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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프란치스코) OFM

~ 사순 제 5주간 금요일 복음 말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사순 5 금 요한 10,31-42(15.3.2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요한 10,37)


Jesus asserts his divinity, and the Jews threaten to stone him
 
                        
고난의 언덕 저 너머의 빛을 바라보며  
 

때로는 오해받고, 뜻하지 않은 일로 조롱당하거나 멸시를 당하기도 하는

 우리네 인생길과도 같은 사순시기도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도 예수님의 수난과 하느님의 죽음의 신비 한복판으로 가는 모퉁이길에서

 유다인들의 태도와 예수님의 태도를 통하여 우리의 삶의 중요한 몇 가지 점들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이 임박하고 있다.

 

 유다인들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적대적이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율법과 하느님에 대하여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안식일법을 지키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로 자처하며 신성모독을 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요한 5,18; 7,11-31 참조).

 

 나아가 예수님의 행동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요한 11,48-57 참조).

유다인들은 유연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편견과 선입견, 의식을 조종해버릴 정도의

 습관에 젖어 예수님께 일관되게 반응하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있어서도 모든 계층과 여러 집단들이

각자 자기식대로 한몫을 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 처형을 위한 각본을 짰고, 여러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음모를 지휘했으며, 그 과정을 충동질하였고, 증인을 마련하고 결정을 강요했다.

 

두 명의 수석사제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죄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경전 내용을 왜곡하였다.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 경멸의 말을 퍼부었고,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상투적인 말로 예수님이 바보임을 보여주려 했다.

 

 여종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하도록 하였고,

 따돌림 받은 강도까지도 예수님을 비웃었으며,

 군인들은 실패자로 보이는 예수님의 고통을 조롱했다.

 

백성들도 이때만은 상류층과 야합하여 예수님의 처형에 동조하였다.

유다인들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태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고통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을 보여준 것이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사랑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삼아버린 것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기중심적인 인본주의자들로서, 예수님 안에 머물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누려오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정의와 사랑 곧 더불어 사는 세상을 싫어하며

계속 상승 구도 속의 지배만을 바란다.

 

그들의 돌보다도 더 무딘 마음과 차가운 무관심, 그리고 불신과 적개심에서 비롯된

 공격적인 태도가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오늘 나의 삶의 태도는 또 한사람의 유다인은 아닐까?

 

 서로에게 무심코 던지는 모진 말, 상처를 입히는 행동, 무관심, 불신,

 보복하려는 마음은 바로 예수님을 향한 유다인들이 지녔던 것들이다.

 

나 역시 나에게 세상적 편의와 만족을 가져다주는 구조와

 이데올로기의 우상에 빠져들지는 않는가?

 

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10,31)

 

그들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빵의 기적을 베푸셨으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죽은 나자로를 부활시키신 예수님, 곧 하느님의 생명을 죽이려 한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 ‘돌을 집어’ 들었다는 것은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 적개심을 품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무심코 던진 비인격적인 말 한마디, 냉정한 태도, 왜곡된 시선,

 부정적 비난, 자기중심적인 감정표현 등이 다른 이들의 마음에 못을 박고

엄청난 상처를 줄 수 있다.

 

 이제 우리 모두 유다인이기를 거부하면서 들었던 돌을 내려놓으며

 예수님께 달려가자.

 서로를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 안도록 하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처신하셨던가?

 

 그분은 유다인들의 몰이해와 무관심과 적대적인 태도, 박해와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일을 계속하셨다.

 

 십자가상 죽음이 임박했음을 아시고 회피하거나 목숨을 부지하려 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세례를 받으셨던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피해 가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기에 앞서 아버지 하느님을 바라보기 위함이었다.

우리도 삶이 고단하고 힘겨울 때,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했던 순간들과

 하느님 안에서 맛보았던 참기쁨의 장소를 회상해보자.

 

그렇게 조용히 아버지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분 친히 나의 위로가 되어주시며 힘이 되어주실 것이다.

세상적인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참된 위로를 줄 수 없을 테니까...

예레미야 예언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미리 보여주었다.

그는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사람들의 멸시와 모욕을 받아야 했다.

 

그는 소명을 주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자신의 소명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절규한다.

그의 기도는 분노와 복수의 외침에서 주님께 대한 신뢰와 찬미로 이어진다.

 

 그는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하느님을 신뢰하며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였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도 갈등하고 번민하며 주저할 때가 있다.

 

 그러나 고난의 언덕 저 너머 비치는 부활의 빛을 희망하며 오늘도 묵묵히

주님과 더불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자!

 

 깊은 신뢰와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오늘 이 하루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