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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 그리스도론 3회 "

       그리스도 론  3 회

 
 

그리스도 론 3회

그리스도 논쟁                        (승전)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단일성

을 이루고 있다는 실체적 일치를 강조하고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지나친 반증은 그리

스도의 단성론 (單性論)을 출현시켰다. 이 견

해는 수도원장인 에우티케스가 내세운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일치가 합치된 후

에 인성은 신성에 흡수되어 없어져 버린다

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거부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의 구원

행위를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콘스탄

티노풀의 총대주교인 풀라비우스가 종교회

의를 소집하여 단성론을 단죄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쿠루스는 단

성론을 지지하여 449년에 에페소에서 종교

회의를 소집하여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옹호

한데 대해 교황 레오 1세는 이 회의를 강도

회의라고 규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의 실체적 일치를 주장하였다.


결국 그리스도 문제는 칼체돈 공의회(451년)

에서 최종 결정을 보아 극단적인 치릴로 주

장과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반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혼합과 구분이 없이

      한 위격 안에서 일치된다는

      위격적 일치가

      정통 교리로 성포되었다.


칼체돈 공의회 이후로 서방교회에서는 그리스

도 논쟁이 일단락되었지만 동방교회에서는 단

성론의 영향이 더욱 확대되었다. 특히 칼체돈

공의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단성론이 이집트의

디모티오와 베드로, 그리고 시리아의 베드로와

필록세누스에 의해 전파됨으로써 동로마제국의

혼란이 야기되었다.


여기서 황제(레오, 제논, 아나스타시우스) 는

사회적 혼란을 방지하고 제국의 질서를 유지

하기 위해 교회의 교리 논쟁에 개입하여 단성

론 경향의 칙서를 반포하였다. 그러나 단성론

의 세력이 확대되기 시작하는 동로마 제국에

서 쉬티아 수도자들은 칼체돈 공의회의 결정

을 다시 강조하여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칼체

돈파와 단성론파의 화해를 주선하는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단성론적 입장을

갖고 있어서 결국 ‘삼장 논쟁 (三章論爭)’이 발생

하였다. 여기서 황제는 교황 비질리오의 동의

없이 제2차 콘스탄티노풀 공의회를 개최하여

‘삼장 논쟁’을 끝맺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풀 공의회 이후에도 그리스

도교의 논쟁은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콘스탄티노풀 총대주교인 세르지오는 단성론

파와 정통교회를 화해시키려고 그리스도의 신

성과 인성의 관계를 명백하게 정의 내리기 위

하여 새로운 시도로 단의론 (單意論)을  주장하

였다. 그러나 단의론 역시 제3차 콘스탄티노풀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되면서 칼체돈공의

회의 결정이 다시 한번  확인을 받았다.


참고 : 한국가톨릭대사전, 1085년 판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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