성들이 예언자들에게 불충실한 것을 얘기할 것이다."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로운 분이 오시리라고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지만 이제 당신들은 바로 그분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사도행전 7, 52)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포도원 일꾼들의 포악성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다. 포악한 행위가 새롭게 벌어질 때마다 매번 다시 회개를 요구한다.

지주는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다. 소작인들은 이번에도 그들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 (마태오 21, 36)

마르코의 복음서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머리를 얻어 맞고 잔인한 학대를 받았으며, 어떤 사람들은 악행의 극치인 살해를 당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일반적인 것이지만, 예레미야가 받은 매질과 이사야의 살해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했다.

포도원 주인은 '이제 어떻게 할까? 그러면 이번에는 내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내야겠다. 설마 내 아들이야 알아 주겠지' 하고 말하였다. (루가 20, 13)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을 좀 더 명확히 보여 주시려는양 혼자 독백하시는 분으로 표현되고 있다. 당신의 포도밭에서 이 이상 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아마도" 하는 의미는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일까 하는 의문만이 아니라 그를 받아주지 않을거라는 기대를 뜻하는 것이다. 하느님과 한 백성과의 역사가 몇 분간 이야기 되었다.

주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백성들의 공격을 받은 예언자들과 배척을 받은 메시지에 대해 주님께서 인용하신 많은 구절들을 완전히 알아 들었다. 그리고 주님이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것도 들었다. 비유로 살짝 은폐하며, 주님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답변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자신과 천상 아버지와의 관계를 재확인하실 뿐 아니라 자신이 예언자나 종들보다 무한히 우월하신 분이심을 강조하신다.

이어서 당신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에게 당신이 그들의 손에서 당하게 될 죽음을 폭로하시며 계속 말씀하신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고 그가 차지할 이 포도원을 우리가 가로채자' 하면서 서로 짜고는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 내어 죽였다. 그렇게 했으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 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마태오 21, 38-40)

여기서 포도밭 일꾼들은 아들과 포도원의 상속자를 알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곡해의 여지가 없어 분명하게 주님은 그들의 손에서 당신이 당하실 가공할 죽음을 밝혀주셨으며 "포도원에서 쫓겨나" 예루살렘밖에 있는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가게 되며 아버지께서 죄많은 세상에 마지막으로 호소하시며 보내신 분이 당신이라는 것을 밝혀주셨다. 주님께서 인간으로부터 받게 될 존경에는 전혀 환상적인 것이 없었다. 천상 아버지의 아들이 받게 될 인사는 냉혹한 거부와 무례와 모욕이 될 것이다.

이 이야기를 말씀하신지 삼 일 안에 그것은 현실로 드러났다. 포도원지기로 생각되는 안나와 가야파는 예루살렘에서 쓰레기더미인 언덕으로 주님을 쫓아내고 죽였다. 아오스딩의 말대로 "그들은 차지하기 위해 주님을 죽였지만, 주님을 죽였기 때문에 잃어 버렸다."

주님께서는 아들을 죽인 자들은 상속권을 잃을 것이라고 말씀 하신 후, 당신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다시 성서를 상기시켜 주신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똑바로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고 하신 성경 말씀은 무슨 뜻이냐?" (루가 20, 17)

이러한 인용구는 시편 118장 22절과 매우 유사하다.
"집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 이는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나이다."
구약성서는 주님을 돌로 비유한 예언이 많이 있다. 주님은 다섯 번이나 포도나무의 비유를 사용하셨다.
아버지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하늘에서 파견된 하느님의 외아들에게 행해진 잔인성을 보여주는 비유를 사용하신 후, 모퉁이 돌의 비유를 사용하신다. 하느님의 아들은 천대받고 버림받은 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든 이를 하나로 일치시키며 묶어 주는 돌이 되실거라고 예고하셨다.

영광이 없는 비극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따라서 여기서도 아들이 받는 모진 학대는 궁극적인 승리, 즉 머릿돌로써 주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당신 집에 한데 일치시키시는 승리로 보상된다. 따라서 주의 죽음을 계획한 자들은 하느님 설계가에게 압도되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주님을 배척했지만, 그로 인해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발적으로 주님의 목적을 돕는 도구가 되었다. 그들이 거부한 자를 하느님께서는 왕으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포도원의 비유를 통해 주님은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고 머릿돌의 비유로써는 당신 부활을 예고하셨다. 주님은 당신의 운명과 천명(天命)이 이미 다하고 성취될 것처럼 말씀하시고, 비록 그들이 당신을 죽이긴했지만, 당신을 반대하는 것은 모두 무익하다는 것을 지적해주셨다. 삼일 후에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거라고 한 주님의 말씀은 놀라운 표현이었지만, 그들이 마음 속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던 바를 분명하게 나타냈다.

