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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프란치스코) OFM

~ 사순 제 5주간 목요일 복음 묵상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사순 5주 목 요한 8,51-59(15.3.26)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요한 8,55)



Before Abraham was born, I am 


                        

 허상을 좇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우리는 눈만 뜨면 무엇인가를 찾고 성취하려고 열심히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러나 정작 찾고 있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지,

찾아야 할 것을 찾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왜 찾는지, 찾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찾고 있는 것이 하느님 안에서 의미 있는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의식이 없이

부산하게 움직인다면 그것은 허상(虛像)을 좇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의 태도를 통해 헛걸음, 헛손질하는 인생이 되지 않도록 영의 눈을 떠보도록 하자.

앞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이라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며,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말하는 당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악마의 자식’(8,44)이라고 선언하신다(8,31-47).

 

그러자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이고 마귀 들린 자’라고 비방한다

(8,48).

 

 그들은 자기 조상이 아브라함이라는 데 근거하여 아버지는 한분이신 하느님이시며

 자신들이야말로 사생아가 아닌 적자이며, 오히려 예수님이야말로

사마리아 사람이요 마귀 들렸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마귀 들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요 자신의 영광을 찾지 않는다고 반박하신다.

이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8,51)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유다인들이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그런 말을 한다며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비난한다

(8,52).

 

 그들은 예수님께 이미 죽은 아브라함이나 예언자들보다 더 훌륭할 수 없다며

 도대체 누구로 자처하느냐?” 하고 대들었다

(8,53).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당신의 신원을 분명히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으며’

(8,42),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 하느님이시다.”(8,54)라고 하신다.

 

 나아가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8,58)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 유다인들은 더욱더 분노한다.

유다인들의 태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들이 예수님께 이런 극단적인 적대감을 보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의 그릇된 하느님 상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아브라함의 유일한 하느님은

 곧 당연히 선택받은 민족인 자신들의 하느님이시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했던 하느님은 자신들의 상념과 자신들의 민족적 우월감에

 갇혀 있는 존재로서 말씀과 진리와 사랑이신 하느님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께로부터 축복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브라함과는 달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았고 그분의 계획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실제로는 하느님을 생각만 했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유다인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알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심으로써(8,55) 하느님 안에 머무셨고 온전히 일치되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안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말씀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간직하고,

그 말씀의 요구를 행동하는 실천으로 채우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유다인들처럼 완고하고 굳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생각 안에만 가두는 이들은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다리를 놓는 셈이어서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유다인들의 문제는 하느님을 자신들의 도구화, 이기적 대상화한 것이었다.

오늘날 정보사회에서는 다양한 삶의 양식, 개별성의 존중, 다종교, 다문화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두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하느님 중심의 삶보다는,

자신의 뜻에 하느님을 맞추고 자기 이익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할 때가 적지 않다.

 

 또한 자신의 생각대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부정해버리기도 한다.

 

이 사순절에 잠시 멈추어 나는 어떤 하느님상을 지니고 살아가는지

 깊이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일상의 삶에서 자신의 뜻과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주님께서

 나의 삶에 개입하실 여백을 마련하는 지혜가 참으로 중요한 때인 듯싶다.

 

 유다인들이 격앙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들었던 돌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보았으면 한다.

 

오늘도 유다인들처럼 하느님을 내 생각 속에서 만들어내거나

 생각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하느님에 만족하면서,

 ‘허상(虛像)을 좇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의식을 깨우는 복된 날 되시길...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오 나의 자비로운 주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