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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데레사 말씀안에서

~ 한 평생 인류애 실천에 옮긴 영원한 " 세상의 빛 " (테레사 수녀 ) ~

                 한평생 인류애 실천에 옮긴 영원한

                          ‘세상의 빛’ (테레사 수녀는)


      ‘사랑의 선교회’ 창설…반세기 박애주의 실천
      빈민들 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어머니 자처
      노벨평화상 등 수훈…선종 후 ‘복녀’로 칭송
      끊임없이 봉사하며 유신론에 대한 의심 없애


      테레사 수녀는 한 평생 지금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위해 작은 일을 해주는 것이 사랑과 자비라고 믿었다. 테레사 수녀, 우리에게 더욱 익숙한 이름 마더 테레사. 최근 가톨릭 수녀들 중 테레사 수녀보다 더 잘 알려진 이는 없을 것이다. 1950년 인도 콜카타에 ‘사랑의 선교회(Missrionaries of Charity)’를 창설하고 45년 이상 가난하고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돌본 이 시대의 모범적인 인도주의 종교인이었다. 인류애를 실천한 공로로 1973년에는 템플턴 상, 1979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1980년에는 인도 최고의 시민훈장 바라트 나트나(Bharat Ratna) 상을, 그리고 그 이외에 세계 여러 곳으로부터 무수한 상을 받았다. 사망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어 ‘콜카타의 복녀 테레사(Blessed Teresa of Calcutta)’라는 칭호를 받았다.

      테레사 수녀는 1910년 8월 26일 지금의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수도 스코페에서 알바니아 계 로마 가톨릭 가정의 세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아그네스 곤히아 브락스히아(Agnes Gonxha Bojaxhiu). 아그네스는 ‘어린 양’이라는 뜻이고 곤히아는 알바니아 말로 ‘장미 봉오리’라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건축업자겸 수입상이었는데, 독립투쟁에 관여하다가 1919년 아그네스가 여덟 살 때 급사했다. 어머니는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천을 팔고 자수 놓는 일에 종사했다.

      유년시절부터 선교사가 꿈


      아그네스는 어려서부터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12살 때는 이미 자기도 커서 선교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18세에 아일랜드로 건너가 인도 선교로 잘 알려진 로레토 수녀원에 들어갔다. 로레토 수녀원으로 간 주된 이유는 인도에 가서 가르칠 때 필요한 영어를 익히기 위해서였다.

      1929년 19세에 인도에 도착, 히말리아 산맥 밑자락에 있는 다르질링에서 예비수녀생활을 시작했다. 1931년 5월 24일 수녀가 되기로 서원하고, 그와 함께 ‘테레사’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6년이 지난 1937년 5월 14일 종신 서원을 하고, 콜카타에 있는 로레토 수녀원 부속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나중 교장까지 되었다.

      그러던 중 중병을 앓게 되었는데, 일을 하지 못하고 쉬는 동안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었다. 그녀는 교사로서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지만, 콜카타 빈민들의 삶을 보면서 인도 중류 가정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하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1943년 그 지방에 닥친 가뭄과 흉년으로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고, 거기다가 1946년 8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유혈충돌로 도시는 완전히 공포와 실의의 도가니였기 때문이었다.

      1946년 9월 10일 테레사 수녀는 연례 피정을 위해 콜카타에서 다르질링에 있는 로레토 수녀원으로 가는 도중 ‘부름 속의 부름’ 혹은 ‘제2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36세 때의 일이다. “수녀원을 떠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했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은 믿음을 버리는 것이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48년 로레토 수녀복을 벗고 인도 전통 의상인 흰 면 사리에다 가장자리를 파란색으로 두른 간단한 옷을 입고, 인도 시민권을 획득하고, 콜카타 빈민가로 들어갔다.

      처음 빈민들을 위해 학교를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직접 돕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얼마간은 외부로부터의 자금 지원도 받지 못해 구걸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안락한 수녀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았지만 끝까지 버티어 나가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돌보아 주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인도 수상을 포함하여 인도 당국의 인정과 호의를 얻게 되었다.

      1950년 10월 7일 바티칸 교황청으로부터 ‘사랑의 선교회’를 시작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다. 테레사 수녀는 선교회의 목적이 “배고픈 사람, 헐벗은 사람, 집 없는 사람, 불구된 사람, 눈먼 사람, 나환자, 사회에서 남이 자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 사회에 짐이 된 사람들, 모두가 상대해 주지 않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라고 했다.

      1950년 사랑의 선교회는 콜카타에서 13명의 회원으로 시작했지만, 급성장하여 1960년에는 인도 전역에 25개의 지부가 생기고 1963년에는 ‘사랑의 선교회 형제단’이 창설되었다.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사랑의 선교회는 인도 이외의 나라로 나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호스피스, 약물중독자, 알코올중독자, 창녀들을 위한 요양소를 포함하는 많은 지부를 설립하고,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 미국과 유럽에도 센터를 세우고, 아동학대의 희생된 어린이들을 위한 고아원, 나환자, 결핵환자, 정신병환자, 홍수나 가뭄이나 전염병에 희생된 사람들, 난민들, 노숙자 등을 위한 시설들도 건립했다.