아무도 눈치재지 못하고 극적으로 느닷없이, 주님은 마지막 날 모든 사람과 민족들에게 행사하겠다고 하신 심판을 앞질러 행하신다. 현재로서 주님은 어린 양이 되기를 그만두고 유다의 사자가 되기 시작하셨다. 주님의 마지막 생애가 다 되간다. 지도자들은 주님을 받아들일 것인지 배척할 것인지 결정해야만 한다. 주님은 당신 목숨을 빼앗으면 당신 왕국이 이방인들에게 넘어가리라고 그들에게 경고하셨다.

잘 들어라.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이며 도조를 자 내는 백성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마태오 21, 43)

다니엘서에서 취한, 지상의 왕국을 가루로 만드는 돌에 대한 비유를 계속 말씀하시며 주님은 크게 외치셨다.

"그리고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며 그 돌 밑에 깔리는 사람은 가루가 되고 말 것이다." (마태오 21, 44)

여기서는 두 가지 상징이 나온다. 하나는 땅위에 피동적으로 놓여 있는 돌에 스스로 들이 박는 사람의 표징이다. 주님은 여기서 모욕을 받으시는 이 기간에 당신을 배척함을 의미한다. 단 하나의 상징은 예를 들어 절벽에서 떨어지는 돌과 같이 능동적으로 보는 돌의 표상이다. 이 표상은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세속적인 반대를 짓이겨 버리심을 뜻한다.
첫 번째 상징은 당신을 배척하는 현재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당신을 배척한 죄로 예루살렘은 황폐해질거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두 번째 상징은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을 하신 후에 당신을 배척하는 사람들과, 지상에 있는 당신 왕국의 발전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사람은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님은 주장하신다. 누구나 주님의 영향력을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거부는 자신을 박살내는 돌이다. 주님을 일단 만나면 누구도 무관할 수 없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의 인격 속에서 영원히 힘을 발휘하신다. 세상의 어느 교사도 자기를 배척하면 그 사람의 마음이 굳어져 훨씬 악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 계신 이 분은 삼 일 후에 죽음을 맞게 될 분으로 당신을 거부하는 자들은 그 마음이 썩어간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을 믿던 안믿던 관계없이, 주님을 알 게 된 후로는 누구나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당신이 사람들의 인생의 기초가 되는 바위가 되시든가 아니면 그들을 깔아 뭉개는 바위가 되신다는 뜻이다. 어느 누구도 주님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주님은 항상 현존하시는 분이시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지나가시게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이것을 치명적인 태만이라고 하신다. 치명적 태만과 무관심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 반대할 때도 파멸이 뒤따른다. 역사상 어느 교사도 자기 말을 듣고 거부하는 사람은 파멸을 당한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교사일 뿐이었다고 믿는 자들도 주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것인가 판단할 때는 망설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원래 구세주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외의 선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주님께서 자케오의 집에서 당신을 일컬으셨듯이, 구세주를 배척하는 것은 구원을 배척하는 것이다. 주님의 권한에 대해 질문한 자들은 비유의 영적인 의미와 비유가 그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분명히 알았다. 그들의 속셈이 들통났으며, 이 때문에 악한 의도를 품고 있던 자들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악은 밝히 드러날 때 항상 뉘우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더 악하게 될 때가 종종 있다.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은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알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잡으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무서워서 손을 대지 못하였다. (루가 20, 19)

선한 사람들은 죄를 알 때 뉘우치고, 악한 자들은 자신의 악이 밝혀질 때 화를 낸다. 플라톤이 주장한 대로, 무지는 악의 원인이 아니며, 교육도 악을 없애는 해결책이 아니다. 이들은 의지와 아울러서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의향과 아울러 지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진실을 알고도 미워할 수 있으며 선을 알고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다. 주님의 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당분간은 사람들이 무서워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주춤하고 있다. 주님께서 "지금은 너희들의 때다" 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주님을 거슬러 폭력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35. 죽을 자로 지목된 왕의 아들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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