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세계에는 다음과 같은 법칙이 있다. "만일 네가 사랑하면 사랑 받을 것이며, 네가 무서워하면 다른 이가 너를 또한 무서워할 것이다. 또 네가 남에게 봉사하면 남이 네게 봉사할 것이다. 참된 기쁨은 이를 초월한다. 타인을 사랑하되 사랑받기를 원치말며 남에게 봉사하되 남이 자기에게 봉사하기를 원치 말고, 남에게 호의를 베풀되 남이 자기에게 호의 베풀기를 원치 않는 사람만이 참으로 행복한 자이다." 이렇게 되면 기쁨과 평화는 한가지 말이 된다. 이 말을 우리는 성서의 아주 유명한 다음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께서 내게 계시하셨으니, 우리는 '주께서 당신께 평화를 주시옵기를'이라고 말해야 한다." 기쁨은 성 프란치스코 영혼 안에서 가장 상반되는 힘들을 서로 화합시켰다. 또한 그것은 성프란치스코 성인을 가장 개성적이면서도 순종을 잘하는 자로 만들었는데, 그에게 있어서 활동적인 고요와 정열적인 분류奔流는 서로 구별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성인은 의지와 포기를, 또 극히 순박한 단순성과 초자연적인 과감성을 연결시켰다.
앙리 브레몽-프랑스 문학사가이며 가톨릭 신부-은 기도를 표현하기를 좋아 했는데,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적인 정경이다. 시의 특성은 기도의 특성과 같이 자연을 초자연적 빛으로 투명케 하는 데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연애 시인'이었다. 그는 항상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기도에는 어떤 불평도 도 어떤 요구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은총에 대한 감사를 노래했다. 그러나 그가 받은 은총도 그에게서 악에 대한 생각-그는 항상 그 악으로부터 정화되려고 한다.-을 없에 주지는 못했다. 다만 기도에 대한 보상으로서 속죄를 바랄 뿐이었다.
사람들이 종종 생각하듯이, 프란치스코 성인은 인간적인 감정들이-하느님과의 일치 안에 완전한 기쁨만을 느끼게 될 정도로-완전히 극복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영적 생활은 노력과 시련 그리고 고초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영적 생활에 있어 어려운 것은 간난을 참고 받아들여 그 간난 중에서 하느님과의 일치하기 위한 가장 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내는 데에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참된 이상은 실로 준엄하고 고된 것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프란치스코회의 어떤 수사가 그를 아직 지상과 묶어 놓은 연줄에 대해서 말하면서 술회한 다음의 글에서 헤아려 볼 수 있다. "남을 사랑하되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갈망하되 갈망하기를 원치 말고, 현세 생활의 아름다움을 느끼되 그것을 누리려 하지 말고, 사조에 보조를 맞추되 그를 극복하고, 명예로운 투쟁을 하되 자기 자리를 충실히 지킬 것이다." 이 때문에 영적 생활의 깊은 곳에는 가끔 정신적인 상처의 흔적이 있을 수 있는데, 우리는 의지의 동요없이 이 고뇌를 견뎌 내야 한다.
제멜리 신부는 프란치스코회의 어떤 수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어떠한 위안도 받지 못했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었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는 그 깊은 고통 안에서도 위로 없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고, 자신을 이해해 주는 친구나 고해 신부를 찾아 얻지 못하면서도 타인을 이해하는 비결을 발견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평화를 다른 이들에게 주도록 명하는 일이 있는데, 정작 그 사람에게는 평화를 주시지 않는다.이는 매우 비극적인 운명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바와같이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과연 유치하고도 감동적인 낙관주의로 볼 것인가? 성 프란치스코의 본질적인 메시지는 하느님의 손으로부터 받은 그대로의 실존과 삶의 가치에 대하여 최대한의 긍정을 하는데에 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저편에 서 계시지 않는다. 피조물을 욕하면서 창조주를 찬양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랑이 깊은 자에게는 이 세상 전체가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고, 내가 받은 모든 것은 하느님이 주신 은총이 된다. 가난,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도 위격을 취하게되며 보다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을 띠게 된다. 즉 고통과 죽음도 귀부인이 된다. 만일 우리가 이런 곤궁중에서 하느님이 보내신 사신을 보게 되면 이런 곤궁들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선도 또한 잘 알게 될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모든 사물과 사건 안에 숨겨져 있는 선을 샘솟게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는 모든 피조물, 극히 비천하고 포악하고 심지어 생명이 없는 것들까지도 똑같은 형제애로 감싸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 모든 피조물이 이미 구원의 은총을 입은 것처럼, 매우 순결하고 자애로운 눈으로 피조물들을 바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