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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inic Ko 신부님

~ 2016년 1월 19일 화요일 묵상과 기도 / 고 도미니코 신부님 ~

2016년 1월 19일 화요일 묵상과 기도

<성무일도> 1데살 5,4-5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암흑 속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그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응송
◎ 주여, 내 소리를 들으소서 *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
○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우심을 빌며,


<청원기도>
오늘 우리를 당신 사랑 안에 자라게 하시어,
― 모든 것이 우리와 모든 이에게 선익이 되게 하소서.
◎ 주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길을 걷게 하소서.

<오늘의 복음 말씀> 마르 2,27-28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영적 독서> 내 영혼을 위한 3분, 게르하르트 바우어 지음: 최용호 옮김
결승선, 다시 돌아보는 하루

당연한 그리움
필요한 그리움
“모든 것은 그리움에서 시작한다.”
독일의 시인 넬리 작스는 그리움이 모든 것의 동기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당신도 지금 그리워
하는 것이 있나요? 오늘 아침 당신은 무엇을 그러워했나요? 휴식과기분 전환, 휴가, 운동, 변화, 재미있고 자극적인 일 아니면 전혀 다른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니요?

깨져 버린 희망과 수포로 돌아간 기대의 물거품 속에서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내 인생
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어.’라는 체념 속에서도 아직 그리움이 남아 있음을 느낄 수만 있다면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아직 스스로 불안정하다고 느끼거나, 어딘가를 동정하거나, 집이나 자유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희밍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그리움을 알아치리려고 노력해 봅시다. 그리움의 발자취는 우리를 보다 더 큰 존재에게로,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존재에게로 끊임없이 이끌 것입니다. 우리는 끝없는 그리움
으로 인해 안정을 찾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성인의 고백처럼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더 큰 존재인 당신’ 안에 쉬기 전까지 우리
마음은 늘 그리움으로 가득한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그리움에서부터 하느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나요? 나의 그리움은 하느님과 맞닿아 있나요?

사진: 이태리 스페코디나르니(성프란치스코 은둔소)
Photo: Italy Speco di Narni San 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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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화요 강좌>
영성 강좌
영성신학, 샤를르 앙드레 베르나르 지음, 정제천·박일 옮김
영성과 신학
영성과 교의신학
영성이 교의신학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은 거의 항상 전제되어 왔으며, 일방적으로 강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 둘 사이의 차별성과 보완성의 관계를 부각시켜 보겠다.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의 영성학파를 탄생시킨 영성 생활은 어떤 앞선 신학에 의존하지 않으며 신학적 체계로 도식화되어 나타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영성은 당대의 지배적인 신학적 사고에 대한 반동으로서 발생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근대신심은 중세 말의 너무 추상회된 유명론 신학에 대한 반응이었으며 『준주성범』은 신학적 구성과 토론을 불신하였다. 우리 시대에 더 가끼운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1873-1897)는 복음과 성경으로 복귀할 것을 촉구하였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끝으로 우리 시대의 성령 쇄신 운동은 신학적 사변과 무관하게 발생하였고, 성령 쇄신 운동을 신학적 사변으로 합리화하는 데에는 앞으로도 적지 않은 힘이 클 것이다.
이처럼 영적 체험이 신학적 성찰에 앞서는 것이라면 영성신학이 이런 상대적 독립성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이 독립성은 결코 온전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소홀하게 다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를 올바로 설정하기 위해서 성경과 성전에 표현되는 교회의 공통적 교의와 개별적인 신학 체계들들 신중하게 구별해 보기로 하자
개별적인 신학이 신학 자체는 아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보나벤투라, 수아레스(1548-1617), 칼라너(1904-1984), 칼 바르트(1886-1968)와 같은 개별 신학자는 제한된 수준의 체계적인 성찰에 대한 작가이다. 이 성찰은 그 신학자가 활동하고 있는 시대의 역사적 조건물과 그의 개인적 체험을 반영한다. 개별적인 신학의 풍요로움과 가치는 그 신학자가 연구에 바친 노력과 그의 성덕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문화적 환경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개별적인 신학을 절대적 의미를 갖는 규범적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