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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inic Ko 신부님

~ 2016년 3월 25일 성 금요일 묵상과 기도 / 고 도미니코 신부님 ~

2016년 3월 25일 금요일 묵상과 기도

<성무일도> 1베드 2,21b-24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 말씀에도 아무런 거짓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으며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

응송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도다.

<청원기도>
고통받는 모든 이를 위로하소서.
◎ 성부여, 성자의 죽으심을 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오늘의 복음 말씀> 요한 18,29-30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영적 독서> 성경말씀을 통해 부정적 감정극복하기/두려움, 조이스마이어지음, ’문종원 옮김
3. 기도의 종류
청원기도
아무 걱정도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필립 4,6).
청원 기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도록 간청하는 것이다.
나는 항상 “저를 도와주소서”라는 기도를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기도라고 말한다. “저를 도와주소서. 하느님, 저를 도외주소서! 오 하느님, 저를 도와주소서 !” 나는 자주 이러한 기도를 바친다.

때때로 자다가 도중에 회장실에 갈 때가 있다. 그때 여전히 “오 주님 저를 도와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라며 무의식중에 기도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나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성령께서 이러한 방법으로 기도하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
“하느님 저를 도와주소서 !” 이것은 힘 있는 기도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는 항상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중요한 청원 기도의 양식이 있는데 그것은 단순하게 “하느님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다. 만일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 안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잠언 3장 5절부터 7절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마음을 다하여 야훼를 믿어라. 잘난 체하지 말고 무슨 일을 하든지 야훼께 여쭈어라. 그가 네 앞길을 곧바로 열어주시리라.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지 말고,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고 악을 멀리하여라.
어떤 일을 추진하고 싶다면 먼저 도움을 청하러 하느님께 달려가라. 우리 계획에 앞서 하느님의 계획이 있음을 깨닫고 온전히 하느님께 의지해야 한다.
“주님, 저는 미약하오나 당신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저를 써주소서. 저의 온 마음과 생각으로 당신을 의지하며 믿고 신뢰합니다. 주님 저를 도외주소서. 저는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작은 청원 기도를 통해서도 우리는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리는 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특별히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으로 깨닫게 된다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많은 실패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 저는 당신께 의지하오니 저를 도외주소서”라고 말할 때, 이것이 바로 청원 기도이며 참으로 힘 있는 기도가된다. 청원 기도는 또한 원하는 것 필요한 것 또는 열매맺는 것들이 채워지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하느님께 편안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한다. 기억하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고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675)

사진: 이태리 뽀지오부스토네(성프란치스코 은둔소)
Photo: Italy Poggiobustone San 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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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금요 강좌>
신학 강좌
제4장 학문으로서의 신학

제 2 절 신학은 학문인가?
1. 질문의 의미에 대해서
신학은 "theo-logia”로서 학문일 수 있는가 아니면 어떤 학문성도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유럽의 사고를 지배하는 동안은, 신학은 최고의 학문으로 통했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가 그 규범성을 상실하게 되면서 신학의 학문성은 의문시되었다. 철학은 신학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자립적으로 세상과 세상에 주어져 있는 것들에 대해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신학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길을 걸었다. 철학의 새로운 자기 이해와 근대적 학문의 발생은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 학문, 특히 경험적인 실재를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아무런 사전이해 없이 정확하게 감지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자연과학들의 노력은 신학의 학문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무전제성을 학문작업의 기준으로 삼으면서 경험적 실재를 넘어서는 모든 사안들을 이성적인 연구에서 배제하는 상황에서, 신학의 학문성은 의문에 붙여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세기에 만연했던 자연과학자들의 확신과 기대와는 달리 20세기 이후부터 나타나는 학문이론에 의하면, 실재에 대한 순수 객관적인 접근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게 되었다. 학문적 인식도 관심사에 의해 좌우될 수 있고, 연구목적은 차치하고, 연구대상의 선택 혹은 방법의 선택은 학문을 하는 주체의 주관적인 결정과 투신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전공을 벗어나거나 전공과 상이한 동기들을 얼마든지 내포할 수 있다.
아무튼 신학이 학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문들과 다른 면을 분명히 부각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신학은 자신의 학문성을 주장할 때에 다음과 같은 신학으로서의 특성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첫째 신학의 대상영역은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직접 대상이 되기도 하고(하느님에 관한 질문) 혹은 사람과 세상이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로서 대상이 되기도 한다. 둘째, 신학이 인식을 얻는 원천, 그리고 그 진리기준들은 하느님의 계시와 이성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우위를 차지한다. 셋째, 신학의 주체성파 실재에 대한 관찰은 신앙(행위로서의 신앙 fides qua와 대상으로서의 신앙내용 fides quae) 이다. 넷째, 신학의 사회적 장소는 신앙인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이다(communio). 이 안에서 신앙을 살아가고 전달한다(traditio). 신학은 신앙을 비판적으로 반성해야 한다. 다섯째, 신학은 신앙의 학문이다.(65)



Dominic Ko님의 사진.