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십자가와 거짓 십자가>
2014, 8, 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평화방송 라디오 오늘의 강론)
마태오 16,24-28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참 십자가와 거짓 십자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삶의 고뇌와 힘겨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나이를 먹고 성장해가면서 이러한 고뇌와 고통은 점점 다양해지고 그 무게도 점점 무거워집니다. 또한 고통의 원인도 다양하고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 역시 사람마다 크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 삶의 고통은 살아있음의 뚜렷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은 이는 고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삶의 고통을 그저 회피하거나 없애버려야 할 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일생을 함께 하는 가장 가까운 벗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처럼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삶의 그림자처럼 항상 쫓아다니는 고통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흔히 ‘십자가’라고 표현합니다. 가까운 친구가 삶의 고통을 하소연 할 때에, ‘조금만 인내하렴, 그것이 너에게 맡겨 주신 주님의 십자가일거야.’ 라고 위로합니다. 또한 자신의 삶의 너무나도 힘겨울 때, ‘주님, 지금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힘과 용기를 주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매달리심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최고의 상징이 된 십자가는 가장 참혹하고 고통스러우며 수치스런 사형방법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살아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고통을 주님께서 맡겨주신 십자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찌 보면 그리스도인다운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온 세상을 새로 하시기 위해서 처참한 십자가의 길을 앞서 걸어가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기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고통이나 이러한 고통을 일으키는 것들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십자가로 받아들이는 것은 소중한 신앙고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분명 ‘고통’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삶의 고통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고통이 다 ‘십자가’인 것은 아닙니다. ‘고통’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을 ‘십자가’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때로는 순교자인척 하려는 교만과 기만, 그리고 다른 이들을 대한 교활한 속임수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삶의 고통이나 그 원인을 십자가라고 여길 때에, ‘참 십자가’와 ‘거짓 십자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참 십자가와 거짓 십자가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참 십자가는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버림으로써 따라오는 삶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맞이하게 되는 고통입니다. 부당하게 억눌린 사람들과 함께 싸우다 억누르는 불의한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는 비난과 억압, 불의와 부정에 협력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맞게 되는 배척, 사람이 존엄한 세상을 보듬기 위해 일하다가 자본과 권력이 우상화된 세상으로부터 받는 불이익, 바로 이러한 것들이 참된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십자가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따라오는 고뇌와 고통입니다. 불의한 독재자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겪게 되는 고통, 이윤 추구에 혈안이 된 경제인이 느끼는 죽음 같은 경쟁 속에서의 고통, 자신의 탐욕을 채우지 못한 상실감에서 오는 고통, 이러한 고통 역시 삶의 고통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고통을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러한 고통을 ‘십자가’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들께서 생각하시는 자신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과연 그것이 예수님처럼 자신을 죽이고 다른 이를 살리는 참된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들은 외면한 채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고통을 십자가로 미화시키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하루 믿음의 벗님들 각자의 십자가에 대해서 묵상해 보시고, 거짓 십자가를 내려놓고 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지종(베르나르도) 신부님 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런 그리스도인이기를 /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 (0) | 2014.08.11 |
---|---|
~ 믿음, 함께 있다는 느낌 / 상지종(베르나르도) 신부님 ~ (0) | 2014.08.09 |
~ 예수님 뒤에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 상지종(베르나르도) 신부님 ~ (0) | 2014.08.07 |
~ 깨어 있는 인도자, 깨어 있는 추종자가 되어야 합니다. /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 (0) | 2014.08.05 |
~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 (0) | 2014.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