      특히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힘을 썼는데, “빈민가 시궁창에서 짐승처럼 살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천사처럼 죽을 수 있는 아름다운 죽음”을 선사하려는 것이었다. 죽기 직전에 들어온 사람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배경에 따라 마지막 종교 의례를 치르는데, 이슬람교인이면 쿠란을 읽어주고, 힌두교인이면 강가(Ganges) 강에서 떠온 물을 나누어주고, 가톨릭이면 종부 성사(終傅聖事)를 받게 하는 등 “위엄을 가지고”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선종 직전까지 선교회 이끌어


      테레사 수녀는 국제적으로도 난민이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면서 세계를 누비기도 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베이루트가 포위되었을 때 격전지에 갇혀 있던 어린이 37명을 양측으로부터 휴전 약속을 받고 구하기도 하고, 공산권에도 도움의 손길을 뻗었고, 이티오피아 아사자들, 체르노빌 원전 희생자들, 아르메니아 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여행하기도 했다.

      1983년 테레사 수녀는 로마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할 때 심장마비 증상을 나타냈다. 1989년 두 번째 심장마비 이후에는 페이스메이커의 도움을 받았다. 1991년 멕시코 방문에서 폐렴으로 고생한 다음부터 심장병이 재발했다. 은퇴하려 했지만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의 만류로 책임자 직을 계속했다. 1996년 4월 낙상으로 쇠골이 부러지고, 8월에는 말라리아를 앓고 나서 좌심실이 활동을 정지하게 되었다. 심장 수술을 받았으나 건강은 계속 악화되어, 1997년 3월 사랑의 선교회 책임자 자리에서 사임, 그해 9월 5일 사망했다. 1주일 후 거행된 장례식에서 인도 정부는 종교적 차별을 두지 않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섬긴 그녀의 희생적 봉사 정신을 인정하고 국장으로 대우했다.

      테레사 수녀 사망 당시 사랑의 선교회에는 4천명의 수녀와 300명의 형제들이 123개국에 있는 610개의 지부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세계 가톨릭 교회 전체적으로 성직자가 되겠다는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사랑의 선교회는 계속 성장해 왔고, 이 성장은 테레사 수녀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는 5천명의 수녀들이 봉사하고 있다.

      최근에 출판된 그녀의 전기 『Mother Teresa: Come Be My Light』(2007)에 의하면, 테레사 수녀는 거의 50년 가까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종교적 신념에 대해 의심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의 편지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과 믿음 없음으로 인한 고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내 믿음이 어디 있는가? 저 깊은 곳에서도 공허와 흑암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청컨대 나를 용서하라. 내가 나의 생각들을 하늘에 상달되게 하려 하면 너무나도 확실한 공허감 때문에 그런 생각들 자체가 예리한 칼날처럼 되돌아 와 나의 영혼에 상처를 준다. 이 알지 못할 고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나에게는 믿음이 없다. 거절당한 느낌, 공허감, 믿음도, 사랑도, 열정도 없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애쓰고 있는가?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영혼도 있을 수 없다. 영혼이 있을 수 없다면, 예수여, 당신도 진짜일 수 없다.”

      이런 고통과 고뇌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신비적 사상가가 거쳐야 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테레사 수녀도 거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 사람의 영적 깊이가 실로 깊어지면 유신론적 인격신에 대한 전통적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신은 존재나 비존재의 영역을 넘어서는 ‘없이 계신 이’ 쯤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데, 어찌 아버지 같은 존재가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전통적 신관을 그대로 답습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이런 의심과 공허감을 가지고 그렇게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다고 하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테레사 수녀에 의하면 그녀를 움직인 것은 ‘사랑’과 ‘자비’이다. 그가 말하는 ‘작은 일’, 지금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위해 작은 일을 해주는 것이 사랑이고 자비라는 것이다. 그녀의 삶은 이런 원칙을 끝까지 치열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었고, 그 결과 그렇게 큰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랑-자비로 종교적 신념 완성


      지금 테레사 수녀는 지옥에 있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남의 고통을 차마 볼 수 없는 그런 마음의 소유자라면 자기 혼자 천국에 가서 호강하는 일을 마다하고,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사는 지옥행을 자청했으리라는 이야기이다.

      빛이 강하면 그늘도 있는 법. 테레사 수녀에 대한 비평도 상당하다. 모금된 자금의 용처가 불투명하다, 인도를 부정적으로 보이게 했다, 피임이나 낙태를 반대했다 등등이다. 이런 비난이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이룩한 성과에 비추어볼 때 그런 비난은 힘을 얻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테레사 수녀의 희생적인 섬김의 삶에서 종교적인 삶의 열매가 어떠한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실증을 본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