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8일 월요일 묵상과 기도
<성무일도> 예레 15,16
말씀 내리시는 대로 저는 받아 삼켰습니다. 만군의 주 하느님, 이 몸을 주님의 것이라 불러주셨기에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도 기쁘고 마음에 흐뭇하기만 하였습니다.
응송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흐뭇이 즐거워 하라. * 올바른 이라야 찬미가 어울리도다.
○ 새로운 노래 불러 찬미하라.
<청원기도>
주여, 당신의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어,
― 인내와 친절과 온유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하소서.
◎ 주여, 우리를 보호하시어 주님께 봉사를 드리게 하소서.
<오늘의 복음 말씀> 마르 2,18-22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영적 독서> 내 영혼을 위한 3분, 게르하르트 바우어 지음: 최용호 옮김
결승선, 다시 돌아보는 하루
하느님 현존의 체험
우리는 가끔 하느님을 지나치게 인간적인 분으로 여기거나, 그분에게서 지나치게 인간적인 면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들이 하느님을 바르게 인식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우상 금지 조항에는 하느님을 관념적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이라 부르는 커다란 신비에 대해 우리가 지닌 척도에 띠라 다른 관념을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념은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생각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또 다른 구절에서는 하느님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목자와 임금으로, 또한 친구
와 연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표상들은 우리가 하느님에게 더 가끼이 다가가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에 관한 모든 표상이, 사람이 하느님에게 가는 길 위에서 이용하는 방향 표지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표상이나 말이 아니라 오로지 그분과의 살아있는 만남을 통해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오늘 하루, 우리와 함께하시려 한다는 생각은 어지러울 만큼 놀라운 신비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나와 함께해주신 하느님 체험을 써 봅시다
사진: 이태리 스페코디나르니(성프란치스코 은둔소)
Photo: Italy Speco di Narni San 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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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월요 강좌>
성서 강좌
필리피서(우정의 편지)
1. 저자
필리피서가 발신자를 나타내는 ‘바오로와 티모테오” (1,1)라는 말로 시작하지만, 티모테오의 이름이 사도의 이름과 나란히 열거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 서간과 그 내용에 책임이 있는 이는 바오로 뿐이다. 이 서간의 어조는 다른 서간과는 달리 더 개인적이다. 예컨대, 바오로가 이 짤막한 서간에서 51번이나 사용한 ‘나” 라는 1인칭 대명사가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덧붙인 티모테오의 이름은 한 번 더 나올 뿐이다(2,19). 기대할 만한 끝 인사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실상,필리피의 저자로 인정할수 있는 이는 바오로 혼자뿐이다.
역사적으로 필리피서는 아무 문제 없이 바오로의 친서로 인정되었다. 필리피서를 인용했던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 이레네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테르툴리아누스와 그 외 교부들은 바오로를 저자로 확신하였다. 오늘날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대디수 학자들이 필리피서의 바오로 친저성을 확신하고 있다.
2. 집필동기
필리피서를 하나의 통일된 서간으로 여긴다고 해서,바오로가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갖고 이 서간을 저술했 했다고는 볼 수 없다.
1) 서간의 첫머리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집필 동기를 살펴보면, 이 서간은 필리피 교회의 사랑과 배려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쓰였다. 바오로의 투옥 소식을 들은 필리피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염려하여 에파프로디토스 편에 헌금을 바오로에게 보내왔고,그를 바오로 곁에 두어 시중들게 했다(2,25). 그런데 에파프로디토스가 병이 들어 중태에 빠지게 되었고(2,26.30), 바오로는 이로 인하여 필리피 교회가 얼마나 염려할 것언가 하며 근심하게 되었다(2,27). 그러나 얼마 후 에파프로디토스가 낫게 되고 바오로는 그를 다시 필리피로 돌려보내면서 필리피 교회의 사랑에 대해 감사의 글을 쓴 것이다(4,10-2이.
하지만,이런 외적 동기 외에도,필리피 교회 상황과 연루된 내적 목적도 무시할 수 없다.
2) 바오로는 그들에게 지금까지의 자신에 관한 소식, 즉 자신의 현재 상황과 미래 전망에 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 서간을 썼다. 바오로는 비록 자신이 위험에 처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으나 기뻐하고 있으며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서간을 썼다(1,12-26; 2,24). 덧붙여 자신의 투옥을 펌하하는 몇몇 “형제” 그리스도인들(1,14)의 비난에 대해,“모두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습니다." (2,21)라고 변론을 한다.
3) 필리피교회에 들어와서 거짓 가르침으로 교회를 혼란케 하던 유다 선교사들을 경계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이 적대자 무리는 바오로를 경멸하였고 할례를 강요하며 필리피의 그리스도인들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바오로는 현혹되기 쉬우나 거짓된 유다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경계하고,신자들이 유다교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가르침과 자신의 삶을 모범으로 삼기를 간청하고자 이 서간을 썼다(3,121).
4) 필리피 교회 내의 분쟁 상황을 바로잡고 일치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바오로는 에 파프로디토스를 통해 필리피 교회 내에 분파가 있음을 듣게 되었고,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가 될 것을 권고하기 위해서 이 서간을 기록하고 있다(1,27; 2,1-16; 4,2-30).
5) 필리피 그리스도인들에게 장차 닥쳐올 고난과 시련(광신적인 유다 선교사들의 메시지를 거부함으로써, 혹은 예수 이외에 다른 주님에게 경배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당하게 될 박해와 순교 가능성 때문이든 간에)에도 불구하 고, 그들이 복음의 신앙을 굳건히 지키고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해 이 서간을 썼다(1,27-30 참조).
6) 아울러,바오로는 필리피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할 것을 권고하기 위해 이 서간을 썼다(2,18; 3,1; 4,4). 바오로 자신도 감옥에서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지만(1,18-20) 기뻐하고 있고, 그들도 역시 그렇게 기뻐할 수 있다.
필리피서는 개인 서간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다. 이 서간에는 바오로의 집필 동기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서간은 친구들간의 격의 없는 대화처럼,주제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바뀌는 잡담과 같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서간의 구조를 만들기란 쉽지 않다. 이 서간은 아무런 논리적 전개도 따르지 않는다. 주제와 심지어 어투 까지도 급격히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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