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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종(베르나르도) 신부님 글

~ 깨어 있는 인도자, 깨어 있는 추종자가 되어야 합니다. /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

<깨어 있는 인도자, 깨어 있는 추종자가 되어야 합니다>

 



2014, 8, 5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평화방송 라디오 오늘의 강론)

마태오 15,1-2.10-14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바리사이들이 그 말씀을 듣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깨어 있는 인도자, 깨어 있는 추종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죽는 순간까지 무수히 많은 인간관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나와 너’라는 가장 단순한 인간관계가 모이고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거대한 인간 사회를 만듭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든 인간관계 안에는 이끄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인간관계 안에서 누군가를 이끌고 동시에 누군가를 따릅니다. 물론 어떠한 인간관계 안에서든 이끎과 따름이라는 역할이 고정적인 것은 아니고, 어느 때는 이끄는 역할, 어느 때는 따르는 역할을 맡기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끎과 따름 가운데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고 우선적일까요? 흔히 많은 사람들은 따름보다는 이끎에 무게를 둡니다. 제대로 이끌 때에 제대로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올바른 길을 걸어가려는 이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끎과 따름은 상호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 차원이나 사회적 차원에서, 보다 참되고 보다 선하고 보다 아름다운 삶을 이루기 위한 여정에서 올바른 인도자와 올바른 추종자가 최선의 조합입니다. 비록 더디더라도 이 여정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끄는 사람이든 따르는 사람이든 둘 중의 하나는 올발라야 합니다. 올바른 인도자는 빗나가는 추종자를 준엄하게 꾸짖어 제 길을 걷게 하고, 올바른 추종자는 불의한 인도자를 정의롭게 비판함으로써 다시금 제 길로 돌아오도록 다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의한 인도자와 이에 맹목적으로 동조하는 불의한 추종자가 결합된다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불의 밖에 없고, 그럼으로써 공멸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의적절한 가르침이요 따끔한 충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살려거든 무조건 나를 믿고 따르라.’ 외치는, 존엄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애써 눈을 감고 오직 삭으러들 권력과 재물에 눈먼 지도자들과, 그들이 주장이 무엇이든 맹목적으로 따름으로써 스스로를 참 사람 이하로 전락시키는 눈먼 이들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은 이러한 눈먼 현실의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세월호 참사 112일째를 맞이했지만, 4월 16일 그 날의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세월호의 침몰 과정뿐만 아니라, 단 한사람도 구조하지 못한 이유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가족들을 가슴에 묻은 유가족들은 갈기갈기 찢겨진 몸과 마음으로 전국을 돌면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았고, 광화문광장과 국회에서 목숨을 건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으며, 아직도 두 분의 아버지는 안산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그리고 교황님을 만나기 위해 대전까지 이어지는 도보 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세월호 가족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려는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철저한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그리고 안전한 사회 건설’입니다.

그러나 많은 정부 여당의 지도자들은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기 보다는 세월호 가족들을 더 큰 보상을 얻기 위해서 떼를 쓰는 사람들처럼 호도하고, 중요 언론 매체들은 앵무새가 되어 여과 없이 무책임한 정부 편들기에 나서며, 보수단체원을 자처하는 이들은 세월호 가족들을 향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소리를 뱉어내고 있습니다. 제 목숨 살리기에 급급한 정부와 편향적인 보도를 일삼는 언론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세월호 진상규명의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비극적인 참사를 통해서나마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거듭나야 할 우리의 현실은 힘 있는 눈먼 인도자와 다수의 눈먼 추종자가 합세하여 오히려 더 혼탁해지고 있습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눈먼 인도자입니까, 아니면 깨어있는 인도자입니까? 눈먼 추종자입니까, 아니면 깨어있는 추종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