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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inic Ko 신부님

~ 2016년 2월 9일 회요일 묵상괴 기도 / 고 도미니코 신부님 ~

2016년 2월 9일 화요일 묵상과 기도

<성무일도> 로마 13,11b. 12-13b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응송
◎ 나의 하느님, 나의 도움이시여,* 당신께 희망을 거나이다.
○ 나의 성채 내 구원자시오니,

<청원기도>
오늘 우리로 하여금 아무의 마음도 상하는 일 없이,
― 우리와 함께 있는 모든 이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게 하소서.
◎ 주여, 당신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며 구세주시로다.

<오늘의 복음 말씀> 마르 7,9-13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영적 독서> 내적 침묵으로 향하는 길, 에디트 슈타인, 이연행 옮김

5. 예수님의 사랑과 함께 사는 이를 위하여

하느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그들 두 사람 모두를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순전히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방식은 우리가 제일 먼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고양된 하느님의 모습을 제공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삶과 하느님의 삶이 가장 강렬하게 서로 교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성이 천성적으로 타고난 모성적 자질에는 배우자의 자질이 첨가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의 삶을 같이 나누고,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기쁨이나 고통, 그리고 노동과 문제가 되는 모든 것에 진실로 참여하는 것, 이것이 여성의 타고난 자질이며 기회입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서를 믿고 그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사람 그리고 사랑으로 그리스도께 애착하고 그분의 명령에 따르는 사람은, 가장 깊은 확신으로 이와 똑같은 정신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사랑의 화합 안에서 결합될 것입니다.
인류란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를 지탱해주는 전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하는 특별히 의미 깊은 경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차이점들을 넘어서서 우리를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의 남녀들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경험입니다. 그리고 다른 형태의 인류와 이렇게 접촉함으로써 우리의 경험은 풍요로워지고 신장될 수 있습니다.(-558)

사진: 이태리 스페코디나르니(성프란치스코 은둔소)
Photo: Italy Speco di Narni San 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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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화요 강좌>
영성 강좌
영성신학, 샤를 양드레 베르나르 지으 /정제천·박읾 옮김
III. 윤리신학과 영성신학
교의신학과 영성신학의 결정적인 중요한 차이는 영성신학이 체험이라는 개념을 취하는 데에 있는 반면에 윤리신학과 영성신학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사실 둘 다 구체적 생활을 다루며 인간 실존의 실천적인 면을 다룬다.
최근 윤리신학의 발달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데 한층 더 어려움을 주고 있다. 19세기에 토미즘 학자들을 제외한 수많은 윤리신학자들이 윤리신학을 다양한 계명들의 준수와 연관된 과제들과 의무들에 대한 결의론으로 축소시켰을 때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히는 일이 가능했었다 그 맥락에서 영성신학은 완덕의 길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성사 생활과 기도 같은 완덕의 주요 수단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윤리신학자들이 자일러(Sailer)와 히르셔(J. B. Hirscher: 1788-1865)와 같은 독일 학파 혹은 소위 튀빙겐 학파를 따라 윤리신학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이상을 전체로서 복음적 이상에 맞게 연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두 학문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긋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이 새로운 전망을 채택하였다.
다른 신학 괴목들도 그리스도의 신비와 구원 역사의 관계를 더욱 생생하게 깨닫도록 개편하여야 한다. 특히 윤리신학을 보완하는 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그 학문적 해설을 성경의 가르침으로 더욱 풍요롭게 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지들의 고귀한 성소를 깨우쳐주며, 세상의 삶을 위히여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할 신지들의 의무를 밝혀주어야 한다(사제 양성 교령 16항).
현대적 용어로 말하면, 윤리신학은 여러 가지 덕이나 특수 계명 등과 같은 어떤 범주적 전망 속에 갇혀서는 안 되고, 거룩함으로의 성소라든지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성령에의 참여를 통한 거룩함의 실현 등 그리스도 생활의 초월적 기반들을 세우는 데에 이르기까지 전망이 확대되어야 한다. 이로써 윤리신학과 영성신학이 서로 대단히 가깝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Dominic Ko님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