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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inic Ko 신부님

~ 2016년 3월 9일 수요일 묵상과 기도 / 고 도미니코 신부님 ~

201639일 수요일 묵상과 기도

<성무일도> 신명 7,6b. 8-9
너희 주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민족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너희를 뽑아 당신의 소중한 백성으로 삼으셨다.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그 맹세를 지키시려고 주께서는 당신의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신 것이다. 그리하여 이집트왕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건져내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알아야 한다. 너희 주 하느님 그분이야말로 참 하느님이시다.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으로 맺은 계약을 한결같이 지켜 주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이시다.

응송
사냥꾼의 올무에서 * 주께서 너를 구하여 주시리라.
모진 괴질에서

<청원기도>
큰일을 기다려서 사랑을 실천할 것이 아니라,
우선 일상 생활의 작은 일에서부터 사랑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주여, 당신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소서.

<오늘의 복음 말씀> 요한 5,30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영적 독서> 성경말씀을 통해 부정적 감정극복하기/두려움, 조이스마이어지음, 문종원 옮김
1. 두려움에 맞서서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내 샤람이다!
이제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의 말씀이시다.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야훼의 말씀이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건져주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갈 때 너를 보살피리니 그 강물이 너를 휩쓸어가지 못하리라. 네가 불속을 걸어가더라도 그 불길에 너는 그을리지도 타버리지도 아니하리라(이사 43,1-2).

위의 성서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시련이 닥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은 우리가 그러한 시련들을 딛고 일어서야만 삶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시련들을 뛰어넘으려면 더 이상 도망쳐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물을 건널 때 휩쓸려가지 않도록, 또 불속을 걸어가더라도 그을리거나 타지 않도록 우리와 함께 계시고 보호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뱃느고라는 유다인들의 이야기를 기억히는가? 그들은 활활 타는 화덕 속에 던져졌지만 불에 데지도 않고 불길이 닿은 냄새조차 없이 살아나왔다!(다니 3,1-30)
두려움에는 아주 큰 두려움과 작고 사소한 두려움이었다. 활활 타는 화덕 속에 던져지는 것과 같은 시련은 큰 두려움이고 머리 모양이 제대로 안 나오면 어쩌나 히는 불안은 아주 작고 사소한 두려움이다.

우리는 암이나 심장 마비 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등에서 큰 두려움을 경험할 수 있고, 소풍가서 비가 올 일을 걱정하거나 주차 장소를 못 찾을까 봐 걱정하는 등의 사소한 것들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두려움의 정도나 원인이 어떻든 간에 두려움은 똑같은 방법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두려움은 우리의 원수이므로 원수처럼 다루어야 한다. 이미 확인했듯이, 두려움은 하느님의 말씀이 드러나는 기도를 통하여 맞서 이겨낼 수 있다. 그리고 기도를 할 때는 반드시 믿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642)

사진: 이태리 뽀지오부스토네(성프란치스코 은둔소)
Photo: Italy Poggiobustone San 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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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수요 강좌>
교회사 강좌
세계 교회사
고대그리스도교
11-131
7절 내적위기: 분열과 이단
이단과 분멸의 의미: 이단이 다양하고 빈번하다는 사실을 대하면, 분열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현실적인 문제로 등장한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분쟁도 있어야 시련을 견디어 낸 이들이 여러분 가운데서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1고원 11.19). 바오로는 이렇게 고린토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로르츠는 하나의 다행한 과실이라고 하며. 오류와 과실은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하나의 깊은 뜻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고 강조하고 있다. 교회는 자신에 대한 반대의 말을 듣고 그것을 거부함으로써만 자기자신의 진리를 더욱 명백히 인식하게 된다고 라너는 설명하고 있다. 이단을 단순히 악의와 동일시하고, 또한 그것이 때로는, 더욱 올바른 구원의 진리에 대한 특별히 열심한 개인적 탐구에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거짓된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예로니모는 불타는 정신력이 없고 또한 예술가인 하느님이 창조한 천부적인 선물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도 이단을 일
으킬 수 없다고 쓰고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형제들이여, 이단이 어떤 작은 정신에 의하여 생길 수 있었다고 믿지 마십시오. 위대한 인간들만이 이단을 만들었습니다(시편 주해 124)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이단을 즉시 나쁜 것이라 부르고, 확실히 그것이 크기에 더욱 위험한 암초와 비교하면서 이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위의 바오로의 말도, 그가 이단에게 진리 인식의 촉진에 기여한다는 뜻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려 한 것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오히려 바오로는 이단 안에서 개인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도, 아니 그 이상으로 교회를 그 최종 목적에서 이탈시키려는 구원에 대한 무서운 위협을 보고 있다. 오직 하나이고 유일하고 유효한 하느님 계시의 진리만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는 자신의 보펀적인 구원 사명과 종말론적인 사명 때문에 그 진리에서 분리될 수 없다. 악한 원수는 밀밭에 가라지 씨를 거듭하여 뿌림으로써 , 진실의 결실보다 그것을 증식시켜 결실을 질식시키려 하고 있다. 마지막 날에 가서야 비로소, 큰 격리와 더불어 진리의 승리에 대한 명백한 제시가 드러난다. 그러나 그때까지 교회는 자신의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가라지에 대한 방어를 되풀이해야 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도 이단과 그 주모자들을 교회의 배설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외부로부터의 혼합주의적인 신앙의 위조에 대하여 방어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몬타누스주의와 그후의 테르툴리아스처럼 금욕주의적 엄격주의적인 종파에 속한 이들이 요구한 것처럼 소심적인 신앙의 축소에 대해서도 방어하였다. 교회는 2세기부터 사도전승 원칙의 정확한 해석, 성서의 정전 확정, 끝으로 주교들의 공동심의 등을 통하여 방어를 하였다. 몬타누스주의 운동에 대항하고자 처음으로 프리기아의 주교들이 교회회의에 모였다. 이러한 지역 교회회의로부터 곧 더 큰 모임이 생겼다. 3세기 중엽에는 전 관구의 주교들이 관구 대주교에게 모이는 관구 교회회의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아프리카의 주교들은 카르타고에. 이집트의 주교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아시아의 주교들은 안티오키아나 가이사리아,이탈리아의 주교들은 로마에 모였다. 콘스탄티누스 전환 이후 처음으로 전 로마 제국의, 전세계적으로 주교들이 교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모일 수 있었을 때, 콘스탄티누스의 사회하에 니체아의 제 1(325) 일반적 공의회가 아리우스주의의 이단, 그리고 멜리티우스(이집트)와 도나투스(북아프리차)의 이교를 해결하기 위히여 개최되었다.(60)


Dominic Ko님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