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들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말씀을 듣고, 새로운 영혼이 되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르 2,18)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것을 새롭게 하시고 구원의 기쁨을 주는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고,
그 기쁨이 사라지는 슬픔의 때,
곧 죽음을 맞을 때가 바로 단식할 때라고 하십니다
(2,19-20).
바리사이들은 매년 속죄의 날에 하는 의무 단식(레위 16,29) 외에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습니다
(루카 18,12).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스승의 고행을 본받아 자주 단식했던 것 같습니다.
단식은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신심행위였으나
바리사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려고 위선적으로 했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생전에는
속죄의 날을 제외하고 단식하지 않았습니다.
1세기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금요일마다 단식했을 것입니다.
1세기 말에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디다케 8,1).
그리고 2세기 말에는 부활축일 전에 단식을 했습니다.
우리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나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기쁨을 가져다주는 그분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랑의 결핍과 부재’를 채우기 위해 단식해야겠습니다.
단식은 그 결핍과 부재, 새로움의 상실을
다시 하느님으로 채우기 위한 영적 용트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오심으로 열린 새 시대에 그분의 신앙과 가르침에 맞는
새로운 마음과 시각과 생활양식을 지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2,22).
또한 묵은 떼처럼 들러붙어 있는 바리사이들의 위선,
과거 전통과 제도에 매인 폐쇄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와 이 사회를 쓸모없고 썩게 하는 낡은 천과 낡은 부대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느님이 아닌 자신과 돈,
인간의 생각과 힘을 주인으로 섬기는 우상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물질에 대한 탐욕과 이기주의,
차별을 부르는 사회구조들,
복음의 가치보다 정치이념이나 사상을 앞세우는 태도,
비합리적 사고, 폐쇄적인 태도,
고정관념과 편견 등이 그것일 것입니다.
이제 그런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위해
새로운 마음과 순수하고 사랑 넘치는 눈길,
단순히 예수님을 따르며 사는 소박한 영혼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단순하게 바라보고 그분의 마음으로 느끼며
그분처럼 생각하기를 시작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듣고 명심함으로써’(1사무15,22)
낡은 천과 낡은 부대를 버리고,
주님 보시기에 좋고 우리 서로를 살리는
새 부대에 새 술을 담는 복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