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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프란치스코) OFM

- 사순 제 4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사순 4 금 요한  7,1-2.10.25-30(15.3.20)

예수님께서는 남몰래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요한 7,10)

Can This Be the Christ?

 

                        

 하느님의 때와 뜻을 따르는 수난의 길  

 

살다보면 한 개인이든 정치집단이든 재벌이든, 종교집단이든

 자신 안에 자리 잡은 악과 부정을 감추거나 합리화하려고 다른 사람이나 집단이 지닌

‘선’과 ‘진실’을 시기 질투하며 비난하고 왜곡시키는 이들을 만난다.

 

 행복과 기쁨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주기보다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나 자신이 그렇게 처신할 때도 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척하는 이들 앞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지

보여주시면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알려주신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악인들, 곧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진 알렉산드리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옳지 못한 생각으로”(지혜 2,1) 의인들을 비난한다.

 

그들은 의인들이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2,13) 것에 대해 질투하고 증오한다.

 

 그들은 의인들이 ‘자기들을 성가시게 하고 자기들이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긴 것을 나무라고, 자신들을 상스러운 자로 여긴다며’

(2,12-16) 반감을 갖는다.

 

그들은 악을 버리기는커녕 의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짐이 된다(2,14)고

투덜거린다.

 

그들은 정말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며 하느님께서 의인들을 돌보아주시는지

의인들에게 모욕과 고통을 주어 시험하고 죽이려 한다(2,16-19).

하느님의 의와 선을 시기하고 박해하는 이런 상황이

예수님에게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요한복음 7장에서부터 예수님의 죽음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치 않으셨다.”(1절)

 

그러나 그분은 초막절 축제 때에 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성전에서 유다인들을 직접 대면하여 자신의 신성(神性)과

 메시아로서의 신분을 선언하심으로써(7,10. 28) 닥쳐올 죽음을 준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계획이나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하느님의 때’를 살아가신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는 분명한 자신의 소명의식과

인류 구원을 위해 파견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경멸하고 시험해보려는 자기 형제들의 반응이나,

증오심으로 가득했던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반응에도

굽히지 않고 목숨을 다 바쳐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셨다.

나는 매순간이 하느님 안에서의 호흡이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담긴 ‘하느님의 때’(카이로스)임을 의식하며 살고 있는가?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목적 추구를 위한 ‘나의 때’(크로노스)에 매여

정신없이 헤매지는 않는가?

 

신앙은 온갖 어려움과 고통, 반대와 증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 참된 가치를 선택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보였던 군중들의 반응, 군인들의 반응,

자신의 위험 때문에 예수님을 직접 변호하지 못했던 니코데모의 태도가

 오늘을 살아가는 내 자신과 우리 사회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지혜서의 악인들처럼 하느님의 선을 질투하고 추구하지도 않으며,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모르고,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도 바라지 않으며,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2,22)

악의 늪에 깊이 젖어 있음도 알아채지 못한 채

무디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돌아보았으면 한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주님의 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