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만일 성 프란치스코의 단순성이, 지상에 낙원을 이룩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이탈하고 원시적인 자연에로 되돌아 가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착오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의 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단순성은 고된 마음의 정화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가 보여주는 단순성은 자연을 추구하지도 않고 또 그것에 최종 목표를 두고 있지도 않는다. 그의 단순성이 자연 안에서 포착하려 하는 것은 창조주의 의도와 그분이 우리에게 주는 소명과 그분의 손길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단순성은 하느님과 함께 모든 것을 극복하고 개선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신뢰심과 정열과 기쁨을 가지고, 생활 자체 안에서 시작된다. 그의 이러한 단순성은 하느님의 어떠한 선물도 거절하거나 배척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그가 꺼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애착하여, 혹시 그것을 소유할 대상으로 삼지 않을까 하는 것 뿐이다. 이 단순성은 선물은 어디까지나 선물로서 받아들이려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사랑이 오로지 선물의 주인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생활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 갈등은 이로써 그 해결을 보게 되었다. 즉 자연과-이 자연 안에서는 악이 지배하며 바로 그 악이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등을 돌리게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내적 비약-이 내적 비약은 우리를 하느님께 들어 올리고, 창조 사업 안에 있는 모든 능력과 대항하여 싸우게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사이의 전통적 갈등이 해결되었다는 말이다.
선과 악을 대립시키는 우주관은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선과 악이 끊임없이 대립하는 이원론을 주장하게 하였다. 오늘날까지 어떤 그리스도교적 호교론은 다음과 같은 견해에 기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이 자연 세계가 악한 것이라면 그것은 자연이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플라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불완전한 조화의 신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거나, 또는 아주 강한 어떤 악마- 하느님은 아마 그의 잘못을 계속 고쳐 주실 것이다-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다시 나타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구세주로서의 하느님은 창조주로서이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게 방해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자신의 단일화를 실현할 수 없어서 자신의 내적 분열을 존재론적 실재로 돌리려는 양심의 고백에 불과한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전혀 다른 해결 방법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 방법은 우리가 그것을 객관적으로 따져 볼 때에는 진리가 되지 않고, 단지 그것을 우리의 마음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게 하여 실제로 적용할 정도로,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진리가 된다. 자연은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될 때에만 악한 것이며, 이때에 하느님에게 대항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 깊은 통찰력과 사랑이 담겨져 있다면 자연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개자가 될 것이다. 자연은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까지 내려오는 활동의 매개자이며 동시에 우리 영혼을 하느님께로 끊임없이 들어 올려 주는 매개자가 된다.
사람들은 자주 프란치스코의 정신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 극기주의이 역할을 중시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 극기 정신을 프란치스코의 참된 본질에 어긋나는 것으로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 극기는 섬세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더 이상 자발적인 고행에 만족하지 않는다. 어디에 가장 엄격한 요구가 있는지 우리는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더 큰 극기는 자연의 온갖 충동에 대한 맹목적이고 완고한 대항에 있는가? 아니면 이런 충동을 거룩한 빛으로 비추고 영신화하고, 부패케하는 자애심에서 정화하고, 그 안에서 이들을 항상 개선하고 성화시킬 수 있는 더 놓은 곳에서 오는 능력을 발견하는 데에 있는가?
자연적 단순성과 초자연적 단순성을 혼돈하는 오류를 피하기 위해 성 프란치스코의 참다운 모습을 환기시키는 것은 결코 무익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것도 우리가 잠정에 차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을 사용하곤 했다. 그는 한때 기사도에 관한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인간 영혼 안에 싹트게 한 모든 감정은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정화되고 다듬어진 감정이다. 그런데 육체는 이런 정화된 감정을 너무나도 자주 어둡게 하고 억제 한다. 그래도 그 감정은 항상 육체를 감동시키기 때문에 육체는 감정의 충실한 노예가 된다. 단테가 베아트리체에 대해서 품었던 것도 품위있는 사랑에서 나오는 이러한 정화된 감정들이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단테로 하여금 낙원에서까지 그녀를 찾아 얻게 했다. 그녀는 낙원에서 신학의 화신이 되어 단테에게 이 지상에서 죽을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바라 볼 수 없는 모든 진리를, 즉 완전한 사랑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진리를 설명해 주었다.
◎루이 라벨은 '자연'이란 말을 두 가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어떤 때는 하느님의 힘과 자애로우심과 사랑을 노래하는 하느님의 선물로서 표현 할 때도 있고, 또 여기서와 같이 하느님을 배제한 순전히 내재적 현세계들 표현하는 말로서 말하자면 '외교인적인 자연'을 가리킬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