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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종(베르나르도) 신부님 글

~ 당당한 삶을 꿈꾸며,,, /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

<당당한 삶을 꿈꾸며>

 



2014, 8, 2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마태오 14,1-12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당당한 삶을 꿈꾸며>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에,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알기에,
때로 불신의 늪에 허덕이고 있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희망이 무엇인지 알기에,
순간순간 절망의 나락에서 헤매고 있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자유가 무엇인지 알기에,
나를 위해 다른 이를 억압하려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에,
때때로 불의로 내 삶을 더럽히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에,
거짓으로 다른 이를 현혹하려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참된 강함이 무엇인지 알기에,
나약함을 감추려 짐짓 강함을 드러내려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참된 일치가 무엇인지 알기에,
나를 정당화시키고자 내 편 네 편 가르려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참된 삶이 무엇인지 알기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살림보다 죽임에 길들여지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희망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참된 강함, 참된 일치, 참된 삶이 무엇인지
차라리 몰랐다면 행복했을 텐데
이것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태어나면서 죽는 순간까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가지게 된
나의 일부, 아니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지 못했다면,

불신의 늪에 허덕이는
나를 보지 못했다면,

절망의 나락에서 헤매는
나를 보지 못했다면,

다른 이를 억압하려는
나를 보지 못했다면,

불의를 저지르는
나를 보지 못했다면,

거짓으로 다른 이를 현혹하려는
나를 보지 못했다면,

겉으로만 강한 척하려는 나약한
나를 보지 못했다면,

분열로 치닫는
나를 보지 못했다면,

죽음의 언저리를 겉도는
나를 보지 못했다면

차라리 두려움이 없을 텐데
이것을 보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나를 속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밖에서가 아니라
나로부터 생기는 것,
나를 보면서 두려움 없이
당당해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아는데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두려워하는
가련한 인간으로 살아가느냐?

비록 힘에 부치더라도 끝까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걸어가는
당당한 사람으로 죽느냐?

바로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가련하게 살아가는 헤로데와
당당하게 죽어 간 세례자 요한
이 사이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긴 호흡으로
내 몸과 마음을 다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