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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프란치스코) OFM

++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복음 묵상 / 기경호(프란치스코) 신부님 ++

Jesus Sentenced to Death
 
주님수난 성지주일 마르 14,1─15,47(15.3.29)
 
“아빠! 아버지!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 14,36)
 
                            
 악마의 이중주와 사랑의 죽음  
 

전례는 부활을 향한 사순절의 순례 여정을 하루에 그리고 이 한 주간에 요약 압축하고 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마르 11,10) 하고 환성을 올리던 그들이,

 

이제 악의 무리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마르 15,13-14)라고 외치며

 ‘악마의 이중주’를 연주하고 있다.

 

이중성과 가면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 영원한 죽음을 향해 돌진하였고,

사랑이 말라버린 황야로 치닫고 있다.

 

이제 유다인들과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조소와 증오와 멸시로 가득한 인간 법정으로 넘겼다.

 환호하며 예수님을 간절히 원하는 듯 보였던 그들은 예수님의 사형,

예수님 처형의 방조범, 이기적인 관람객으로 변해버렸다.

그들은 십자가를 원했지 인간의 눈으로 힘없어 보이고

볼품없어 보이는 예수님을 원하지 않았다.

 

여기에 인간의 뿌리 깊은 죄가 폭로되고 사랑은 외출해버린다.

 

빌라도는 조작된 민의에 우유부단하게 말려들어 사형을 언도하고,

위선의 탈을 쓰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의인의 피흘림에

 책임이 없다는 표시로 손을 씻었다.

 

 한편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멸시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체포되자 모두 버리고 달아났으며, 더구나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기까지 했다.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고도 참 회개를 거부하고 어둠 속으로 가 목매달아 죽었다.

 그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돈에 눈이 멀어,

비겁함 때문에, 정치적 출세를 위해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모든 악의와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아시면서도

 사랑하는 벗을 취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

 

생명을 내놓는 사랑 밖에는 죽음을 이길 수 없으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 어떻게 가슴 뜨거운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할까?

먼저 가면을 벗어야 한다.

입으로는 주님을 찬미한다고 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나 직접 땀을 흘려야 하는 일에는 뒷짐지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주님처럼 섬겨야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만 인정받고 튀고 싶어 하는

 겉과 속이 다른 삶의 태도는 청산해야 한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고통스러우면 변덕을 부리거나

 신분이나 재산 정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영원한 생명, 구원의 길은 마음과 행동이 일치되는 곳에 있다.

다음으로 '더불어'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어둠의 세상을 뚫고 빛과 말씀 자체로 오셨다.

 진실과 사랑과 정의와 기쁨과 희망을 설파하시고 온 몸으로 증거하셨던 예수님이시다.

 

예루살렘에는 반대와 증오와 멸시와 배척과 무시, 그리고 서슬 퍼런 죽음의 칼날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반생명의 기운을 뚫고 골고타를 향해 오르셨다.

 

그분의 삶의 종착점은 죽음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야 할 참 생명의 길이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삶을 끌어안아야 한다.

 

우리는 외딴 섬처럼 홀로 머무는 ‘나’가 아니며, ‘너’가 아니며 ‘그것’은 더욱 아니다.

우리는 한 형제자매이다.

 

 우리 서로 어렵고 고달프고 외로운 사람들이지 않는가!

헌데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께 기대기만 하면 절로 솟아나오고

서로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사랑마저 없다면 얼마나 비참할지!

세 번째로, 우리 모두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르도록 하자.

십자가 곧 일상의 고통과 시련은 회피할 수 있는 것도,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우리 삶의 조건이기에 침묵 중에 그 고통의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꼭꼭 씹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도 쓰디쓴 도라지를 계속 씹으면 단맛이 우러나듯이 말이다.

죽음도 고통도 실패도 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피함으로써’가 아니라 ‘마심으로써’

 고통이 기쁨으로 바뀌는 길을 보여주셨다.

그 길은 나다워지고 하느님다워지는 길이다.

끝으로, 용서와 포용으로 무관심과 냉정, 죽음의 문화를 사랑으로 살려내자.

우리는 살인, 학대, 자살, 폭행, 사기, 각종 사고, 빈부격차의 심화 등

죽음의 문화와 사회 병리적 현상이 일상화하고 힘을 떨치는 세상에서

 동료 인간의 아픔과 시련, 죽음에 무감각해져 간다.

 

 이제 자신을 배반하고, 경멸하며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들마저 용서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이러한 냉담, 무관심을 따뜻이 데워

죽음의 문화를 생명으로 바꿔가야 하겠다.

 

우리 모두 악마의 이중주를 연주했던

 유다인들, 빌라도, 로마병사들, 바라빠 등과 달리,

진실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분을 영원한 도시 예루살렘에 모셔들이자.

 

 사랑의 도시를 향하여 십자가 바라보며 함께 올라가자.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